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2
한 숲의 주인이자 연기를 다루는 여우인 리나는 에렌에게 이끌려 욕실을 찾았다.
으으. 루시 그 녀석은 본녀에게만 너무도 까탈스럽구나.
내 그 아이를 돕기 위해 선의를 베풀겠노라 이야기했거늘 돌아오는 것은 역겨운 남정네의 구린내 뿐이라니.
“우욱.”
절로 속이 차오르는 것을 억누른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에린의 손목을 툭툭 두드렸다.
“빨리 물을 만들어내거라. 한시 빨리 그 역겨운 냄새를 지우고 싶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에린이 욕조를 물로 채우기 무섭게 그 안으로 뛰어든 리나는 능숙하게 자신의 털을 씻어나갔다.
과거 짐승에 더 가까울 무렵의 분체는 어땠을지 몰라도 자신의 힘 중 사분지 일을 가지고 온 그녀는 자신의 청결에 민감했다.
타인의 미에 한없이 까탈스러운 리나가 자신의 미에 까다롭지 않을 리 없잖은가.
그래서 리나를 데리고 온 에린이 할 일이라고는 그저 리나의 옆에서 그녀를 보필하는 것뿐이었다.
털을 씻고 화염계열 마법을 이용해 털을 말린 리나는 에린에게 털정리를 맡겼다.
원래는 이런 것 하나하나 스스로 해야 한다 고집을 부리던 리나지만 에린은 예외였다.
루시에게 걸맞는 사람이 되겠단 일념으로 여러 수행을 거친 에린은 리나의 까탈스러운 기준을 뛰어넘을 만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흠. 손길이 좋구나. 이전에도 능숙하다 생각했는데 여신께서 힘을 베풀고 나서부터 더 좋아졌어.”
빗질이 기분이 좋아 꼬리를 흔들던 리나가 녹아내리는 목소리를 내자 순간 에린의 빗이 멈칫했다.
“…여신이요?”
“그래. 미와 예술의 여신. 지난 번 예술 교단에 들렸을 무렵부터 계속해서 너를 지켜보고 계셨을 터인데?”
관성에 따라 느릿느릿하게 이야기를 하던 리나는 에린의 당혹을 느끼고서 슬며시 꼬리를 멈췄다.
“정말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네. 네에.”
“그 분이 수줍어할만한 분은 아닐 터인데.”
곰곰이 생각을 하던 리나는 이내 여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 챘다.
아직 루시에게 자신의 흔적을 들키고 싶지 않으신 건가.
하긴 뒤를 따라다닌다는 걸 들켰다간 본녀처럼 경멸을 당하게 될 터이니 그게 신경 쓰이시는 걸 테지.
아직 모자라시군. 루시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 준다는 게 얼마나 짜릿한 일인데.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신 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에린에게 조언을 건넸다.
“후일 시간이 날 때 한 번 기도를 올려 보거라. 여신께 조언을 구한다면 그 분은 기꺼이 답을 건네주실 것이다. 최소한 네가 루시의 시녀로 남아있는 한은.”
기지개를 킨 그녀가 한 바퀴를 돌자 연기와 함께 리나가 사람의 형상으로 뒤바뀐다.
고혹스럽다는 표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미인은 문 바깥에 시선을 주더니 피식 웃으며 문을 열었다.
문 바깥에는 루시의 친구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었다.
“루시를 보러 온 거라면 돌아가라. 그 녀석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리나의 이야기에 대표로 대답한 것은 맨 앞에 서 있던 아서였다.
“아닙니다. 리나님. 저희는.”
그렇지만 리나는 아서 쪽으로는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아서라는 사람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저어. 리나님?”
아서가 당혹 속에 눈을 끔뻑이는 동안 조이가 슬며시 목소리를 내자 리나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루시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했지?”
“…예. 그렇습니다.”
리나의 말에 아서가 재차 대답했지만 이번에도 리나는 아서를 무시했다.
이러한 태도가 이야기하는 바는 분명했다.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사람인 리나에게 아서는 대화할 가치도 없는 상대인 것이다.
너무도 노골적인 반응에 입술을 꾹 깨문 아서였지만 그는 무어라 하는 대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조이에게 눈짓을 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럼 누구를 만나러 왔느냐.”
“리나님입니다. 저희는 리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흐음. 본녀에게 직접 도움을 청하고 싶다라. 재밌구나. 일단 안으로 들거라.”
어디를 가더라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권력자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에린이 즉각적으로 손님을 응대할 준비를 했다.
에린이 먼저 자리를 만들고 차와 다과를 차리는 동안 조이는 리나에게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과연. 너희들이 왜 여기에 왔는지는 알겠다. 새로운 마법을 만드는 것은 지금의 너희들이 하기엔 버거운 일이지.”
긴 세월을 살아 온 숲의 주인은 루시의 친구들이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 지 어렵잖게 이해했다.
“허나 그게 본녀와 무슨 상관인가.”
“…예?”
“본녀는 어디까지나 루시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바보일 뿐이다. 그대들이 곤란해하건 말건 나랑 무슨 상관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리나는 루시 이외의 인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루시의 친구들 또한 나름대로의 매력을 갖추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봐야 인간의 범주 안에 머물 뿐이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여러모로 발전했음에도 말이다.
다른 인간으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는 인간의 형상은 리나에게 감흥을 주지 못했다.
특히 숲에서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남자 놈은 더더욱.
“만일 루시가 본녀에게 부탁을 한다면 난 기꺼이 그대들을 도울 것이다만. 그렇지 않다면 난 딱히 그대들의 곤경에 손을 내밀고 싶지 않군.”
조이를 비롯한 일행은 단언하듯 내뱉어지는 리나의 말에 눈을 끔뻑였다.
그녀가 일행을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렇다 하여 이렇게까지 차갑게 대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한 발 짝 뒤에 서 있던 아서는 새삼 리나가 자신들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지했다.
숲의 주인. 자신의 목숨보다도 숲의 안정을 더 우선시 하는 존재들.
자연의 의지에 따라 태어난 저들에게 있어 인간의 연은 크게 신경 쓸 바가 아닌 것이다.
“리나님.”
당혹으로 물든 분위기 속에서 재차 아서가 목소리를 냈지만 리나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런 노골적인 무시를 당한 게 얼마만이지?
과거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란 이야기가 나돌 때 이랬었는데.
하아. 안 그래도 옛 악연들을 자꾸만 마주치는 탓에 열이 오르고 있었는데 그 시절을 연상케하는 대우를 받으니 절로 오기가 생기는 군.
좋다. 어디 이 말에도 반응하지 않을 수 있나 보자.
“물론 저희도 맨 입으로 리나님께 도움을 청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숲의 주인의 지혜를 빌리는 데에 어찌 그런 건방진 일을 하겠습니까.”
“…”
“만일 리나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저희도 리나님이 바라는 것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
“예를 들자면. 루시 알른이 자다가 침으로 범벅을 한 공책 같은 것을 말입니다.”
“…뭐!?”
아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나가 퍼뜩 고개를 치켜 들었다.
처음으로 아서의 얼굴을 노려보는 그 눈동자에는 짙고도 짙은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
“이걸로 놀라시면 곤란합니다. 아직 저희가 제안드릴 것은 차고 넘치니까요.”
“어. 어떻게. 그런 귀한 것을.”
“저희가 루시 알른의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그녀와 일상을 함께하는 저희라면 얼마든 리나님께서 바라시는 걸 가져다 드릴 수 있습니다.”
리나의 눈동자가 벌벌 떨린다.
숲의 주인으로 살아오며 오랜 기간 쌓아 온 신념이라는 것이 있다.
다른 이들을 평가내리고 시험할 때에 가져야 했던 기준이 있단 말이다.
헌데 겨우 이런 욕망 앞에 쓰러져 그 모든 것들을 무너트릴 셈이더냐?
머리가 녹아내려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도 아닌데 정말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를 셈이냐!?
리나는 자신을 질책하며 스스로의 행동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리나의 몸은 솔직했다.
어느새 아서의 앞에 도달한 리나는 혈관이 돋은 눈으로 아서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무얼 도와주면 되겠느냐.”
“아니죠. 리나님. 지금 리나님께서 하셔야 할 말씀은 다른 것입니다.”
“…지금 나보고 무얼 할 수 있는지 답하란 것이냐?”
“저희는 리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있을 테지만. 리나님은 저희가 없다면 무척 곤란해지시지 않겠습니까?”
자신들만큼이나 루시와 친하며 루시가 경계심 없이 대하는 사람이 있기나 하느냐는 물음에 리나가 입술을 꾹 다문다.
짜증이 나는 일이다만 이 못난 놈이 하는 말은 옳다.
이 녀석들 말고는 본녀가 바라는 것을 가져다 줄 이가 없다.
이 놈들을 제한다면 지금 루시의 주변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그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할 자들과 루시에게 그리 가깝지 않은 자들밖에 없으니.
젠장. 젠장. 젠장. 이 따위 놈한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싫지만 방법이 없구나.
“…약속은 반드시 지키도록. 그러지 아니하면 숲의 주인의 분노가 그대들을 덮칠 터이니.”
“그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서와 리나가 극적인 타협에 도달한 그 순간.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시선은 짜게 식어 있었다.
차를 가지고 온 에린은 이에 대해서 루시에게 고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했고.
조이는 표정을 관리하는 것조차 잊고 진심을 담은 혐오를 내비쳤으며.
페이비는 불경하고도 불경한 말들 속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 했으며.
“저기. 저기. 왕자님.”
“…뭐냐. 프레이.”
“방금 왕자님 완전 변태 같았어.”
프레이는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내비쳤다.
그제서야 주변의 분위기를 눈치챈 아서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미리 합의를 보고 온 것이지 않나! 모두 여기에 동의를 해놓고 왜 나만 이상한 녀석으로 만드는 것이냐!”
“…허나 왕자님. 방금 왕자님께서 하신 발언은 솔직히. 좀. 그랬잖습니까.”
“영애님을 울렸을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었는데.”
“왕자님도 철창에 들어갈 수 있을까? 궁금하다.”
“이 빌어먹을 것들아! 그러니까 왜 나한테만 무어라고 난리를 치느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