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4
과거의 영웅들을 만나러 가겠다는 생각은 해골을 만났을 때부터 계속해서 해왔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물건들이 나는 물론이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카데미 지하에서 만났던 해골이 그러했듯 내게 훌륭한 스킬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단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이유는 그저 그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영웅을 흉내 낸 가짜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던 영웅인 그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무기를 맞대고 조언을 구하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본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모든 영웅을 만나고 왔어야했는데 방학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나머지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 때의 기억은 내게 소중한 것들이었기에 후회는 하지 않지만 바라던 만남이 미뤄졌단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외부 던전으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을 만나고 올 생각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리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옛 영웅의 이름을 떠올렸다.
자신의 마법으로 기적을 만들어 냈던 위대한 대마법사의 이름을 말이다.
악신과 싸우는 최전선에 섰던 이이자 현대 마법을 정립했다 평가받는 대마법사인 그라면 분명 조이가 마법을 만드는 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아무리 그를 흉내 내었을 뿐인 가짜라도 그 안에 든 것만큼은 진짜와 다름없을 테니까.
<에르기누스라. 그리운 이름이군.>
대마법사의 인형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던 나는 할아버지에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봤다.
옛 영웅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지식이 있긴 하지만 내가 아는 것과 옆에서 함께 했던 할아버지가 아는 것 중에선 할아버지 쪽이 더 정확할 거 아냐.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으음. 그 놈에 대해 묘사하기는 좀 힘들군. 워낙에 정신이 나간 녀석이라 한 마디로 요약하기가 어렵거든.>
‘굳이 요약을 해야 해요?’
<정확하겐 그 놈을 표현할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단 소리다.>
한참 동안이나 머리를 싸매던 할아버지는 결국 한숨과 함께 요약하는 걸 포기했다.
<그냥 그 녀석이 저지른 일에 대해 말해줄 테니 알아서 상상하거라.>
‘네에.’
<마법을 관장하는 신에게 당신이 뭘 아냐고 소리를 내질렀던 일. 악신을 해부해서 그 권능이 어디에서 기원하는 지 알아내려 했던 일. 자기가 만든 골렘이 부서지자 삼일 동안 엉엉 울며 장례를 치러주었던 일. 어느 도시에 역병이 퍼지자 그냥 사람 채로 다 불태워 버리자고 했던 일. 요정의 숲을 영원한 꿈 속에 가두어버린 일. 그리고 또…>
‘자. 잠시만요. 정말 저 위의 일을 모두 한 사람이 한 거라고요?’
<겨우 이런 걸로 놀라면 곤란하다. 이는 그 녀석이 저질렀던 수많은 사건사고의 편린에 불과해.>
나는 그제서야 할아버지가 왜 고민을 했는지를 이해했다.
대마법사 에르기누스의 일화는 너무 각양각색이었으니까.
어떤 것은 너무나도 영웅다웠고. 어떤 것은 마법에 미친 광인 같았고. 어떤 것은 악신의 편에 선 사람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라니.
사람이 이렇게 입체적이어도 되는 건가? 이 정도면 3차원을 넘어서 4차원에 도착한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 녀석과 네가 만나는 일에 부정적이다. 그 놈이 네 어투를 가만 받아줄 것 같지 않거든.>
‘…어.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네 친구들에게 맡기고 너는 뒤에 가만 숨어 있어야지. 그게 아니라면 네가 메이스로 머리를 깨부수든가.>
조언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니 만큼 전자가 낫지 않겠냐는 할아버지의 말에 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 그래. 리나님을 데리고 가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 변태여우는 왜요? 숲의 주인이 지닌 권능에 관심이 있어요?’
<아니. 리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취했을 때의 외형이 그 놈 취향에 가깝거든.>
‘…정말 도움이 되는 조언이네요. 귀에 새겨 둘게요.’
*
영웅을 만나러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한편. 나는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도 구르고 또 구르다 보니 이제 구르는 게 영혼에 새겨져서 안 구르면 마음이 불편할 지경이 되어버렸거든.
알른 가문에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스라이팅을 당해버렸어.
작은 여자애한테 힘든 일을 하는 걸 강요하는 귀족 가문이라니.
이렇게 설명하니까 상당히 꺼림칙한 곳처럼 들리네.
실제 알른 기사단은 그저 훈련과 자기 성취에 미친 기사들이 모인 곳일 뿐인데 말이야.
그 놈들이라면 여자를 만나러 갈 시간에 차라리 검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겠다고 하지 않을까.
하여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최근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나를 위한 둔기술을 개발해나가며 최대한 위화감을 좁혀나가는 것이었다.
첨언 스킬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건 하루에 단 한 번 뿐.
그러니 그 기회를 최대한 알차게 쓰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홀로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건 한정된 시간과 기회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나름의 방안이었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진짜 진짜 진짜로 필요할 때만 첨언의 조언을 쓰겠노라고 마음을 먹다 보니 하루가 끝날 때까지 첨언을 못 쓰는 경우가 흔해졌던 것이다.
RPG게임에서 정말 중요할 때만 물약을 써야지하고 마음을 먹었다가 게임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들고 있는 것처럼.
<그냥 애매하다 싶으면 써라. 하루 종일 아끼다 한 밤 중이 되어서 그 때 쓸 걸 하며 한탄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그치만 좀 더 움직이다 보면 돌파구가 보일 것 같잖아요!’
<하아. 오늘도 밤중에 투덜대는 걸 들어주게 생겼군.>
할아버지의 투정에 똑같이 투정으로 돌려주려던 나는 집중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넘어져버렸다.
으으. 완전 흐름이었는데 할아버지 때문에 끊어져 버렸어.
조금만 더 있으면 뭔가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헛소리는. 아직 갈 길이 멀고도 멀었거늘.>
‘…사실로 폭행하지 마세요! 이 작은 여자애를 그렇게 괴롭혀야겠어요?! 할아버지 완전 귀축이야!’
<그렇게 재잘댈 힘이 있으면 일어나서 메이스나 한 번 더 휘둘러라. 이번에는…>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할아버지를 화나게 만들 말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도중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며시 시선을 돌리자 수건을 든 칼의 모습이 보였다. 메이스를 놓고 팔을 위로 쭉 뻗자 칼이 조심스레 내 손에 수건을 쥐어줬다.
저번에 내 팔이 박살났던 일 이후로 칼은 나와 닿을 때마다 잔뜩 긴장을 기울였다. 툭 건드리면 부서져버릴 유리구슬 마냥.
기사들끼리 훈련할 때보면 그 정도 부상은 일상다반사인 것 같던데 왜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허접견. 시킨 일은 다 하고 왔어?”
“예. 던전 공략 신청을 넣고 왔습니다.”
“거기 있는 잡놈이 뭐라고 안 했어?”
“지역을 보고 약간 놀란 기색이었습니다만 영애님의 이름을 보고는 고갤 끄덕이더군요.”
그게 통과됐다고? 한 번은 반려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학장을 협박해서 알아서 통과시켜 두라고 할 계획까지 세워뒀었단 말야.
에르기누스의 인형이 머무르는 장소는 멋모르고 갈 만한 곳은 아니니까.
내가 여태까지 쌓아온 것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거기에 가는 게 쉽게 허락 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음. 으으음.
뭐. 됐다.
결과만 좋으면 아무래도 좋아.
“그럼 전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학기 초라 그런가 교수로서 할 일이 많네요.”
목을 축일 걸 남기고 칼이 떠나간 후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다시금 메이스를 붙잡았다.
지금 내 실력에 쉴 틈이 어디 있냐. 숨 돌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메이스를 휘둘러야지.
<루시.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만 지난 번 간슈님을 만났을 때에 무예의 신의 축복을 바랐잖으냐. 그 축복은 주어졌느냐?>
‘아직이요. 간슈 그 자식. 도서관에 처박힌 히키코모리라서 그런가 외출을 하는 데에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가봐요.’
<…간슈님을 만났을 때 한 말. 축복에 의해 번역되어서 나온 것이 아니었느냐?>
‘중간부터는 거의 진심이었는데요.’
<하아아. 정말. 네가 주신의 사도라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체 몇 개의 천벌이 떨어졌을는지.>
할아버지의 한탄을 흘려들으며 어깨를 으쓱인 나는 다시 메이스를 휘둘렀다.
*
루시가 에르기누스의 인형을 만나러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동안 다른 이들이라 하여 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이와 아서, 그리고 페이비는 개인실에 모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러 가기 전까지 나름대로 구체화를 시키기 위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가면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일 것이다. 그러니 최소한 무얼 물어서 확인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아둬야지.”
“일단 마법학 교수님들께 물어 관련 서적을 구해오긴 했어요.”
“저도 아카데미 교회의 주교님께 공허의 권능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왔습니다. 지난 번의 일 때문에 주교님께서도 여러모로 알아 둔 상태시더군요.”
천재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세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위에서 나름대로의 건물을 짓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루시가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할 정도로 뛰어난 대마법사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그런데 루시 알른 그 녀석이 이야기하는 대마법사가 누구일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만.”
“저도요. 파트란 가문의 영애인지라 어지간한 마법사분들과는 다 안면이 있지만 악신의 권능에 대해 조언해 줄 분은 도저히 떠오르질 않아요. 루시가 한 말이니 허세는 아닐 것 같지만.”
“영애님께서 추진하시는 일은 기상천외한 것이 많으니. 음. 옛 영웅인 에르기누스님이라도 만나게 되는 거 아닐까요?”
“하하. 성녀님. 그건 너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맞아요. 페이비. 신화 속의 사람을 어떻게 만나겠어요.”
“역시 그렇죠?”
“그래도 그 분을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네요. 위대한 대마법사이자 교양있는 귀족인 그 분과 만난다는 건 그 자체로 영광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