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0
조이의 위광을 활용해서 여러 사람들을 타고 탄 끝에 도착한 장소는 아카데미의 기숙사였다.
저기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남작 가문이라도 어쨌든 귀족 가문의 영애이기는 한지라 비시가 머무는 기숙사는 귀족들이 사는 곳이었다.
다만 그녀가 머무는 기숙사는 나나 조이가 머무는 곳과는 달리 조그마했다.
작다고 해도 내가 전생에 살던 반지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곳이었지만 말야.
“비시 양은 잠시 재워 두었습니다. 정신의 안정이 필요한 상태였거든요.”
그녀를 보살피던 페이비의 말에 따르면 비시의 정신은 상당히 아슬아슬한 상태였던 모양이다.
사령술사라는 녀석이 겨우 그거 고생했다고 PTSD를 앓는 거야?
진짜 얘는 자기 진로를 잘못 선택했다니까.
으음. 근데 이럼 곤란하네. 비시를 경유해서 아드리한테 말을 걸지 않으면 페이비한테 다 들켜버리잖아.
뭔가 방법이.
–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 이 녀석 이미 다 눈치 챘으니까.
아드리가 퉁명스레 한 말을 듣고 슬며시 고갤 돌렸더니 페이비가 고갤 끄덕였다.
“…허접 성녀.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꽤 오래 되었습니다. 적어도 반 년 정도는 된 듯하네요.”
“근데 왜 음습하게 아무 말도 안 했어?”
“영애님께서 가만 지켜보고 있는데 제가 관여할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자신도 가만히 있었다는 페이비의 말에서는 한치의 망설임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괜찮다고 하면 사령이랑 사령술사여도 아무 문제없다는 거야?
…날 믿어주는 건 고마운데.
진짜 고맙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좀 과하지 않나?
최소한 나한테 물어보는 것 정도는.
“저기. 두 분? 무슨 이야기인지 저한테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페이비의 믿음이 무겁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조이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아. 얘는 아직 모르지.
잠시 생각을 하던 나는 일단 방과 방 바깥의 소리를 차단시킨 후 아드리에게 시선을 줬다.
나이를 잔뜩 먹은 할망구는 내 의도를 눈치 채고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 안녕하십니까. 파트란 가문의 영애시여. 몰락해버린 옛 가문의 사령. 아드리라고 합니다.
“…유. 유려어어엉?!”
조이는 반투명한 아드리의 모습에 기겁을 하면서 뒷걸음질을 치다 나와 페이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아무것도 안 해요?”
“뭘 해야 하는데 얼빵아?”
“뭔가를 해야 하나요?”
“아니. 언데드가 있잖아요.”
“언데드라면 모두 퇴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흐응. 조이는 종족이 다르면 죽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얼빵해보이는 행동 속에 이런 잔혹함이 깃들어 있다니. 역시 허술 공작의 딸 다워.”
“제가 잘못된 건가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성직과 관계된 우리 둘이 무심한 모습을 비추자 조이도 진정이 된 듯 입을 꾹 다물었다가 한탄하듯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이 유령… 아드리님은 왜 찾아온 건가요.”
“이 할망구는 존재감 없는 외톨이 유령이잖아. 몰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데엔 최적화되어 있다구. 딱 보면 몰라?”
내가 한심함을 담아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자 아드리와 조이 양 쪽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영애님. 저희에게도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어느 허접 나부랭이가 납치당했어.”
공허의 추종자에게 자리를 빼앗긴 클레브 자작 영애가 아카데미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에 페이비가 걱정을 표했고 아드리가 살짝 눈썹을 내렸다.
– 공허의 권능에 의해 감추어진 자를 찾아내는 일인가.
“할 수 있지?”
– 의심가는 장소를 알려 줄래? 실종자를 찾을 땐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니까.
아드리의 말에 고갤 끄덕인 난 인벤토리에서 적당히 큰 종이를 꺼낸 후 즉석에서 아카데미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
음. 으으음.
손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내 안에 있는 미적감각이 비명을 질러댄다.
선도 제대로 그을 줄 모르는 것이냐는 미적감각의 목소리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미적감각은 치사하게 팩트로만 나를 때려댔으니까.
젠장. 공허의 추종자랑 싸울 때는 제일 쓸모없던 권능이 이렇게 쓸데없는 순간에는 제일 격하게 자기 주장을 하다니!
진짜 짜증나!
열이 받는 것과는 별개로 미적감각의 조언을 따라 그려가는 아카데미의 지도는 내가 그린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했다.
이대로 지도에 박아 넣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을 것처럼 말이다.
“…루시.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셨던가요?”
“영애님의 재능은 끝이 없군요.”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이게 현실이 맞나? 내가 아는 루시는 다섯 살짜리 같은 그림을 그리던 꼬맹이였는데!?>
그 모습을 본 내 주변인들은 당혹을 표했지만 그 누구보다 당황스러운 건 내 쪽이었다.
이게 진짜 내가 그린 지도라고?
던전 안에 들어갈 오우거를 그렸더니 고블린이냐고 착각 당했던 내가 그린 거라고!?
미적감각 진짜 쩌네.
변태 사도의 예술가적 기질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야.
“할망구. 찾을 곳 알려줄 테니까 잘 기억해. 아직 치매는 안 왔으니까 외울 수 있지?”
–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어. 난 여기에 있을 거니까.
아드리가 손가락을 치켜 들자 그녀의 주변에 자그마한 혼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내 자그마한 손으로도 쥘 수 있을 것 같은 혼의 조각들은 아드리의 명령에 따라 허공으로 흩어졌다.
– 여기 아니고. 여기도 아니고.
아드리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허공에서 펜이 춤추며 지도 위에 X자를 긋는다.
숨쉬듯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빠르게 좁혀지던 의심은 이윽고 한 군데만을 남기고서 끝을 맺었다.
– 아마 여기일 것 같아.
“왜 추측형이야? 할망구는 자기 실력에 자신이 없는 허접인 가봐?”
– 다른 곳은 기운이 명확하게 느껴지는 데 이곳만 흐릿하거든.
아마 공허의 권능이 깃들어 있는 거겠지. 모든 단서를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이 진실이다.
어느 유명한 탐정이 했을 법한 말을 떠올린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서 아드리가 가리킨 장소로 향했다.
그 곳은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가는 비밀통로가 숨겨진 정원이었다.
그 자체로 미로나 마찬가지인 이 곳에는 통로 이외에도 숨겨진 구석이 이것저것 있었다.
물약이 들어 있는 상자라거나. 왜 있는지 모를 은화 자루라거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같은 것이 말이다.
수십년 전의 학장이 장난삼아 만들었다는 설정이 있는 이 곳의 비밀스러운 물건들은 통로 이외에는 정말 쓸모가 없어서 자연스레 버려지기 마련이었지.
하지만 누군가를 숨길 장소로 쓸 생각을 한다면?
이 곳은 무척이나 유용한 장소가 된다.
교수들 사이에서도 흉물 취급 받는 것이 이 곳이니까 말야.
콰앙! 발에 힘을 잔뜩 실어서 바닥을 짓누르자 흙더미 아래에 감춰져있던 철판이 박살나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를 본 나는 허공에 신성으로 이루어 진 구를 띄워 놓은 채 지하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클레브 영애!”
우리가 찾던 자작 영애는 지하실을 발견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인 체력 물약 옆에서 얌전히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와. 보상이 얼마나 쓸모가 없었으면 공허의 추종자도 저걸 안 챙겨가냐.
진짜 쓸데없는 곳이라니까.
이런 곳 만들 정성으로 던전을 만들어 놨으면 얼마나 좋아.
“자작 영애의 몸에 이상은 없습니다. 악신의 기운은 물려 두었으니 이제 눈만 뜨면 되겠죠.”
다행스럽게도 자작 영애는 우리 걱정과는 달리 멀쩡했다.
성녀님께서 직접 인증을 해주셨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페이비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조이를 보던 난 문득 한 가지 의구심을 떠올렸다.
“얼빵한 조이.”
“뭔가요?”
“너처럼 눈치 없는 바보가 어떻게 좆밥 추종자를 찾아낸 거야?”
만약 페이비가 이상을 눈치챘다면 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레이가 이상을 발견했더라도 난 저 짐승이 감각으로 뭔갈 찾았구나 생각하고 말았겠지.
그렇지만 조이는 아니다.
내 친구들 중에서 가장 이런 걸 구분 못할 것 같은 얼빵이가 이상을 발견하다니!
여기에는 분명 뭔가가 있어!
“…저 이래뵈도 공작 영애인데요. 귀족 영애들을 규합하는 제게 눈치가 없을 리 없잖아요.”
“아. 그래? 우리 얼빵이가 참 대~애단 하단 건 알겠으니까 어떻게 찾아냈는 지나 말해봐.”
진심이라고는 요만큼도 담기지 않은 어휘에 짜증이 난 듯 조이가 눈썹을 치떴지만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한숨을 팩 내쉬고는 설명을 이었다.
“어제 제가 권능을 파훼한 걸 기억하시나요?”
“응. 너무 얼빵이 답지 않아서 기억하고 있어.”
“…그 때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연스레 이상이 느껴지더군요.”
불온한 느낌이 나는 기운을 되짚어 그것이 악신의 기운임을 눈치 챈 조이는 여러 자잘한 단서를 이끌어내어 악신의 추종자가 가짜임을 확정지었다.
“아시겠습니까. 루시? 당신에게는 제가 바보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전 유능하다고요!”
“유능한 거 맞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한 건 얼빵한 바보 조이잖아.”
“그…으건 그렇지만.”
조이가 입술을 우물거리는 동안 난 방금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겼다.
그녀가 악신의 추종자를 발견한 방식은 나나 페이비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우리는 개인의 능력을 통해 이상함을 찾을 뿐 이걸 다른 이들에게까지 전할 수 없다.
그렇지만 조이는 아니다. 조이의 방식은 악신의 권능을 마법적으로 해석해낼 수 있음을 기반으로 한다.
조금 바꾸어서 말하자면 조이 자신이 파훼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수하여 퍼트릴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환경을 조성하는 건 어렵지 않아.
지금 아카데미 내에는 내가 쓸 수 있는 것들이 많으니까.
실시간으로 늙어가는 노처녀 아줌마의 도움을 빌리면 여러 도구들도 얼마든 구할 수 있어.
가능하다.
충분히 가능해.
내 장신구를 퍼트리는 치욕적인 방식이 아니어도 공허의 추종자들에게 대응할 수 있어!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은 나는 퍼뜩 고개를 치켜들어 조이를 바라봤다.
시무룩해하고 있던 조이는 내 눈을 마주하고는 눈을 끔뻑이다가 슬며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왜 그렇게 쳐다 보세요? 제가 또 뭐 잘못했나요?!”
이상하다.
조이는 분명 유능한데.
마법적인 재능만 따지자면 소울 아카데미의 캐릭터 중 최상위에 속하는데.
심지어 그 재능을 내 눈 앞에서 펼쳐 보이기까지 했는데.
중요한 일을 맡기려니까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