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3
소울 아카데미라는 게임에서 지능을 올릴 수 있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은 영약이나 스킬, 아이템, 퀘스트 등을 이용해서 반 강제적으로 올리는 것.
지금까지 내가 몇 번이나 시도를 해왔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서 실패해 온 방식이고 공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내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시도를 해 볼 방식이기도 하지.
또 다른 하나는 정공법이다. 아카데미에서 보내는 시간을 공부에 투자해서 점진적으로 상승시키는 것.
내가 고된 훈련을 통해서 여러 신체적인 능력을 증진시키는 것과 별 반 다르지 않은 행위지.
이게 아직 게임이었을 적에 일정 수준까지 지능을 끌어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냥 특정 과목을 공부하겠다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캐릭터가 알아서 공부를 했으니까.
효율의 문제가 있을 뿐 지능을 올린다는 행위 자체의 난이도가 높은 건 아니었지.
근데 현실이 되니까 이야기가 달랐다. 신체능력을 올릴 때 내가 직접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지능을 올리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해야 했던 것이다.
학기 초반. 그러니까 이 세상을 지금보다 더 게임으로 여기고 있었던 나는 지능을 올리는 데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성기사라는 직업을 반강제적으로 택하게 된 이상 거기에 필요한 스텟만 올리면 된다고 여겼으니까.
그래서 수업 시간에는 그냥 하루 종일 잤고 시험도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그냥 꼼수로 넘기는 것에만 치중했지.
허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 세상이 마냥 게임 속이라 여기고 넘어갈 수 없게 된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캐릭터보다 인격체라 느끼게 된 지금의 나는. 도저히 58이란 지능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
아니! 생각을 해봐!
게임 속 캐릭터가 빡대가리인 건 아무 상관없어!
그게 게임이랑 무슨 상관인데! 캐릭터는 그냥 자신의 역할만 다해주면 그만이야!
그 녀석이 평소에 얼마나 병신 같은 짓거리를 하건 내 알바 아니라고!
그렇지만 현실은 달라!
현실에서 빡대가리로 살 수는 없어!
이건 내 자존심과 관계된 문제란 말야!
<그러게 평소부터 공부를 했어야지.>
‘할아버지. 사실로 패지 말라는 이야기하고 나서 하루도 안 지났거든요?’
<그으랬었나? 잘 기억이 안 나는데에?>
‘아. 네. 그러시겠죠. 치매가 올 때도 되셨으니 제가 이해할게요. 메이스 안에 계셔서 다행이네요. 침 줄줄 흘리는 분을 요양하기는 좀 그래서.’
<…괜히 덤벼서 미안하다. 적당히 때려다오.>
할아버지를 가뿐히 굴복시킨 나는 애버리에게로 향했다. 성격이 더러운 건 그렇다 쳐도 자기 개발에는 열심히인 녀석이니까. 시험범위 같은 건 모두 다 파악을 해뒀을 거야.
“…어. 럼리 영애라면 아직 바깥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허나 애버리는 아카데미 안에 없었다. 그녀의 옆에 머물던 영애 중 하나가 이야기하길 바깥의 던전을 공략하러 갔다는 모양.
평민이 그녀를 꼬드겼다 이야기하는 걸 보면 토비가 애버리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한 거겠지.
“시험범위요?”
“그래. 들러리.”
다음으로 내가 택한 것은 비시였지만 그녀는 나와 듣는 수업 범위 자체가 많이 달랐다.
그래서 그녀 하나로는 내가 바라는 걸 다 챙길 수 없었다.
“하. 진짜 쓸모없네. 넌 앞으로도 평생 들러리로 살아야겠다.”
“…죄송합니다.”
“아. 그리고 이거 받아.”
“이건 뭔가요?”
“들러리 너랑 너만큼이나 하찮은 녀석들이 들리면 좋을 던전.”
“어. 어어. 감사합니다?”
“들러리에 개허접인 너한테도 도움이 될 물건이 있으니까 방학 때라도 가. 평생 바닥을 길거면 뭐 안가도 상관없고.”
좁은 인맥 속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찾아다니던 나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택해야만 했다.
“시험범위요?”
나의 질문을 들은 조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몰라?”
“아뇨. 다 알고 있긴 하죠.”
“그럼 뭔데. 경쟁자한테 알려주기 싫단 거야? 얼빵이 그렇게 안 봤는데 음습한 구석이 있구나?”
“루시가 이런 걸 물어보는 게 처음이라서 의아해 했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루시가 물어보는 데 제가 뭘 숨기겠어요?”
의아해? 왜? 내가 평소에 공부 안 하는 건 너희도 잘 알고 있잖아.
수업시간마다 책상에 머리 박고 쿨쿨대는데 시험 범위 같은 걸 알 리가 있나.
조이는 내가 모르는 과목에 대해서 묻고는 일순간의 고민도 없이 범위를 알려 줬다.
이런 걸 다 머리에 넣어두고 있다니. 조이 진짜 생긴거랑 다르게 모범생이긴 하구나.
“그보다 루시. 결계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됐나요?”
“학장이 너무 무능해서 당장은 어렵다던데?”
“그래요?”
당장 하긴 어렵단 이야기에 조이가 눈에 띄게 화색을 드러냈다. 바로 결계를 수정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구석이 많았던 거겠지.
조이에게 연습을 하고 있으라 말한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서 책을 펼쳤다.
좋아! 이제는 정말 공부뿐이야! 이번에야말로 지능 58의 빡대가리에서 벗어나겠어!
마음을 굳게 먹고서 책을 펼친 나는 대략 삼십분 가량이 지나고 나서 슬그머니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도움! 도우우움!’
<도움? 그게 무슨 단어더냐? 내애가 치이매가 와서 그러언가.>
‘삐졌어요!? 겨우 그 말 했다고 삐진 거에요!?’
<으으음. 삐져? 무슨 일이 있긴 했나?>
‘됐어요! 아무 말 하지 마요! 제가 뭐. 할아버지말고는 부탁할데가 없는 외톨이인 줄 알아요!?’
그거 좀 뭐라 그랬다고 삐져서는!
이런 속 좁은 사람이 어떻게 영웅이 된 거람?!
여기 성경에는 관대함이니 뭐니하는 내용은 적혀 있지도 않은 가봐!?
하긴 허접변태페도주신을 모시는 신도가 다 그렇지 뭐!
…페이비는 빼고!
순간 열이 올라서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막상 도움을 구할 곳을 찾으려니 막막함이 느껴졌다.
어쨌든 간에 나는 여러 꼼수를 써서 여태까지 1등을 유지해 왔으니까.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 아무것도 몰라! 라고 외치면 누가 믿어주겠냐고!
심지어 난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사정을 제대로 설명하기도 힘들어!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최선은 할아버지한테 고개를 숙이는 거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그랬다간 할아버지가 기고만장해서는 뭐라뭐라 그럴 거 아냐!
나 그 꼴은 못 봐! 상상만 해도 속이 뒤집어 질 것 같다고!
<누가 죄송하다면서 고개를 숙이면 기억이 돌아올 것 같은데에에.>
할아버지의 놀림을 듣고 퍼뜩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책을 접고 기숙사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기숙사에서 슬며시 빠져 나와 조이의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다.
“또 무슨 일인가요? 루시?”
“…”
“루시?”
“얼빵이가 게으름 피우는 거 아닌가 감시하러 왔어. 자. 얼빵아. 네가 배운 거 나한테 주절거려봐!”
*
조이는 자신의 옆에서 미간을 구기고 있는 루시를 보면서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루시가 나한테 먼저 의지를 해 주다니.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네. 나는 루시한테 도움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야.
“얼빵아.”
“…네?”
“표정 지금 엄청 징그러운 거 알아? 완전 얼빠여우같아.”
“제. 제가요? 제 표정이 그래요!?”
인격을 포기한 짐승같다는 이야기에 기겁을 한 조이는 다급히 표정을 다잡은 후 루시가 펼친 페이지를 살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라도 공부 쪽으로 이야기를!
“어라?”
저 부분에 고민할 구석이 있나? 1학년 때도 배운 거잖아.
조금 심화되긴 했지만 1학년 때 루시의 성적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건데?
“루시? 그 부분에서 어떤 걸 모르시는 건가요?”
조이의 물음을 들은 루시가 입술을 우물거린다.
루시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조이다. 무어라고 말을 한 건 아니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추측하긴 어렵지 않다.
“설마 다 모르는 거에요?”
“…”
“…왜?”
지난 겨울 방학 이후로 솔직한 감정이 드러나는 루시의 얼굴에 부끄러움이란 감정이 묻어나온다.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저기에 적힌 내용을 모르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조이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닐까하는 의문을 품었다.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아카데미 1학년 내내 수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던 루시가.
실기에 비해 부족할 지언정 언제나 최상위라 부를 만한 성적을 유지하던 그녀가.
어떻게 저 내용을 모를 수가 있는가.
루시가 바보도 아니고 겨우 몇 개월 지났다고 저걸 잊어버릴 리가 없는데?
점차 커져만 가는 의문에 물음표를 띄우던 조이는 입을 다물고만 있는 루시의 모습을 보고 순간 굳어버렸다.
평소 조이가 아는 루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한 사람이다. 자신이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오히려 더 강하게 나오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한 마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단 말인가.
무슨 일이 있었구나.
분명해.
뭔가가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 1등을 차지하던 루시가 이런 걸 까먹을 리가 없잖아.
조이의 의심을 더 키운 것은 평소 루시가 자진해서 위험 속으로 뛰쳐들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당장 얼마 전만 해도 그녀는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걸고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나.
그 때의 광경을 생생히 기억하는 조이는 이번에도 루시가 자기들 모르게 위험한 무언가를 하고 온 거 아닐까 의심했다.
맞아. 지난 번에 에르기누스님이 계신 던전의 천장을 부순 거!
대마법사인 그 분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현상을 일으키는 물건이 어디 구하기 쉬운 물건이겠어!?
그걸 구하느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구나!
“루시! 당신!”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으려던 조이는 루시가 왜 위험한 일들을 감추려 하는 지에 대해 떠올리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루시는 우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고생을 감추는 거야.
근데 그걸 굳이 해집는 게 맞나?
그래서야 루시의 희생을 더럽히는 게 아닐까?
평소 수많은 소설을 읽어 온 덕에 풍부한 상상력을 지니게 된 조이의 머릿속에 루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홀로 위험 속에 뛰어들었다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루시는 그를 숨기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러 온 거야.
“흑.”
“…응?”
“흐윽!”
“으응? 얼빵아. 너 왜 갑자기.”
“루시! 모르는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세요! 저 최선을 다해서 알려드릴게요!”
“어. 어어어. 그래. 맘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