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2
간슈가 건네준 책의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것은 여러 신들의 이름이었다.
내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름부터 시작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자잘한 권능을 지닌 신까지.
그들의 이름을 확인하던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말았다.
간슈 이 녀석이 이야기를 하는 게 진심인지 묻기 위해서.
내 시선의 뜻을 이해한 걸까. 간슈는 보란 듯 어깨를 으쓱이며 짜증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정으로 이를 줄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가?”
“당연한 거 아냐? 너처럼 하찮은 꼬맹이가 어떻게 다른 허접 신들의 권능을 내어줄 수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말한 그 허접 신들이 내어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니까.”
간슈의 비릿한 웃음을 본 순간 이 꼬맹이가 무얼 하려는 지 자연스레 알게 됐다.
그도 그럴 게 간슈가 지금 하려는 짓거리는 내가 하려는 짓과 별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
으으음. 이 기분 나쁜 꼬맹이가 이렇게까지 말을 한다면 무슨 권능이라도 받아낼 수 있는 게 맞겠지.
온갖 신들의 치부와 약점을 붙잡고 있는 녀석이니 이런 음침한 부분에선 믿을 만 해.
근데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네.
“씹덕 꼬맹이. 왜 여기에 허접 주신은 없어? 그 페도 변태 자식도 약점이라면 차고 넘칠 텐데?”
“…네 녀석. 신벌이 두렵지도 않나? 그대가 주신의 관심을 받고 있다 한들.”
“왜? 허접 주신이 페도에 변태에 무능한 녀석인 건 사실이잖아? 내가 그 빌어먹을 주신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 정도도 말 못해?”
허접 주신 때문에 겪었던 여러 일들을 생각해보면 정말 이가 갈린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주신 다운 행동을 해줘서 차마 사도 자리를 때려치진 못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녀석이 했던 개짓거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아니! 솔직히! 자기 사도한테 바니걸 입히고 싶다고 토ㅋㅋ끼ㅋㅋ 같은 말을 보내는 변태 새끼한테는 이 정도도 양반이라고 생각해!
내가 진심을 담은 혐오를 내비치자 간슈가 입술을 우물거리다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걸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씹덕 꼬맹이가 높은 사람한테 약한 쫄보라서 벌벌 떨고 있을 뿐인 거 아냐?”
“위대하신 주신께서 자비로우심을 새삼 느끼게 되는 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간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평소에 허접 주신이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이런 반응이 튀어나오는 거지?
그 변태 자식 착한 척 코스프레를 얼마나 잘 하는 거야?!
나한테도 좀 멀쩡한 척 하라고! 왜 자기 사도한테만 이상한 짓을 하는 건데!
“어쨌든 난 위대하신 주신께 반기를 들 생각이 없다. 그러니 그 부분은 적당히 넘겨라.”
“겁 많은 쫄보 꼬맹이. 괜히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책만 읽는 게 아니네.”
“다시 그 책을 뺏어가주랴?”
“해 봐. 그러면 역사 씹덕이 얼마나 쪼잔하고 치졸한 녀석인지 나불대고 돌아다녀줄게. 그럼 네 신도들이 참 좋아하겠지? 그치?”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는 간슈를 보며 방금 전까지 쌓여있던 화를 푼 나는 적당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다.
지금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스킬만 해도 여럿이 있긴 해.
근데 굳이 책을 안 볼 이유는 없잖아?
내가 아는 축복은 게임 속 내용에 한정되어 있지만 간슈는 아니라고.
앞으로도 여러 신들에게 축복을 부탁하게 될 텐데 그 신들이 무얼 가지고 있는지 알아두는 게 낫지.
그리 생각을 하고 책을 펼친 나는 자연스레 그 안에 빠져들게 되었다.
대부분은 내가 아는 거였지만 그 중에는 모르는 것도 여럿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적의 자세를 취하게 해주는 균형이라는 축복이라거나. 전투 도중 몇 수 앞을 보게 해주는 전투 예지. 처음 보는 상대에게 호감을 선사하는 사랑받는 자. 직감을 더 날카롭게 해주는 짐승의 본능.
이외에도 여러 재미난 축복들이 그 책 안에 적혀 있었다.
“평소에 공부를 할 때 이만큼만 했다면 얼마나 좋으냐.”
중요할 것 같은 정보를 머리에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려니 할아버지가 옆에서 깐족거렸다.
그래서 슬며시 시선을 돌려 노려봐주었지만 할아버지는 무얼 잘못했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으으으. 가면 갈수록 할아버지도 뭔가 얄미워지는 느낌이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나름 영웅에 꼰대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냥 주책이 없어지는 것 같다니까.
“허. 루엘. 자네도 참 많이 변했군.”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나 뿐만은 아닌지 간슈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예전에도 이랬다면 좀 사람답단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그 시절은 참으로 힘든 시절이지 않았습니까.”
할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무거워지는 것을 본 나는 책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뭐 하는 짓이냐! 그럼 책이 상하지 않나!”
“겨우 책 좀 상한다고 호들갑 떠는 거야? 신이란 작자가 어쩜 이리 쪼잔한지. 네 아래에 있는 신도들이 불쌍할 지경이야.”
“이게 그것과 무슨 상관인가!”
“됐어. 그보다 나 받고 싶은 거 정했으니까 내놓기나 해.”
“이 건방진!… 흐으으. 됐다. 그래. 빨리 말이나 해라.”
“위기감지.”
위기감지는 무예의 신이 자신의 사도에게 내려주는 권능 중 하나다.
권능을 지닌 자에게 무언가 위험한 것이 닥쳐 오면 사용자 본인보다 먼저 그를 알아차리고 움직이게 해주지.
심지어 위기를 회피할 때까지 체감되는 시간을 줄여주기까지 하는 이 스킬은 내가 무예의 신과 간슈 사이에서 고민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하필이면 그 들짐승 녀석인가. 그리 상종하고 싶은 놈은 아닌데.”
“뭐든 줄 수 있다면서? 설마 허세 부린 거야? 이제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추하게.”
“상종하기 싫단 거지 안 된다는 게 아니다.”
“그으래? 정말 되는 거 맞아? 사실 안 될 것 같아서 삐질삐질 식은땀.”
“이만 가라.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마라. 너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머리가 아프다.”
간슈가 질린다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손을 휘젓자 머리 위에서 거대한 책이 나타났다.
그를 보고서 위험하단 생각을 한 나였지만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린 상태였다. 거인이 읽을 듯한 책의 하얀 부분이 나를 짓…
“히야악!?”
비명과 함께 퍼뜩 일어난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어제 그 방으로 돌아온 거구나.
“후후. 후후훟.”
옆에서 들려온 웃음소리에 느릿하니 고개를 돌리자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웃는 조이가 있었다.
눈가를 가늘게 뜬 조이는 뺨에 살짝 열이 오른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영애께서도 귀여운 소리를 내실 줄 아시네요.”
“…자꾸 그러면 얼빵이 너도 귀여운 소리 내게 만들어 버릴 거야.”
“꼬집는 건 금지에요! 영애께서 그러시면 진짜로 아프다구요!”
손을 펼쳤다 접으면서 노려 봤더니 조이가 기겁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치.
아쉽다. 조이의 말랑한 볼을 무자비하게 잡아당길 생각이었는데.
내가 입술을 삐죽 내밀자 조이가 다시금 웃음소리를 내고는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이에요. 어제 쓰러지셨을 때 완전 걱정했다구요.”
“나도 돌이켜보니까 좀 섬뜩하긴 해. 그 때 내 주변에 변태들이 한 둘이여야지.”
“후후. 걱정 마세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나는 웃음을 자꾸만 머금는 조이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다.
아서와 프레이는 바깥에 나가 칼의 가르침 아래에서 대련을 하고 있다는 것.
페이비는 여기서 시간을 보내게 된 김에 교회에 들러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것.
“그리고 숲의 주인 분들께서 영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꼭 보답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그 하찮은 허접들. 둘 다 멀쩡해?”
“네. 두 분 다 건강해지셨습니다. 영애께서 기적을 벌일 때 완전히 회복을 하셨어요.”
그런가. 내가 쓰러지면서까지 했던 일이 헛되지 않았단 이야기구나. 다행…
“얼빵아. 그 동정 나무는 아무 말 안 해?”
“…어. 제가 본 바에 따르면 그 때의 일을 기억 못 하시는 것 같던데요.”
휴우우. 진짜 다행이다. 그 때 지껄였던 말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얼굴을 들기 힘들었을 거야.
좋아. 둘을 만나러 가자. 곰의 순해 빠진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신이 나네.
두 사람 좀 놀린 다음 축복 내놓으라고 해야지.
그리 생각을 하며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조이가 입술을 우물거리는 걸 보고 고갤 갸웃했다.
뭐야? 얘 왜 뭔가 망설이는 듯한 느낌인 거야?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게 있는데.
아. 그래. 그거 써보자.
이번에 간슈가 준 첨언 스킬.
그게 현실에서 멀쩡히 발동하는 지 봐야지.
첨언 스킬에게 조이가 왜 이러는 지 알려달라고 머릿속으로 부탁했더니 내 앞에 푸른 창이 떠올랐다.
[호칭]
첨언이 내게 알려준 것은 무척이나 간결했지만 간결한 만큼 핵심에 찌르기도 했다.
호칭이라면 그것밖에 없잖아.
“얼빵한 조이. 설마 이름으로 안 불러줘서 서운한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니라고? 아닌 것치고는 입꼬리가 너무 느슨해지는 것 같은데?
“정말 아냐? 그럼 계속 그냥 얼빵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지? 그치?”
“….그.”
“사실대로 말 안해주면 안 불러줄 건데? 평소대로 해버릴 건데? 진짜 아냐?”
“그으으.”
“알~겠답니다. 얼빵 영애. 아무래도 제가 주제가 넘었던.”
“…좋겠어요.”
“네에에? 뭐어라구요오?”
“조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이럼 됐나요?!”
“응. 잘했어. 쿠흐흫. 아. 정말. 완전 소녀소녀하네. 나는 얼빵한 조이가 남자한테 사기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야.”
“그런 일 없거든요!”
양 볼을 벌겋게 물들인 조이는 빼액 소리를 지르고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삐졌어?”
“흥이에요.”
“흐으응. 이럼 곤란한데.”
“흥이에요!”
“얼빵한 조이한테 나도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말야.”
“…이름이요?”
“나만 맘대로 부르면 불공평하잖아? 너무너무너~무 착한 나라서 특별히 내 이름을 부를 기회를 줄 생각이었어. 왜? 싫어? 싫으면.”
“싫다고 한 적 없어요!”
“그래? 그럼 불러봐.”
싱글싱글 웃으며 얼굴이 벌게진 조이를 바라본다. 그녀는 손가락을 가만 두지 못한 채 입술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 결국 속삭이듯 목소리를 냈다.
“…루시.”
“뭐라고? 얼빵 조이의 목소리가 너어무 작아서 안 들리는데?”
“루시! 이럼 됐죠!”
“푸하핳. 그래. 그래. 잘했어. 고개 숙여봐. 쓰다듬어 줄게.”
“그런 거 필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