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0
숲의 공기가 변한 것을 느낀 나는 눈을 끔뻑거리다 메이스를 다잡았다.
처음 보는 현상이야.
분명해. 게임 속에서 이런 일은 존재하지 않았어.
내가 자기 시련을 망쳤단 사실에 꼴받은 간슈가 장난질을 친 거라고.
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간슈의 시련은 단순한 미니게임이 아니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현실과 다를 바가 없으니 최악의 경우에는 정말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조금도 기뻐해선 안 될 상황이야.
얼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면 진심으로 간슈에 대한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 옆에는 아무도 없어.
이 곳에 존재하는 위기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야.
내가 저지르는 행동에 의해서 피해를 볼 건 나뿐이란 거라고.
끄르륵.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고갤 돌린 나는 얼마 전 보았던 요정이었던 것과 한없이 비슷한 존재를 보았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이번에 나온 게 좀 더 검고 징그럽다는 것이겠지.
아. 그리고 지난번에 봤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해보이기도 하네.
그리 생각을 하며 메이스를 다잡은 나는 요정이었던 것이 썩어가는 날개를 펼치는 걸 보았다.
구멍이 잔뜩 난 나방 같은 날개에서 가루가 흩뿌려진다.
저런 것을 처음 보는 나였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것이 결코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라는 것.
그를 확신한 나는 주변에 신성을 퍼트리며 방패를 기점으로 영역을 만들어냈다.
나의 선택은 옳았다.
부정한 기운이 담긴 가루는 내 근처로 다가오지 못했으니까.
허나 그와 동시에 내 선택은 틀렸다.
태양을 닮은 나의 신성은 달조차 떠오르지 못하는 밤 속에서 너무도 이질적이었으니.
이 숲에 존재하던 이들은 나의 신성을 느끼고 하나 둘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끄르륵.
끄르륵.
끄르르륵.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벌레기는 소리.
다리를 끄는 소리.
구멍난 날개가 펼쳐지며 내는 바람 소리.
숲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던 내 등줄기를 차갑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끄륵?
어둠 속에서 하나 둘 튀어 나오는 무리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들 중 하나를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다. 둘을 상대하는 것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넷은?
열은?
그 이상은?
되겠냐.
나는 베네딕 같은 괴물이 아니라고!
급격하게 냉정해진 시선으로 주변을 살핀다.
미적감각은 여느 때처럼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역겹다고 비명을 지를 뿐이다.
그렇지만 약점파악은 아니다,
저들이 보여주는 빈틈을 약점파악은 내가 알아차릴 수 있게 해준다.
왜 신이 준 것보다 영웅이 준 스킬이 더 유용한 건지.
진짜 변태 까마귀 더럽게 쓸모없어.
하악 대는 것밖에 하질 못하는 폐급 같으니라고.
약점 파악이 알려준 방향에는 세 마리의 요정이었던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달려들지 않을 만큼 삼엄한 모습.
그렇지만 난 약점 파악을 의심하지 않았다.
후우우.
가자.
툭.
앞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 요정이었던 것의 무리에서 끼에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질이자 이상을 배제하기 위한 수많은 공격들.
그 모든 공격의 궤적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정한다.
하나.
신성을 터트려 당장 내 주변을 둘러싼 공격들을 박살낸다.
둘.
빈틈이라 보인 곳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린다.
셋.
나를 제지하기 위해 재차 쏘아지는 여러 공격들을 보고도 멈추지 않는다. 날 노리고 쏘아진 공격들이 내 자취만을 점거하도록.
넷.
그리고 빈틈의 앞에 도달한 순간 방패를 앞으로 치켜 든 채 저들을 향해 돌진한다.
요정이었던 것들은 나름 강대한 존재였지만 악신의 불온한 기운에 지배당한 이들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저들은 내 신성 앞에서 순간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퍼억!
요정이었던 것의 육신이 방패에 얻어맞아 날아가며 빈틈이 생겨난다.
난 바닥을 나뒹구는 적을 짓밟으며 포위망을 뚫고 숲의 어둠으로 내달렸다.
생각하자.
간슈의 시련은 어디까지나 시련이야.
반드시 빠져나갈 구석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지.
내 영웅담을 쓰고 싶다 생각해서 내 불온함을 견뎌내던 간슈가 날 죽일 작정으로 무언갈 할 리 없
…겠지?
그렇겠지?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서 너 죽고 나 죽자 그러지 않겠지?
옆에 할아버지도 있는데 그런 재앙 같은 일이 생길 리는 없을 거야. 없어야 해.
하여튼 빠져나갈 구석이 있다는 전제 하에 이 숲이 무얼 하는 숲인지 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그 장소를 알면 장소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으니까.
태애앵!
어둠 속에서 쏘아진 무언가를 방패로 막아낸 나는 어둠 너머의 붉은 눈동자를 보고 혀를 찼다.
젠장. 생각할 틈을 안 주네.
내 신성이 너무 눈에 띄나?
근데 그렇다고 신성을 거두면 어둠에 잡아 먹혀서 뒤져버릴 것 같은.
철벽이 고하고 방패 숙련이 조언한다. 그를 따라 방패를 들자 방패의 진동이 내 귓가를 가득 채운다.
인지하지 못했다.
파악하지 못했다.
내 감각을 뚫고서 공격이 파고들었다.
어둠의 권능.
어둠의 악신과 관련된 장소.
이 시련을 만들어 낸 자가 간슈라는 것까지 고려해보면 어둠의 악신과 관계된 역사적인 사건이란 거야.
어둠의 악신. 숲. 요정.
이 모든 요소가 합쳐진 건 하나 뿐이지.
어둠의 악신이 요정 여왕의 숲을 잠식한 일.
모니터 너머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린 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에 힘을 더했다.
그 숲에 관해서 내가 아는 바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요정 여왕이 살던 숲은 어둠의 악신이 지나간 후 더 이상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으니까.
게임 속에서도 출입금지 지역으로 정해져 있던 그 장소에 대하여 내가 아는 바가 있을 수가 있나.
그렇지만 어둠의 권능이 도사리는 장소를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
태앵!
스킬이 알리는 바에 따라 또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낸 나는 허공으로 뛰어 올라 내 발목을 붙잡으려는 나무뿌리를 피했다.
그러니까 이젠 이 시련의 끝이 어딘지만 파악하면 되는데.
머리에 몇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오른다.
모두 다 저 마다의 근거와 저 마다의 의심을 지니고 있는 수들.
모니터 너머에 머무를 적이었다면 게임을 멈춘 채 팔짱을 꼈을 만큼 고민스러운 상황.
“…쯧.”
고민이 너무 깊어진 나머지 반응을 하는 데 실패했다.
나무뿌리로 만들어 낸 화살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알싸한 통증과 함께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하. 그래.
지능 58의 멍청이가 생각은 무슨 생각이냐.
머리를 비우고 어디에 마음이 가는 지를 살핀다.
나의 직감은 즉시 내 의문에 대답을 해 주었다.
요정 여왕이 머무르고 있을 곳.
지금 이 숲에서 가장 위험할지도 모르는 장소.
그 곳으로 향하라고 말이다.
헛웃음이 절로 새나왔다.
어둠의 악신에게 잠식되어 있을 요정여왕에게로 가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 어떤 기적도 바랄 수 없는 이 곳에서 그녀를 만난다면 그대로 죽게 될 테니.
끔찍한 광경을 떠올리면서도 난 나의 직감을 따라 움직였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이 장소에서 내가 믿을 것이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불온한 기운이 점차 진해진다.
한 발 앞으로 향할 때마다 날 노리는 공세가 더 험악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짙게 변한다.
그 모든 것들을 돌파할 때마다 하나 둘 상처가 늘어간다.
혹시라는 생각이.
잘못될 때를 가정하는 의심이.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공포가.
차츰.
차츰.
나를 좀먹어간다.
머릿속에 차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외면하며 새삼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깨닫는다.
내가 불안할 때 옆에서 내게 확신을 전해주던 목소리가 커다랬단 것을 말이다.
나중에 돌아가면 한 번 깔끔하게 닦아드리던가 해야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며 질색을 하실 테지만 그렇다고 마냥 싫어하시지도 않을 거야. 그런 분이니까.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은 나는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는 발에 힘을 더했다.
주변의 공세가 더해진다면 나 또한 더 거세게 움직이면 될 뿐.
앞으로.
앞으로.
다시 앞으로!
그렇게 숲의 중심에 발을 디딘 순간 거짓말처럼 날 향하던 공세가 사라졌다.
날 짓누르던 공기도. 내 귓가를 가득 채우던 소리도.
내 목을 노리던 여러 공격들도.
내 주변을 휘감던 정체 모를 가루들도.
갑작스레 찾아온 고요 속에서 나는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이 숲은 어둠의 악신에 의해 장악당한 장소.
갑작스레 찾아온 평화는 시련의 끝이 아니라 더한 시련으로 향하는 통로일 가능성이 높아.
“…이런 귀여운 분이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요.”
첨예한 나의 의심을 파고든 것은 당혹이 서린 여성의 목소리였다.
“전 분명 용사님께서 오셨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은 어둠의 권능에 의해 썩어 문드러진 나무뿌리에 묶여 있었다.
눈에 신성을 담아 강화시키자 나무뿌리에 여성의 안에 있는 기운을 빨아들이는 것이 보였다.
“저기.”
“뭔데. 닭장 냄새나는 아줌마.”
“다… 닭장?…”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는 여성이 누구인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요정이 사는 숲에서 아이의 형상이 아니라 어른의 형상을 취한 것은 하나뿐일 테니까.
요정 여왕.
어둠의 악신에게 사로 잡혀 영웅들에 의해 토벌 당했던 자는 이 시련 속에서 어색한 웃음만을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