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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7

“…그렇게 된 거예요.”

“흠.”

장장 한 시간에 걸쳐 이어진 저니의 설명이 드디어 끝났다.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 하는 외식 한 번 하지 못했고… 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구구절절한 설명 끝에 저니는 에런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동생 같아서 그랬다 이 말이지?”

“네, 네넷! 그냥카나가너무귀여워서그랬던거지제목숨에맹세코절대로흑심을품었다거나어떻게해보려는의도는아니었습니다만약제말이거짓말이라면당장제목숨을가져가셔도-”

“…어차피 죽어도 살아나지 않나?”

“엣.”

갑작스럽게 들어온 태클에 저니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마, 맞는 말이긴 한데 굳이 태클을 걸으셔야 했는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목숨은 소중한 거니까요.”

머리를 열심히 굴린 끝에 나온 것치고는 상당히 구차한 변명이었다.

“일단 알겠다. 카나가 둔감한 면이 있는 건 맞지만, 네게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알아챘겠지. 네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군.”

“…하, 하하. 하아….”

‘…아닌 것 같은데요?’

세상에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든 사람을 암살하려고 한단 말인가.

아니면 그, 뭐냐… 얀데레 같은 건가?

어린애 마음은 정말 알 수가 없구나.

직접 물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답을 알고 있을 카나는 자기만 쏙 빼놓고 이어지는 대화에 지쳐 꿈나라로 떠난 지 오래였다.

저니는 에런의 어깨에 기대 새근새근 자고 있는 카나를 보았다.

‘…귀여우니까 봐준다.’

애초에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지만, 천사같이 자는 얼굴을 보니 조금 쌓였던 불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왜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하루 종일 시달리다가도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면 마음의 평안을 얻는지 알 것 같은 기분.

깨어 있을 때와 달리 경계심을 허물고 편안하게 자는 모습을 보니 저니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깨어 있을 때도 귀엽지만.’

그때와는 다른 맛이 있다고 해야 하나.

“…카나는.”

“…네?

에런이 앞에 있는 것도 잊은 채 카나의 자는 얼굴을 구경하던 저니는 에런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깨에 기대어 자는 카나를 의식했는지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더 낮아져 있었다.

“카나는, 잘 지내고 있었나?”

“음, 뭐….”

저니는 머뭇거렸다.

‘잘 지내는 것’의 정의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깊은 산속에 살고 있을 뿐이지, 카나가 살던 집엔 있을 건 다 갖추고 있었으니까.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았어요.”

그러나 저니의 대답은 달랐다.

“많이 외로워 보이더라고요.”

카나는 날을 세운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냈다.

카나의 과거를 어느 정도 알게 된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의 유품을 훔쳐 가려고 하는 것도 모자라, 무기를 들고 자신을 죽이겠다고 덤벼드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 우호적인 반응을 보일까.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다른 단추들이 제대로 끼워질 리 있나.

카나가 있던 산을 오르던 플레이어가 목적을 불문하고 죽어 나간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실리아인도 건드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카나는 그들과 같은 플레이어인 저니는 받아주었다.

“카나는 고작 제가 그라닉을 할 줄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곁에 다가오는 걸 허락해 줬어요.”

심지어 그때 저니의 그라닉 실력은 할 줄 안다고 하기도 민망한, 단어 몇 개만 아는 수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만약 정말로 사람들이 싫었던 거라면 제가 매일 같이 찾아가도 무시했겠죠.”

아니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그랬듯이 썰어버리거나.

그러지 않았다는 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산속에 박혀 살면서도 사람과 엮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저니는 추측한 바는 그러했다.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던 에런이 침음 소리를 냈다.

“역시 그랬구나.”

에런이 아는 카나는 접촉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나마 가리드가 쓰다듬을 땐 가만히 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눈치를 보이진 않았다.

그런 카나가 접촉을 쉽게 허락하다니.

처음에는 같은 여자라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이제 에런은 카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카나가 잠결에 뒤척거리자, 에런은 소녀가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자세를 고쳤다.

“가리드에 대해 알고 있나?”

“네. 카나의 아버지라고….”

“정확히 말하면 양아버지다.”

가리드는 가족도, 고향도 잃고 죽을 위기에 처한 카나를 살려주고 양딸로 삼았다.

‘부모? 옛날에 죽었어.’

가리드가 카나에게 부모에 대해 물을 때, 에런도 그 자리에 있었다.

후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카나의 부모는 부모라고 할 수도 없는 인간 말종들이었다.

아이라면 응당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않고 자랐으니 그 어린 소녀가 나이에 맞지 않는 시종일관 딱딱한 모습만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 부족한 사랑을 채워주던 게 가리드였지.”

부모답지 않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부랑아들 틈바구니에서 자란 카나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낯선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카나에게 있어 가리드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지만,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끝내 회복하지 못한 가리드는 카나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가리드가 떠나고 생긴 마음의 빈자리를 그의 신념을 대신 지키겠다는 명목과 제국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라시스의 멸망으로 그것마저 사라지자 카나도 모습을 감추었다.

“정말 바보 같은 녀석이야.”

그렇게 외로웠으면 나한테라도 손을 뻗으면 됐을 텐데.

에런은 씁쓸하게 웃었다.

까마득한 어릴 적부터 봐왔던 아이지만, 아무래도 그는 그 빈자리를 채우기엔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젠 그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이 생겼구나.’

아직 제대로 의식하진 못한 거 같지만, 스킨쉽을 허용할 정도로 저니가 자기에게 보인 관심이 인상 깊었던 거겠지.

에런은 버팀목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작은 새가 새로이 안식처를 찾은 것에 안도하며 저니를 바라봤다.

“친부가 아니었군요….”

새로이 알게 된 카나의 과거에 저니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반대로 말하면 친부가 아닌데도 그렇게 애틋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는 뜻이리라.

에런의 말을 곱씹다가 문득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았다는 걸 느낀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참, 카나가 다른 건 몰라도 달콤한 거랑 꽃은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예전에도 그랬나요?”

“…달콤한 거야 예전부터 좋아했지만, 꽃?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을 말하는 건가?”

“…? 네, 그 꽃이요.”

꽃이 그거 말고 다른 게 있나?

저니의 말에 에런은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별생각 없이 던진 물음이건만 돌아오는 에런의 반응이 영 심상치 않자 저니도 덩달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싫어하진 않아도 딱히 좋아하진 않을 텐데?”

“네? 집 앞에 꽃밭을 만들어서 애지중지 가꾸고 있던데요? 어찌나 애지중지하던지, 꽃을 밟았다가 죽….”

저니는 수많은 플레이어의 최후에 대해 말하려다가 꾹 참았다.

“…아무튼 그랬어요.”

“설마….”

에런이 잠시 침묵에 잠겼다.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눈을 찡그리고 있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에 카나는 여성적이라고 생각하나?”

“헉…!”

갑자기 암살 시도를…?

오늘만 벌써 두 번째 겪는 암살 시도에 저니가 헛숨을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에런의 말이 나온 직후 그녀의 채팅창은 인세에 강림한 지옥이 되어있었다.

“그, 글쎄요. 여성적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채팅창을 힐끗거리며 오랜 기간 다져진 나락 회피 능력을 이용해 회피를 시도하는 저니.

에런은 살아남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그녀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부연 설명을 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외모를 가꾸거나, 옷에 관심이 있다거나. 그런 걸 본 적 있냐고 묻는 거다.”

“…그러고 보니.”

기억을 더듬던 저니가 눈가를 좁혔다.

…딱히 없네?

“기사단 생활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전부터 그러긴 했지만, 그거 때문에 더 심해졌을 수도 있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고,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은 것 같군.”

에런의 눈이 어딘가 먼 곳을 보는 사람처럼 아련해졌다.

“예전에, 가리드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에런, 여자애들은 뭘 좋아하냐?’

‘카나 때문이냐?’

‘엉. 또래 애들답게 좀 웃고 떠들고 했으면 좋겠는데, 애가 영 무뚝뚝하단 말이지. 꼭 남자애들처럼. 뭐 좋은 방법 없을까?’

‘흠… 꽃이라도 심어보는 게 어때.’

‘꽃? 갑자기 웬 꽃?’

‘어린애들이랑 여자들은 꽃을 좋아하잖아. 지금 당장은 관심이 없을 수 있어도 네가 꽃을 심고 가꾸는 걸 보면 관심이 생기지 않겠어? 그러면 카나도 꽃을 심고 싶어할 테고, 네가 걱정하는 사내아이스러운 면도 없어지겠지.’

‘일리가 있구만. 좋아, 한번 해볼까!’

가리드는 에런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의 집에 찾아갈 때마다 늘어나는 꽃들을 보며 에런은 그가 카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작 그들이 목표로 한 카나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탓에 효과를 보진 못했지만.

“이 녀석은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닐 거다. 꽃을 좋아하던 가리드를 좋아하는 거겠지.”

그렇기 때문에 관심도 없는 꽃을 손수 사 들고 무덤 앞에 꽃밭을 만들었을 것이다.

가리드가 생전에 좋아하던 꽃들을 볼 수 있도록.

“이렇게 보면 나와 가리드의 의도가 절반만 성공한 셈이군.”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아이는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른이 된 후에야 그 마음을 깨닫고 후회하는 거 아니겠는가.

“아….”

저니의 탄식이 응접실에 맴돌았다.

* * *

“으응….”

…깜박 잠들었네.

간식을 너무 많이 주워 먹은 탓일까, 아니면 에런과 저니가 나누는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가 자장가처럼 느껴져서일까.

나른하다고 생각하곤 있었는데 대체 언제부터 잠들었던 거지?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잠기운을 몰아냈다.

“…?”

그러다가 문득, 나를 바라보고 있던 저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물기가 가득했다.

“…에런.”

“잘 잤니?”

“응. …아니.”

“…? 잘 잤다는 거냐, 못 잤다는 거냐?”

인기척을 느꼈는지 인사를 건네는 에런에게 가볍게 대답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때렸어?”

“…뭐?”

“저니, 때린 거야?”

맞은 흔적이 보이지는 않는데.

저렇게 울먹일 이유가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에런에게 물어보자 에런이 황당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내가 너인 줄 알아?”

“…아니면 말고.”

아니면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되지, 너인 줄 아냐는 건 뭐야?

누가 보면 나를 마음에 안 든다고 아무나 때리는 사람으로 알겠네.

입술을 비죽이고 있을 때, 무언가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후에에엥! 카나야아!”

“…?!”

말해 뭐할까.

당연히 그 무언가의 정체는 저니였다.

눈물 콧물 다 빼며 달려드는데,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반응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나는 그대로 그녀의 품에 안겨졌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난…. …라고… …데…!”

“으붑….”

품에 안겨져서 가뜩이나 안 들리는데, 울음 때문에 망가진 발음까지 합쳐지니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힘으로 떼어내려 하자 저니가 나를 감싼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래봤자 나보다 셀 리는 없으니 떼려고 하면 뗄 순 있었지만….

‘에휴.’

나는 그녀를 떼어내는 대신 얌전히 몸을 맡기고 팔을 늘어뜨렸다.

내가 자는 사이 에런한테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러겠어.

그녀가 에런에게 시달린 건 내 탓도 어느 정도 있으니까 그냥 받아줘야지.

적당히 하라고 했잖아.

살짝 있는 틈 사이로 보이는 에런에게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을 쏘아 보냈다.

“…나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다.”

아니긴 무슨.

여기 있는 사람이라곤 에런과 나뿐인데, 그러면 내가 울렸다는 말이야? 단잠을 자고 있던 내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는 에런을 한심스럽게 보고 있으니 에런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쿵쿵 쳤다.

“카나야아아….”

“응.”

그래, 그래.

저니에게 꼭 끌어안긴 채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고생했으니까, 이번만 봐주는 거야.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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