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45

에런은 그의 앞에 서 있는 작은 소녀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마물 무리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지원을 갔지만 이미 아비규환이 된 도시.

카나는 그 도시의 생존자였다.

‘이 애는 분명 크게 될 거야.’

가리드가 그의 품에 안겨 잠든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압도적인 상대를 앞에 두고도 겁먹지 않는 용기, 냉철한 판단력, 끝까지 꺾이지 않는 독심.

그 모든 것들이 아무리 잘 쳐줘도 대여섯 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 소녀가 보일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마물과 맞서 싸우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린 에런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가족을 찾아볼까요?’

에런은 소용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찢어지고 해진 옷. 꼬질꼬질한 얼굴과 몸.

어디 귀족가의 아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귀여운 얼굴이지만, 막상 행색을 보면 고귀한 출신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모가 없거나, 있더라도 저 아비규환 속에선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찾아는 보고, 찾지 못한다면….’

‘…못한다면?’

‘내 딸로 삼을까?’

‘…예? 갑자기요?’

에런은 가리드가 부모를 잃거나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들에게 연민을 가지는 것을 자주 봐왔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놀란 마음을 감추지 않고 묻는 그에게 가리드는 씨익 웃어 보였다.

‘마음에 들었거든.’

양녀 제안을 받아들인 소녀는 가리드의 딸이 되었다.

에런은 가리드의 관계는 단순한 직장 동료가 아니라 친우라고 할 수 있는 관계였던지라 그는 가리드의 집을 자주 오갔고, 가리드 대신 카나를 돌본 적도 많았다.

비록 존대를 하고 있지만, 에런에게 있어 카나는 친딸이나 수양딸만큼 애착이 가는 아이였다.

“단장님은 여전하군요.”

“…무슨 의미?”

“무슨 의미는 무슨 의미입니까. 당연히 키 말한 거죠. 그러게 어렸을 때부터 고기만 먹지 말고 야채도 먹으라고 했는데, 가리드도 그렇고 단장님도 그렇고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

“아, 아아아- 안 들려-”

카나가 귀를 막으며 도리질을 쳤다.

영락없이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에런이 못마땅하게 보면서도 잔소리를 멈추니 그제야 카나도 도리질을 멈췄다.

“편식 때문이 아닌 거 알잖아. 변태 도마뱀만 아니었으면 이것보다 두 배는 컸을 거야.”

“…그라시드 님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단장님뿐일 겁니다. 그리고 두 배는 무슨 두 배입니까?”

또한 그렇게 말하고 무사할 수 있는 사람도 카나밖에 없을 것이다.

“변태를 변태라고 하지, 그러면 뭐라고 해?”

“…됐습니다. 그냥 넘어가죠. 그보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겁니까?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라져서는, 찾아도 보이지 않고.”

대충 짐작이 가는 곳은 있지만.

에런이 물었다.

“가리드의 묘지.”

“역시 그곳에 있었군요.”

카나의 대답은 에런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알고 있었어?”

“평소에 친구를 사귄 것도 아니고 제국에 몸을 던질 사람도 아니니, 단장님이 있을 곳이라 해봤자 거기밖에 더 있겠습니까?”

“에릭은 짐작도 못 하고 있었는데.”

“에릭도 만났습니까? 그 녀석은 뭘 하고 지낸답니까?”

“응. 오르도의 경비대장으로 일하고 있어.”

“…경비대장? 그 녀석이?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데요…?”

“그 놈도 나이를 먹었으니까.”

“…?”

카나가 지금 몇 살이었더라?

에런은 대충 셈을 해보았다.

그가 처음 봤을 때 카나가 여섯 살이었고, 그 후로 십 년 하고 조금 더 지났으니….

‘대충 열일곱 정도겠군.’

스물도 되지 않는 녀석이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놈을 두고 저렇게 말하다니.

심지어 카나의 외모는 실제 나이보다 어린 편이라 에런은 카나의 말이 더 우습게 느껴졌다.

“짐작하고 있었으면서 왜 안 찾아왔어? 가리드가 섭섭해할 거야.”

“때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죠.”

“…응?”

카나의 의문에 에런은 그저 빙긋 웃었다.

“단장님이 이렇게 나왔으니 나중에 한 번 찾아가야겠군요.”

“응. 아, 내가 없을 땐 안 돼. 뱀 새끼가 결계를 쳤거든.”

“…뱀 새끼? 설마, 그 녀석을 말하는 겁니까?”

“뱀 새끼가 그거 말고 더 있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설마, 밖에 나온 것도 그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뱀 새끼 덕분에 궁금한 걸 해결하러 나올 수 있었던 거니까.”

카나가 손님맞이용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안 그래도 작은 체구인데, 큰 책상에 가려져서 에런의 시야엔 카나의 머리만 간신히 보였다.

“사도에 대해서 궁금한 게 생겼거든.”

“사도….”

“아는 거 있어?”

“아뇨. 그냥-”

에런이 한숨을 쉬었다.

“요즘 사도들 때문에 리베리도 꽤 골머리를 앓고 있어서 그랬습니다.”

에델의 인도로 갑자기 아르디나에 나타난 이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에런의 직책은 교육대장.

그는 어디까지나 교육에 관한 일만 관여할 뿐, 그 외의 행정에는 깊게 관여하지 않았지만 리베리의 현재 분위기는 잘 알고 있었다.

에델이 데려온 사람들이니 호의적으로 대하는 이들이 대다수지만….

“불만이 아예 없진 않죠.”

기존의 용병들은 수년을 굴러 실력과 실적을 쌓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비로소 다음 등급 용병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사도들은 다르다.

기존 용병들에 비하면 심사가 훨씬 간략해서 사실상 실적만 있으면 되는 수준인데, 그 실적조차도 원래 요구하던 것보다 훨씬 적게 요구한다.

명백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느끼는 용병이 꽤 많았다.

“에델 님의 총애를 받으면 다냐, 아무리 그래도 심사는 공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 등등….”

“똑같이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게 또 쉽지 않습니다. 기존 용병들의 심사를 간략하게 하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늘어날 테니까요.”

사도는 실력이 좀 부족해도 괜찮다.

어차피 그들은 에델의 가호 때문에 무한정으로 살아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르디나 대륙 사람들의 목숨은 무한이 아니다.

괜히 심사 난이도를 낮춰 아무한테나 높은 등급을 주면 분수에 넘치는 의뢰를 받고 죽을지도 모른다.

리베리는 용병을 키우고 싶은 거지, 나가서 싸우다 죽을 소모품을 키우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러면 반대로 하면 되잖아.”

“하아…. 그럴 수 있었다면 그랬죠.”

간단한 해결책인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나.

일단 실적이 쌓이는 속도에 비해 강해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비록 숙련도는 좀 부족해도 육체적 강함이나 몸 안에 품은 마나는 어지간한 용병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에델 님이 직접 말씀하신 건데 어떻게 그럽니까? 이해가 돼요? 무려 신탁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요.”

“…에델이?”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고. 환장할 노릇이죠.”

에델의 신탁을 무시할 수 있는 곳은 적어도 이 아르디나 대륙엔 없었다.

위상이 하늘을 찌르는 로 아르카 제국조차 에델, 그리고 세데스 성국에겐 머리를 숙였다.

“갑자기 바다 너머 대륙 사람들을 데리고 오신 것도 모자라 이런 말씀까지 하시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글쎄.”

에의 푸념을 듣던 카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바다 너머 대륙이라….”

“뭔가 아는 게 있습니까?”

“…아니.”

카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그래서 성국으로 가는 거야.”

에델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 * *

“에델 님께 물어본다고요?”

에런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양 귀를 후볐다.

“애초에 이번에 신탁이 내려온 것도 수백 년 만에 있었던 일이라는데, 그게 되겠습니까?”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시도는 해볼 수 있는 거잖아.

에런은 삐딱한 얼굴로 영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도조차 못 할 거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단장님이라면 분명 ‘에델이랑 대화하고 싶어’라고 할 텐데, 에델 님이 무슨 옆집에 사는 소꿉친구입니까? 그렇게 말하면 ‘아, 그러시군요! 이쪽으로 들어오세요!’라고 할 줄 알아요?”

“…그, 그럴 생각은 없었-”

“그럴 생각 없기는 무슨. 제가 단장님을 몇 년이나 봤다고 생각하십니까. 속일 사람을 속이시죠.”

“….”

나는 차마 에런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의 말처럼 행동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심하게 입술을 삐죽이고 있으니 에런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을지도 모르죠.”

“…아깐 안 될 거라며.”

“신도들의 말에 따르면, 에델 님은 기도실에서 드리는 모든 기도를 듣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단장님이 정성스레 기도를 드리면 답을 주실지도 모르죠.”

“난 신도가 아닌데?”

“이 기회에 에델 님을 믿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

새삼스레 종교를 가질 생각은 없으니 그렇게 도움이 되는 조언은 아니었다.

“일단 가보고 생각할래.”

“마음대로 하세요. 언제는 단장님이 제 말을 들었습니까?”

“그렇게까지 안 듣진 않았어.”

“그래서 야채를 그렇게 필사적으로 거르셨군요.”

“…또 그 얘기야?”

돌고 돈 이야기가 다시 편식 이야기로 돌아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긋지긋하게 듣던 얘기라서 나는 진저리를 치며 화제를 돌렸다.

“맛대가리 없는 야채 이야기는 이제 됐고. 너는 왜 여기서 일하고 있어?”

무언가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하던 에런은 결국 하려던 말을 삼키며 한숨을 푹 쉬었다.

“배운 게 이런 건데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제국은 가고 싶지 않았는데, 리베리에서 교육대장 자리를 준다길래 이참에 만년 부단장 신세도 벗어날 겸 냉큼 승낙했죠.”

만년 부단장.

에런을 놀리는 말 중 하나였다.

가리드가 단장일 때 부단장이었던 그는 내가 부단장 자리에 앉았을 때 잠시 평단원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가리드가 죽고 내가 단장이 되었을 때 다시 부단장에 복귀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만년’ 부단장은 아니었으나, 평생 단장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하는 놀림이었다.

전생에도 모 프로게이머 때문에 비슷한 뉘앙스의 말이 있었던 거 같은데.

아쉽게도 기억이 안 나네.

“나도 여기 취직할까? 너처럼 교육 담당으로.”

“제발 참아주세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진지하게 한 말이 아니라 만년 부단장인 그를 놀리기 위해 한 말인걸.

장난이었다고 말하려던 때, 에런이 나보다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용병들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

…그쪽이 문제였어?

“용병들이 왜.”

“…정말 몰라서 묻습니까?”

“응.”

모르니까 묻지, 알면 귀찮게 물어보겠어?

내 덤덤한 반응에 그가 이마를 짚었다.

“됐습니다. 아무튼 누굴 가르칠 생각은 최대한 자제하세요.”

단장님한테 가르침 받을 사람이 불쌍하니까.

덧붙이는 그의 말에 나는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대답 없이 눈만 깜박이기를 한참.

무언가를 느낀 건지 에이 이마를 짚은 손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죠?”

“….”

“아이고, 카나야….”

그가 나를 이름으로 부른 것이 무척 오랜만이었던 터라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에런은 두 손을 곱게 모았다.

“대체 그 사람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카나를 만났을까….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멋대로 죽은 사람 취급하지 마.”

어차피 사도라서 죽지도 않을 거라고.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