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1
나와의 거래를 끝마치고 본격적으로 조이의 마법에 개입을 시작한 해골은 대마법사로써의 위용을 아낌없이 뽐냈다.
“아카데미의 마법사들에게 이를 사용하게 할 생각이라고? 비효율적이다. 아카데미의 결계에 직접 이 성질을 부여하는 편이 낫지.”
“결계의 마법진에 대해 모른다고? 상관 없다. 그 기반을 쌓은 게 나이니 그 근간에 마법을 부여하면 된다. 아. 이 경우에는 호환에 문제가 생길 순 있겠군. 고민을 해봐야겠어.”
“아예 결계의 근간을 수정할까? 그래. 이 쪽이 더 낫겠군. 만든 지 오래 된 녀석이니 이런저런 문제가 생겼을 터.”
“결계의 최신화를 하면서 동시에 이 성질을 부여하면 되겠어.”
“그 수정을 누가 하냐고? 당연히 마법사 네가 해야지. 나는 이 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몸이다.”
자신의 발상에 따라 이리저리 마법진을 매만지던 해골은 옆에서 현실적인 물음을 던진 조이에게 대뜸 이렇게 이야길 했다.
“저. 저요?”
“걱정마라.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꽤 괜찮은 재능을 지닌 너이니 금방 배울 수 있을 거다.”
“그…런가요?”
대마법사에게 칭찬을 받은 조이는 히죽대며 녹아내리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해골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조이의 재능은 소울 아카데미 캐릭터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니까.
다만. 그. 조이 하나한테 뭔가를 맡기기엔 불안한 부분이 있는데.
“파트란의 왕자님. 당신도 멀뚱히 보고 있지 말고 옆에 와서 제 이야기를 귀에 담으십시오.”
“…나까지 말인가?”
“그럼 이 나사 빠진 마법사에게 모든 걸 맡길 생각이오? 나는 그럴 수 없소. 마법사의 재능과는 별개로 이 아이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오.”
“부정할 수 없군.”
“거기 경건한 분도 이리로 오십시오. 안전장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오. 역시 대마법사는 대마법사인가. 순식간에 조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했잖아.
얼빠여우 앞에 서서 살려달라 빌던 모습만 안 봤다면 진짜 경탄을 했을 텐데. 아쉽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조이가 얼굴이 벌개져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 정도까진 아니거든요! 제가 가끔 실수를 하긴 하지만 그런 모욕을 들을 만큼은 아니라고요!”
“가끔? 조이. 진정 가끔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디 한 번 내가 여태까지 보아왔던 네 실수들을 읊어.”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가 넘었습니다!”
“불쌍왕자님. 얼빵이가 바보짓을 한 거 다 기억하고 계신가요? 좀 소름끼치긴 하는데 그거랑은 별개로 궁금하네요.”
“저도 궁금하네요. 3왕자님. 제가 모르는 조이의 실수라니.”
“나도 사람인데 다 기억하진 못한다. 다만 기억에 남아있는 건 몇 가지가 있지.”
“왕자님?! 왕자니이임!? 제 말 안 들리세요!?”
“이제 막 마법을 익혔을 무렵인가? 화염마법을 보여주겠다면서 마법진을 만들다가 왕궁의 꽃밭을 불태워서…”
“자꾸 그러시면 이번에는 왕자님을 태워 버릴 거에요!”
조이는 실제로 사람 몇을 불태워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우리들은 대화를 멈췄다.
나중에 아카데미로 돌아가고 난 후에 슬쩍 물어봐야겠다. 게임 속에도 안 나온 얼빵이의 처참한 실패담이라니. 엄청나게 재밌을 것 같잖아.
아서와 조이, 페이비가 에르기누스에게 결계에 대해서 배우는 동안 나는 흐릿한 요정의 춤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만.
여기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요정의 춤을 눈으로 보았던 게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는 것.
내가 그 춤을 맨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이제 막 게임을 시작했을 무렵이다.
원래 게임 컷신이라는 게 그렇잖아. 처음에 보았을 때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만 두 번째 세 번째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스킵을 누르게 된다고!
솔직히 흐릿하게라도 기억하고 있는 내가 대단하나 거라고 생각해!
진심으로!
이렇게였던가? 아닌가? 이런 식이었나?
흐린 기억을 되짚어가며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답답함이 점차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산을 넘으면 이제 내리막길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또 다시 오르막길이 나오다니!
누구야! 이딴 개 같은 코스를 만든 사람이!
메스가키가 진상을 부릴 것이 두렵지도 않더냐! 네 이놈!
<그래도 길을 잡은 것이 어디냐. 제대로 된 길조차도 모르던 이전에 비하면 현격한 변화다.>
‘무척이나 긍정적이시네요. 할아버지.’
<크흐흐.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게 당연한 반응인거다.>
‘당연해요?’
<여태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해서 모르겠지만 무의 길이라는 것은 본디 이리저리 헤매가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헌데 저 멀리에 있는 지표를 발견했으니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 이제 저기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단 것이니까.>
‘그런다고 막막한 게 사라지는 건 아닌데요.’
<뭐 어떠냐. 네게 조언해줄 것이 어디 한 둘인가. 미와 예술의 여신께서 베푼 축복이 있고. 역사의 신께서 베푼 것이 있고. 내가 있는데.>
언젠가 도착할 수 있을 것이란 할아버지의 말은 꽤 믿음직스러웠다. 이전에 저와 비슷한 말을 듣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처음 새 둔기술 개발한다 했을 때도 비슷한 말 했던 거 기억하세요?’
<…어.>
‘근데 웬 걸. 할아버지가 이끄는 길은 낭떠러지였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낭떠러지라니! 그건 네 길이 아니었을 뿐 다른 이들에겐 분명한 정답이다!>
‘저한텐 오답이잖아요. 할아버지. 자기 무능을 그런 식으로 변명하고 싶으세요?’
<크흠.>
할아버지는 할 말이 마땅찮은 듯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보이지는 않지만 내 눈치를 본다는 것이 절로 느껴졌다.
삐진 척을 하기 위해 애써 웃음을 참던 나였지만 내 입술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입가에서 자연스레 웃음이 새 나온다.
<하아. 놀려먹은 것이었느냐.>
‘이제 제가 왜 사실로 때리지 말라 그러는 지 알겠죠?’
<그. 뭐냐. 다음부턴 좀 조심해서 이야기를 하마.>
‘알면 됐어요.’
이미 기억이 흐릿해진 것을 어쩌겠는가. 이제 다시 그 광경을 볼 방법도 없는데.
죽어라고 노력해서 최대한 원본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그리 생각을 하며 다시금 내가 자세를 잡은 그 때 여태까지 고로롱 거리며 자고 있던 프레이가 눈을 뜨더니 가만 내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기지개를 키더니 종종 걸음으로 내 곁에 왔다.
“루시. 루시.”
그녀는 길게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반짝이는 눈동자만으로 그 뜻을 표시했다.
“그렇게 처발리고 싶어? 마조 검사?”
“재밌을 것 같잖아.”
내 매도를 가뿐히 받아넘기는 프레이의 모습에 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직 실전에서 쓰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야.
요정의 춤 속에서 깨우침을 얻고서 채 몇 시간조차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프레이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은 없어. 나도 몸이 근질거리는 건 마찬가지인 걸.
아아. 내가 어쩌다 이런 뇌근육이 되어버렸을까.
이 세상에 떨어지기전까지만 해도 집 밖은 위험해를 외치던 나약한 청년이었는데.
“덤비고 싶으면 덤벼. 질릴 때까지 바닥을 구르게 해줄게.”
“약속한거다?”
*
나와 프레이의 대련은 여느 때처럼 진행됐다.
내 도발이 열이 받은 프레이가 내 방패를 뚫기 위해서 달려들고. 나는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틈을 보고 한 번에 반격을 가하는 식으로.
내 방패술은 라샤의 공격마저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인지라 아무리 프레이의 검이 매서워졌다 한들 박살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루하루 검이 날카로워지는 걸 보면 잠시 멈칫하는 순간 박살날 때가 찾아올 것 같긴 한데 아직은 아니니까.
그럼 평소랑 다른 점이 아예 없었냐고? 아니. 분명 다른 점이 있긴 했지.
“…루시 움직임 너무 짜증나.”
체력이 다 떨어진 듯 바닥에 머리를 처 박고 있던 프레이가 울분을 담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걸 보면 알 수 있듯 요정의 춤을 흉내내는 내 움직임은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머리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라나 뭐라나.
할아버지가 말을 하길 더 악질적인 점은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어서 눈을 떼어내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보고 있으면 열 받아서 달려들게 되는데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는 움직임이라니.
너무나도 내게 잘 맞는 움직임이잖아!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면 완성됐을 때의 파괴력은 어느 정도라는 거야!?
흐흐흫. 생각만 해도 즐겁네.
나중에 무예의 신이랑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 분한테 조언 좀 해달라고 해보자.
무예의 신이라면 분명 그럴 듯한 조언을 해 줄 거야.
…아니 근데 그 쪽에서 주겠다고 했던 위기감지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간슈! 일 안하냐!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지친 몸을 달래고 있으려니 해골이 반쯤 혼이 나간 세 사람을 내버려 둔 채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카데미에서 시험 준비를 하면서 며칠 밤을 세우다시피 할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체 쟤네들을 얼마나 굴려댄 거야?
“공허의 권능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은 완성시켰다. 이제 저걸 아카데미에 가서 적용시키기만 하면 된다.”
“자신 있어? 저 마법이 동정마법사님처럼 찐따 같으면 닭장 아줌마도 평생 꿈 속에서 살게 될 텐데?”
“그 닭장 아줌마라는 게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저 마법사가 이상한 실수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
“…얼빵이는 무조건 얼빵한 짓 하는데?”
“안다. 그래서 옆에 안전장치를 두 개 붙여두지 않았나.”
문제가 생길 여지가 없다 자신있게 이야기한 에르기누스는 가만 날 바라보다 웃음을 흘렸다.
“그럼 기다리고 있으마.”
“금방 올 거야. 동정마법사님이 삭아서 부서지면 곤란하니까.”
“허. 그것 참. 아. 그래. 천장을 어떻게 부쉈는지 알려준다 하지 않았느냐. 약속은 지켜야지.”
“나도 정확한 건 잘 몰라. 부수는 거 보여줄 테니까 찐따동정마법사님이 알아서 분석해.”
에르기누스에게 그리 이야기를 한 나는 눈이 핑핑 돌아가고 있는 조이의 어깨를 붙잡아 데려와선 그녀의 마법으로 천장에 폭탄을 부착했다.
그리고 나서 페이비를 시켜 방어막을 만든 후. 퍼어엉! 들어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천장을 부쉈다.
조이의 마법도 한 눈에 분석해 낸 해골이니까 이것도 순식간에 원리를 알아차렸겠지?
그가 자신만만하게 설명할 것을 기대하며 슬며시 고갤 돌린 나는 입을 헤 벌리고 있는 해골을 발견하고는 고갤 갸웃거렸다.
“동정마법사님? 왜 그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어?”
“…저게 뭐야.”
“…응?”
“아니. 응? 뭐지? 저게 어떻게 되는 거야?”
어. 음. 그거 나한테 물어봐도 대답 못 해주는 데요.
“잠시. 잠시만. 한 번만 더 재현을 해다오. 제대로 눈에 새길 테니 제발.”
죄송한데 재료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요. 저희 볼 일 다 끝났으니까 이만 가 볼게요. 아시겠죠?
“아주 잠깐이면 된다! 제발! 조금만 있으면!”
“얼빠여우! 다시 공격 해!”
“루시야. 나를 너무 형편 좋게 사용하는 것 같구나.”
“그래서 싫다고?”
“아니. 좋단 이야기지. 좀 더 도구처럼 다뤄준다면. 헉. 허어억.”
얼빠여우가 해골을 무력화시키는 동안 우리는 천장을 넘어 던전 바깥으로 탈출했다.
이제 아카데미로 돌아가자! 공허의 추종자들을 조지러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