늦은 오후의 햇살이 좁은 계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임스는 노란 탐정의 사무소를 나서며 주머니에서 방금 받은 명함을 꺼내 들었다.
빛바랜 종이에는 단순한 활자체로 ‘노란 탐정’이라는 글자만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잠시 명함을 바라보다가 지갑 속에 조심스레 넣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아쉬운 듯이 뒤를 돌아보자 낡은 건물 외벽에 걸린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노란 탐정 사무소>라고 쓰인 그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마치 수십 년을 버텨온 것처럼 군데군데 녹이 슬고 색이 바랜 상태였다.
제임스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램프의 저주로 인해 ‘노란 탐정’이라는 이름의 주인이 수도 없이 바뀌어왔으니, 제대로 관리받지 못했겠지.
제임스 타워 침입 사건 이후, 노란 탐정에 대해 조사하면서 알아낸 정보였다.
이렇게 대놓고 수상한 오브젝트가 사회에 암약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다니….
역시 인류의 시스템은 오브젝트의 위협에 대처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물론 한국이 특이할 정도로 미흡했던 탓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사장님, 이대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의아한 목소리로 비서가 물었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며 제임스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본인이 당분간 큰일은 맡지 않겠다고 하니까.”
예지 능력을 가진 탐정을 스카우트하려 했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노란 탐정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제임스의 표정에는 실망감보다는 묘한 기대가 깃들어 있었다.
“그래도 예지 능력자니까, 자신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분명 연락해 올 거야.”
비서의 얼굴에 의심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 정도 수준의 예지 능력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제임스는 비서의 그런 표정을 보며 지나가듯이 말을 흘렸다.
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노란 탐정의 능력은 소지한 오브젝트 장비를 제외하면 꽤 뛰어난 수준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지만, 제임스는 그 이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수많은 사람을 집어삼킨 램프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평범할 리 있겠는가.
건물 밖으로 나오자, 눈 부신 햇살이 제임스의 얼굴을 비췄다.
그 따듯한 온기 때문인지, 제임스의 머리 위에서 잠들어 있던 황금 사신이 깨어났다.
‘태양!’
마치 시든 꽃이 물을 만난 것처럼 활기를 되찾은 황금 사신의 모습에 제임스는 무심코 미소 지었다.
제임스는 다시 생기를 되찾은 황금 사신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는 순간, 탐정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모두 마쳤으니, 이제는 좀 쉬어야 할 때….’ 인가.”
그 말에는 묘한 울림이 있어, 단순한 거절의 표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제임스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사무소가 있던 건물을 바라보자, 2층 창문 너머로 탐정과 그의 후배들이 어째서인지 야단법석을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선배, 램프 사신이가 소원 들어줄 수 있대요!”
“절대로 안 돼.”
작게 열린 창문 틈으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잔뜩 신이 나서 품에 램프를 안고 도망가는 후배와, 그걸 쫓아가는 탐정.
그리고 창문가에 서서,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는 나머지 두 명의 후배.
제임스는 그 광경을 보며 차에 올랐다.
그리고 부드러운 엔진음과 함께, 차는 천천히 건물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마 저들의 위험천만한 모험은 이걸로 끝이겠지.’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사무소를 바라보며, 제임스는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
평소라면 격리실에서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을 늦은 저녁.
나는 예린이의 손을 붙잡고, 예린이의 아파트로 향하고 있었다.
예린이가 자기 집에서 정말 좋은 일을 기념하는 파티를 연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좋은 일?
분명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기념하는 파티겠지만, 딱히 할 일도 없이 심심해서 순순히 따라나섰다.
아마 저번에 했던 100번째 아기 황금 사신 사진 촬영 기념회처럼 별 중요하지 않은 일이겠지.
그렇게 예린이의 아파트에 도착하자, 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황금 사신들이 천장에 매달려 풍선을 붙이고, 검은 사신들이 식탁 위로 과자들을 옮기고 있었다.
예린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성녀 인형에게 학사모를 씌워주고, 꽃다발도 안겨주는 등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학사모나 꽃다발 같은 맥락 없는 물건들을 사길래, 어디다 쓰려고 한 걸까 궁금했는데….
성녀 인형용이었구나.
학사모라….
나는 써본 적이 없는 모자였다.
지금 와서는 별로 써보고 싶지는 않지만.
“세희 연구소에 필요한 모든 학문을 익힌 우리 성녀 인형에게 박수!”
짝짝짝.
예린이의 밝은 목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예린이의 아파트에 자주 출몰하는 납 인형도 따라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박수라기보다는 천천히 손을 맞대는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보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단해!’
‘똑똑해!’
예린이의 아파트에 상주하는 미니 사신들도 폴짝폴짝 뛰며 축하의 의지를 보냈다.
감탄과 즐거운 감정이 허공으로 마구 흩뿌려졌지만, 미니 사신들은 무슨 일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성녀 인형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축하에 대한 감사 인사를 했다.
사실 오늘 파티는 이름을 바꾸면, ‘예린이 땡땡이 시도가 가능해진 파티’니까 성녀 인형이 저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엄청 빠르네.
저 많은 책을 벌써 다 외워버리다니.
성녀 인형이 특별히 똑똑한 걸까, 아니면 원본인 예린이가 저 정도로 초월적인 지능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세희 연구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예린이도 상당한 천재였다는 것 같으니까, 예린이가 똑똑해서 생긴 일이겠지.
하지만 어느새 내 등 뒤로 다가와서 나를 꼭 껴안는 예린이의 해맑은 표정을 보면 전혀 똑똑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예린이가 사진기를 꺼내 들자, 한바탕 사진 촬영이 시작되었다.
학사모를 쓰고 꽃다발을 든 성녀 인형을 찰칵.
나와 예린이, 그리고 미니 사신들도 포함해서 모두 함께 찰칵.
셔터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미니 사신들은 사진 찍기를 굉장히 좋아했다.
‘앗!’
‘똑같이 생겼어. 히히.’
뭐, TV 광고에 미니 사신이 나오면, 다들 흥미진진한 눈으로 구경하곤 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미니 사신들은 다양한 포즈를 하고 다양한 사물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미니 사신들은 특히 나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귀찮아서 그저 누워만 있었지만, 그들은 내 배 위로 우르르 몰려와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마치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신나 보였다.
그렇게 한차례 야단법석이 지나자, 예린이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이제부터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어!”
음….
나도 예린이랑 같이 있는 게 좋긴 했지만, 하루 종일 계속 같이 있기는 좀 귀찮았다.
하지만 예린이가 행복해 보이니까,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뭐,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순간이동으로 도망가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예린이의 품에 안긴 채, 예린이가 먹여주는 케이크를 먹었다.
옴뇸뇸.
파티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길게 늘어선 줄이 눈에 들어왔다.
황금 사신들로 이루어진 기다란 행렬.
전부 황금 사신인 데다가, 다들 품에는 조그마한 하얀 아귀를 안고 있는 정말 특이한 행렬이었다.
‘하얀 아귀들이 전부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네.’
황금색으로 칠해져서 그런지, 황금 사신들은 색칠 아귀를 뜯어먹지 않았다.
오히려 애착 인형처럼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저게 뭘까 하고 보고 있었더니, 예린이가 나를 안아 들고는 황금 사신 행렬의 끝으로 걸어 나갔다.
그 끝에는 황금 사신 전용 미니 목욕 시설이 있었다.
세면장에 있을 법한 플라스틱 컵이 잔뜩 늘어서 있었고, 그 안에는 황금 사신이 거품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세희 연구소의 호화로운 시설에 비하면 소박했지만, 황금 사신들의 표정만큼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잔뜩 비누 거품이 솟아 나온 조그마한 컵 안의 황금 사신과 눈이 마주치자, 황금 사신은 해맑게 웃었다.
‘엄마!’
품 안에 하얀 아귀를 안고 있는 행복해 보이는 황금 사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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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형색색의 아귀들이 관리하는 거대한 저택.
신비로운 정원에 떨어진 황금 사신은 애착 인간과 함께 생활한 지 시간이 꽤 흘렀다.
처음에는 조금 데면데면한 느낌도 있었지만, 황금 사신 특유의 친화력 덕분인지 이제는 완전히 같이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졌다.
그렇게 황금 사신과 그 애착 인간에게는 평화로운 나날만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저택 내부에서 조금씩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망가진 장난감처럼 행동을 멈춰버린 아귀.
정돈되지 못한 정원.
갑자기 시들어 버린 정원수.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지만, 보라 소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황금 사신이 멈춰버린 하얀 아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상하다고 해도 그랬다.
“가끔 멈추던데, 원래 그런 거 아니야?”
그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인데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던 황금 사신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인간이 이를 심하게 가는 것 같은 소리.
그래서 황금 사신은 이 저택의 유일한 인간인 보라 소녀 쪽을 돌아보았지만, 보라 소녀는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
자세히 들어보니, 그 소리는 방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떡하지?’
하지만 보라 소녀가 황금 사신에게 당부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밤에는 절대로 방 밖으로 나가면 안 돼.”
황금 사신은 그 이빨을 가는 소리가 정말 불길하게 느껴졌지만, 차마 인간의 당부를 어길 수는 없었다.
아직 그렇게까지 해로워 보이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