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6
처음에는 변태사도가 카리아에게 뇌물이라도 바쳤나하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대뜸 내뱉는 이야기가 이런 것일 리 없잖은가.
허나 카리아의 표정은 시종 진중했다.
“농담 삼아 하는 말 아냐. 진지하게 가능하냐고 물어보고 있는 거라고.”
“내 장신구가 왜 필요한데? 내가 귀엽다는 사실을 그렇게도 널리 퍼트리고 싶은 거야? 아줌마가 자기 인생 낭비해가며 고생하지 않아도 내 귀여움은.”
“농담 아니라고 말했다?”
“노처녀 아줌마. 인상 쓰지 마. 여기서 주름이 더 늘어나면 진짜 이상한 변태 아니면 안 받아 줄 걸?”
“으아아!”
열이 뻗친 카리아가 목소리를 드높이자 뒤 편에 있던 자칼의 입가에 웃음이 스몄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카리아한테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근데 자칼. 너 웃음기 계속 띄고 있다가는 나중에 카리아한테 더 호되게 당할 텐데.
저 인간은 표정을 감춘다고 상대 생각을 못 읽을 인간이 아니라고.
너 그래도 괜찮겠냐?
“고용주님. 그냥 쭉 설명할 테니까 가만 있어. 알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리아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지금 공허의 추종자가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는 건 알지?”
“무능하고 늙어빠지기만한 아줌마를 대신해서 그놈들을 처리한 게 난데 모르겠어?”
“그냥 고개를 끄덕이든가 젓든가 둘 중 하나만 해. 하여튼 공허의 추종자들을 모두 색출하는 건 어려워. 그 놈들의 권능은 이런 데에 전문화되어 있으니까.”
카리아의 말은 옳다. 공허의 추종자들이 지닌 음험함은 여러 악신의 추종자들에서도 최고에 달해 있으니까.
당장 개학 전에 있었던 일만 생각해봐도 이는 명확하다.
나는 물론이고 페이비조차도 저들이 지하에 숨어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지 않았나.
저들이 마음을 먹고서 숨고자 한다면 그를 찾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카데미 내에 정보원들을 넣어가면서 망을 만들어보려고 노력은 해보겠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비책들은 그저 대비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우리들은 언제고 끌려다니는 입장일 수밖에 없지.
카리아가 생각하는 바를 이해한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큰 의문점이 있었다.
“근데 노처녀 아줌마. 이거랑 내 그림이랑 무슨 상관이야?”
근데 그거랑 내 장신구랑 무슨 상관이야? 진짜 모르겠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내 생각을 어렵잖게 읽은 카리아가 픽 한숨을 내뱉었다.
“고용주님. 당신 얼굴 그려진 장신구에 신성이 부여된 건 알지?”
“들어는 봤어. 내가 얼마나 예쁘면…”
“고개만 까딱이라니까?”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고개를 끄덕이자 카리아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을 잇는다.
“고용주님은 당사자라서 잘 모르겠지만 그 신성이 생각보다 더 대단해. 악신의 권능을 물릴 정도로. 시녀. 당신도 봤잖아.”
“네. 그렇습니다.”
에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본 광경을 이야기했다. 카리아가 장신구를 꺼내 가져다대자 악신의 권능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고 말이다.
내 그림이 들어간 장신구가 성물처럼 신성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게 설마 악신의 권능을 밀어낼 수준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체 까마귀 여신의 신도들이 저기에 얼마나 공을 들였길래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야.
“그러니까 고용주님의 그림이 그려진 장신구를 뿌리면 저들의 침입을 막아내는 게 가능하단 이야기지.”
당혹스러움을 떼어놓고 생각을 해 본다면 카리아의 이론은 분명 그럴 듯 했다.
거리를 물들인 내 장신구 때문에 아드리가 거리에 머무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던 것처럼 아카데미 내부를 장신구로 가득 채운다면 그 신성이 알아서 악신의 권능을 막아줄 테니.
거기에 더해 각자가 하나 씩 장신구를 지니고 있다면 악신의 잠입을 막는 데에도 분명한 도움이 되겠지.
“어때? 그럴 듯 하지 않아?”
“아줌마가 하는 망상이 뭔지는 대충 알겠어. 근데 이 계획 너무 아줌마 피부처럼 구멍이 잔뜩 나 있는 것 같은데?”
계획의 그럴듯함과는 별개로 여기에는 몇 가지 분명한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아카데미 전체에 뿌릴 만한 장신구를 어떻게 수급하느냐의 문제다.
예술 교단에서 만드는 장신구는 현재 없어서 못 사는 수준에 이른 상황.
내 주변 몇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이야 변태 사도를 닦달하면 가능하겠지만 아카데미 전체에 뿌리는 것은 필시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설령 그 많은 장신구를 수급한다 하더라도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장신구를 들게 할 수는 없다.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아카데미 1학년들은 그렇다 쳐도 내 온갖 악행에 질려버린 이들이 내 그림이 그려진 장신구를 반길 리가 있나.
“단번에 하잔 건 아냐. 서서히 퍼트리잔 거지.”
“아줌마 주름이 서서히 늘어나는 것처럼?”
“…하여튼. 프레테 그 녀석한테 부탁해 줄 수 있어?”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 변태 자식을 구슬리는 건 손쉬우니까. 대충 얼굴을 잘근잘근 밟아주면 혀를 날름거리면서 감사하다 그러지 않으려나.”
변태 사도를 설득하는 일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녀석의 바람에 맞추어서 포즈 한 번 잡아 주면 기꺼이 장신구를 가지고 올 것 같으니까.
“그럼 부탁 좀 할게. 나도 나대로 추종자들의 잠입에 대응하기 위한 이런저런 방책을 고민해 볼 테니.”
카리아와의 대화를 끝마치고 방 바깥으로 나올 무렵 문 너머로 카리아의 낮고 살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뒤편에서 자칼이 웃음을 흘리고 있단 걸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겠냐. 자칼. 네가 만들어낸 재앙이다. 알아서 버텨라. 그러다 보면 무언가 얻는 것도 있을 거야.
아마도.
“루시.”
계단을 내려오던 중 어깨 위에 있던 얼빠여우가 슬며시 목소리를 냈다.
“내 그 계획을 도울 비책이 하나 있다만.”
“너한테?”
“그래. 교수들은 몰라도 학생들이라면 본녀의 힘으로 정신을 건드릴 수 있다.”
얜 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정신이 나갔느냐는 의미에서 째려보았지만 얼빠여우는 되래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보수는 크게 바라지 않는다. 그 예술 교단의 변태놈이 그린 네 그림과 네가 건네 준 목줄이면 무엇이라도…”
얼빠여우가 내뱉는 헛소리에서 슬며시 귀를 돌린 나는 카리아의 가게 한 쪽에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강도처럼 생긴 아저씨.”
“…저 말씀하는 겁니까?”
먼 과거 처음 보았을 때는 나를 보고서 사나운 티를 내던 남자였지만 지금 그는 내게 지극히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 개인이 지닌 권력과는 별개로 내가 무력으로 자신을 찍어누를 수 있음을 알기에 자연스레 눈치를 보는 것이리라.
“이거 안아.”
어깨 위에서 나불거리는 얼빠여우의 목덜미를 붙잡은 나는 얼빠여우를 남자의 앞에 내밀었다.
“…예?”
“안으라고. 이것도 이해 못해? 생긴 것보다 더 멍청하구나?”
“이해를 못 한. 아뇨.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끼이잉!”
남자의 품 안에서 발버둥치는 얼빠여우를 보고 있자니 키득대는 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미와는 한없이 거리가 먼 추남에게 안기는 것. 얼빠에게 있어서 최고의 굴욕이지?
개과랍시고 개소리를 한 대가를 치러라! 얼빠여우!
*
“던전 공략을 하고 오셨다 들었습니다. 파트란 영애. 바깥의 던전은 어떠셨나요?”
“마냥 쉽지는 않았습니다. 아카데미의 던전과는 달리…”
던전 공략을 끝마치고 다시금 아카데미로 돌아온 조이는 여러 귀족 영애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딱히 내켜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부터 조이는 영애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불편하게 여겼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럴 시간에 마법의 수련을 하던가 친구들이랑 대화를 하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루시와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이가 얌전히 귀족 영애 사이에 끼어있는 것은 이것이 공작 영애가 해야 할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친구들 사이에 있을 때는 얼빵이니 뭐니하며 놀림받는 조이지만 바깥에서는 어엿한 공작 영애.
나름대로 책임감이 강한 조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서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저희도 언젠가는 바깥 던전을 공략하러 가야 할 텐데. 무섭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들.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것을 제대로 펼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까요.”
“역시 파트란 영애.”
“멋져요.”
“저어. 파트란 영애. 나중에 영애와 함께 던전 공략을 하러 갈 수 있을까요?”
“와아! 그거 정말 멋진 생각이에요!”
“영애께서 계셔주신다면 무척이나 든든할 것 같아요!”
“아카데미 교수분들께서도 극찬하는 마법사인 파트란 영애시라면 무슨 던전이라도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으시겠죠!”
수많은 칭찬의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조이는 딱히 기쁘지 않았다.
저들이 하는 말의 절반 가량은 아첨이고. 남은 절반 중의 대부분도 순수한 칭찬보다는 질투일 것을 알았으니까.
차라리 알른 영… 아니. 그. 루시한테 비꼬는 소리를 듣는 편이 나을 텐데.
루시가 제대로 된 칭찬을 해주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루시의 말 속에는 비꼼 같은 게 존재하지 않으니까.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자리를 뜰 생각으로 이야기를 맞춰주던 조이는 사교의 자리 외각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보고 고갤 갸웃했다.
“저 분들은 분명 이번에 새롭게 입학하신 분들이죠?”
“그렇습니다. 파트란 영애.”
이번에 새로이 사교 자리에 참여하게 된 영애들은 조이에게 있어 대부분 익숙했다.
사교계에 자주 참여해왔던 조이는 어지간한 영애들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 중에서도 더 익숙한 이들이 몇 존재했다.
예를 들자면 켄트 가문의 영애가 그러했다.
그녀의 친구 중 하나인 프레이 켄트의 동생이자 루시와도 가까운 사이인 켄트 영애는 조이를 바라보며 당장에라도 달려들고 싶다는 듯 들뜬 마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자기 나름대로는 주변을 신경써서 꾹 참고 있는 듯 했지만 그녀의 활발함을 느끼지 못하는 이는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다.
으음. 저대로 내버려 두면 다른 영애분들에게 질투를 사겠네.
나중에 따로 말을 해둬야겠어.
따로 말을 한다고 알아들으시긴 할까 의심스럽긴 한데.
음? 어라?
켄트 영애 옆에 계신 저 분. 원래 분위기가 저랬던가?
뭔가 이상한데?
던전 안에서 봤던 거랑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
기분 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