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7
바닥에 널부러졌던 해골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은 도대체 무어냐.”
“대마법사라는 사람이 보면 모르십니까? 골이 비어서 지혜가 사라져버렸나요? 아니면 동정 마법사한테 방금 전 광경이 너무 자극적이었던건가요?”
해골은 내 말에 무어라고 소리를 치려다 말고 자신의 지팡이를 꾹 쥐었다.
괜히 대화를 더 이어나가봐야 자기만 짜증이 날 것 같으니 그냥 배제해버리겠다는 건가.
대마법사다운 현명함이라고 해야할지. 놀리는 대로 반응이 나오는 멍청함이라 해야할지.
지팡이 끝에 모이는 마력을 보고서도 키득거리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메이스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해골이 마법을 형성하는 것을 멈추고 멍하니 메이스의 끝을 바라본다.
“…그건.”
“눈이 없어도 자기 동료는 알아보는구나? 우정이라기엔 너무 갸륵한데. 혹시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루시. 선 넘지 말거라.>
“너 좀 잠시라도 닥칠 수 없나?”
할아버지와 해골 양 쪽에서 한 소리를 들은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나는 저 해골에게서 조언을 구하러 온 입장이니까. 아예 선을 넘어 버릴 필요는 없겠지.
이미 선을 넘을락 말락 한 것 같기는 한데. 괜찮겠지? 내가 입을 다물자 분을 다스린 해골이 찬찬히 우리들을 살펴본다.
“뒤에 서 있는 여성분께선 주신의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군. 그 분의 영광이 흐려진 대지에서 이만큼이나 신실한 자는 처음 보는 듯 해.”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르기누스님. 허나 이 대지에는 저보다 신실한 분이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 이해를 바란다.”
페이비가 가볍게 웃는 것을 본 해골은 한숨과 함께 옆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옆에 있는 남성분은 솔라딘 그 녀석의 피를 이은 분이시군.”
“왕국의 3왕자. 아서 솔라딘이라 합니다. 말씀 편히 하시지요.”
“배려 받아들이지. 그래서 어땠소. 솔라딘은 자신에게 찾아 온 기회를 제대로 붙잡았소?”
“지금 왕국이 지닌 영광은 그 분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분명 솔라딘께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과연. 잘 된 일이군. 그 옆에 계신 다른 숙녀분들께선?”
“파트란 공작 가문의 장녀. 조이 파트란입니다.”
“프레이 켄트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내게로 고개를 돌린 해골은 보란 듯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지팡이를 꾹 붙잡았다.
“내 친우의 무구를 두 개나 가지고 있는 그대는 무얼 하는 사람인가.”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요? 아니면 굳이 멍청하단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요? 후자라면 당신께서 바라는 대로 얼마든 해드릴 수 있는데.”
“…허어. 어찌 주신께서는 이런 자를 택한 것인지.”
해골이 뼈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두드린 순간 내 뒤에 있던 페이비가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를 눈치 챈 조이가 미리 그 어깨를 붙잡지 않았다면 필시 무어라고 이야기를 했으리라.
“그래. 주신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신들의 관심 또한 함께 사고 있는 꼬맹아. 지금 이게 무얼 하는 짓이냐.”
“이제 퇴물이 된 해골 마법사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런 걸 물은 게 아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은 거다.”
해골이 자신의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훤히 뚫려 있는 천장의 풍경이었다.
“저게 뭐 잘못 됐나요?”
“진심으로 말하는 게냐?”
“왜요? 자기 의도대로 안 흘러가서 짜증나요? 화나요? 그러게 좀 튼튼하게 던전을 만들지 그러셨어요. 그랬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본래 이 곳에 오기 위해서는 여러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와 비슷한 던전을 만든 당사자가 에르기누스이니만큼 자신의 가짜가 있는 던전에는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였거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건 마땅찮은데 고생은 죽어라고 해야 하는 이 던전은 게임 속에서조차 비효율적이어서 선호되지 않던 장소다.
특정한 스크롤과 폭탄을 조합했을 때 천장을 부술 수 있단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저 천장은 충분할 정도로 튼튼했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깨진 적 없을 만큼.”
“과거의 허접들이 얼마나 멍청하고 무능했으면 저런 물렁한 벽하나 부수지 못했을까요.”
“무슨 수작을 쓴 거냐.”
“궁금하세요? 너어어어무 듣고 싶다고 비신다면 기꺼이 대답해드릴 의향이 있는데.”
“…”
해골은 달그락대는 소리를 내며 나를 노려봤지만 그렇다 하여 내 말을 거부하진 못했다.
자신이 공을 들여 만들어낸 것을 부순 방법이 궁금한 것이겠지.
대마법사의 기억을 지닌 가짜라 하더라도 그는 마법사다.
자신의 자존심보다도 호기심을 중시하는 해골은 결코 내 제안을 거부하지 못한다.
“아님 거래를 하는 방법도 있어요. 정신 나간 퇴물 마법사님께서 조금 조언을 해주신다면 저도 기꺼이 어디가 허접했는지 알려드릴게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생각하고 빤히 해골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해골이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대뜸 천장을 부수고 등장해서는 바라는 것을 내놓으라 이야기를 하는가.”
“싫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평생 텅 빈 뇌로 고민해 보시든가요.”
“최소한 내가 내미는 시련 정도는 통과하는 성의를 보여라. 꼬맹아.”
“세 번째 방의 창문. 중앙에서 두 번째 나무의 과실. 악마상의 왼쪽 눈동자.”
에르기누스가 준비해둔 시련의 답을 나열하자 해골이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했다. 나는 그 허접한 모습을 보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됐죠? 정신병자 해골님께서 같잖은 시련을 내봐야 저 물렁한 천장처럼 박살날 테니까. 그냥 대답이나 해주세요.”
“실로 뻔뻔하군.”
“저는 그래도 돼요. 허접 페도 주신을 홀릴만큼 귀엽고 예쁘니까요.”
“하. 미안하지만 너 같은 꼬맹이는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좀 괜찮게 생겼으면 무얼 하나. 그래봐야 꼬마일 뿐인데.”
코웃음을 치는 해골의 반응을 본 나는 놀라움에 하려던 말조차 잊어버렸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제발 밟아달라면서 비는 게 아니라 꼬마는 꼬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아!
역시 영웅님! 제 주변의 짐승들과는 달리 정상적인 취향을 지니고 계시군요! 정말 경탄스럽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제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생긴 것만은 멀쩡한 얼빠여우라는 선물을요!
“저런 옹이구멍에게 본녀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니.”
내 어깨 위에 자리하고 있던 얼빠여우는 머뜩찮은 듯 투덜거렸지만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여기 오기 전에 미리 거래를 해뒀거든.
제대로 일을 하면 한 시간 정도 의자로 삼아주기로.
그게 뭐가 좋은 건지는 몰라도 침을 흘리면서 기꺼이하겠노라 이야기할 정도였으니 보상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겠지.
어깨 위에서 얼빠여우가 폴짝 뛰어내린 순간 연기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그 안에서 인간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누구라도 미망에 빠트릴 법한 외견을 지닌 여성은 가슴 아래로 팔짱을 끼고는 연한 웃음을 지었다.
“루시를 꼬맹이라 하였지. 그렇다면 본녀는 어떠한가.”
자신의 힘을 이용해 수작을 부린 것인지 얼빠여우는 평소보다도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녀의 본모습을 몰랐다면 나조차도 홀려버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대답하지 않을 텐가?”
해골이 침묵을 지키자 얼빠여우가 한 걸음을 내딛으며 고갤 갸웃했다.
멍하니 서 있다 정신을 차린 해골은 어깨를 움츠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 잠시만 멈춰주십시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허! 마음의 준비라. 그것 참 소년 같은 이야기구나. 네 놈 같은 해골에겐 어울리지 않아.”
“그. 그으으.”
뒤로 물러서다가 벽에 부딪힌 해골은 골목에서 양아치를 만난 것처럼 등을 굽혔다.
<크하하핳! 에르기누스 그 놈! 자기 인형에는 수작질을 안 부려놨군!>
‘…대마법사님께선 원래 저렇게 수줍음이 많으셨나요?’
<많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공주님께서 손을 잡아줬다고 기절한 게 저 녀석이었으니까! 지금 저것도 많이 나아진거다! 막 여행을 떠날 무렵이었으면 이미 기절했을 걸?!>
‘세상에.’
그 정도면 단순히 여자를 꺼리는 수준을 뛰어넘은 것 같은데.
다른 의미로 대단하신 분이네. 저 대마법사님은.
“거기! 꼬맹이! 보지만 말고 이 수인 여성 분 좀 어떻게 해봐라!”
“제가 왜요? 전 동정 마법사님이 쭈굴대는 걸 보고 싶은데요?”
“거래! 거래해주마! 그러니까 제발!”
“네에~”
*
잠시간의 소란이 지나간 후. 조언을 구하기 위해 해골의 앞에 선 조이는 의심을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루시의 장담을 의심하는 건 아냐.
그렇지만 방금 전에 봤던 모습은 내가 동화책 속에서 봤던 에르기누스님과는 좀 많이 다르다고.
내가 아는 에르기누스님은 마법사중의 마법사이며 귀족 중의 귀족이신 분인데 방금 전 리나님을 앞에 두고 쩔쩔매던 이 분은 그냥 부끄럼 많은 남자일 뿐이잖아.
지금도 그래. 흘깃흘깃 리나님이 계시는 곳을 살피면서도 차마 다가가진 못하는 이 분의 모습은 그저 한심해보일 뿐이야.
정말 이런 해골이 우리에게 그럴 듯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크흠.”
조이의 따가운 시선이 아팠던 듯 해골이 헛기침을 하고는 어깨를 폈다.
“그대가 내게 조언을 구하고자 하는 마법사인가?”
“예. 그렇습니다. 에르기누스님.”
“네 마법을 보여 봐라.”
조이는 의구심을 억누르고서 자신의 안에 있는 마력을 끌어냈다.
오늘이 오기 전까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마법의 구체화에 대해 계속해서 논의했던 조이다.
그 중심에서 이런저런 방향으로 수정을 거듭했던 그녀는 최초에 비해 나름 그럴 듯한 모양새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의 틀 정도는 잡혔다고 자신하는 마법진을 완성한 조이는 가만 해골이 말을 꺼내는 것을 기다렸다.
허나 해골은 몇십 초가 지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마법진이 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건가?
이 해골 진짜 에르기누스 맞아?
루시가 뭔가 착각한 거 아냐?
방금 전 한심한 모습을 본 탓인지 점점 더 조이의 의심이 커져가던 그 때 해골이 느릿하게 혼잣말을 했다.
“이백년 후의 마법은 이런 느낌인가. 크게 발전하진 못했군.”
해골의 말을 들은 순간 조이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 이백년 전의 지식 속에 머물러 있었던 거야?
그런데 겨우 수십초 만에 그 세월의 간극을 좁혔다고?
아냐. 그럴 리 없어.
아무리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가 초월적인 마법사라 하더라도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마법사.”
“예? 예!”
“이는 공허의 권능에 대응하기 위해 네가 만든 마법인가?”
“…그렇습니다.”
“발상은 나쁘지 않으나 그를 실현할 능력이 다소 부족하군. 네 방식대로 마법을 만들고자 한다면 이런 식으로 하는 편이 낫다.”
해골의 말이 끝난 순간 마법진이 조이의 의지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법을 탈취당한 거야? 전조조차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렇지?”
눈을 끔뻑이다 해골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조이는 자신의 앞에 떠 있는 마법진을 보고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대마법사의 손에 의해 개조된 마법진은 마법사라면 누구나 감동을 느낄 만큼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