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4
내가 조이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는 일종의 호승심이었다.
도저히 할아버지한테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무작정 발을 움직였지.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 비교적 조이가 도움을 청하기에 부담이 없단 것도 내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페이비는 뭔가 자기 할 일을 다 내버리면서까지 날 도울 것 같아서 부담스럽고.
아서는 도와주긴 하겠지만 엄청 틱틱대면서 여태까지 내가 했던 일을 되갚아주려고 할 게 뻔해서 싫어.
뭣보다 아서 이 녀석은 내가 기초가 되는 것들을 모른단 사실을 의이하게 여기면서 캐물을 것 같단 말야.
그렇지만 조이는 아냐. 생긴 것만 무섭지 속은 여리여리한 조이라면 별 말 없이 날 도와줄 게 분명해!
내 머리가 텅텅 빈 것도 얼빵이라면 적당히 넘길 수 있을 테지!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조이의 귀가 쉽게 팔랑거린단 사실이야!
중간에 공부를 하다 지쳤을 때 놀러가자 그러면 조이도 슬그머니 그럴까요? 라고 되물을 것 같잖아!
이러한 사고를 거친 나는 어깨를 핀 채 조이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흑. 흐윽. 그러니까. 흑. 이건.”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난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뭐. 뭐지? 왜 조이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린 거지?
조이가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라지만 이건 너무 이상하잖아.
방금 전 상황에서 울음이 터질 구석이 어디 있냐고!
혹시 나 중간에 기억이 날아갔나? 내가 모르는 무언가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건가?
아닌데? 로그 기능을 열어봐도 이상한 일은 일어나질 않았는데!?
“자. 흑. 죄송해요. 루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감정을 진정시킨 조이는 길게 숨을 내뱉더니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루시.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모든 지식을 되찾게 해드릴게요!”
되찾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머리에 지식이 들어있었던 적이 없는데 뭘 되찾아?
내가 되찾을 건 멍청함밖에 없는데?
한참을 운 탓에 충혈된 조이의 눈을 마주하던 나는 그녀의 결연함을 느끼고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뭔가. 뭔가 잘못됐어.
구체적으로 뭐가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가 잘못됐다고!
“이 부분은 이전 것부터. 아니지. 그냥 처음부터 모두 다 설명해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그렇게 오래 안 걸릴 거에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조이의 말은 그녀가 자신을 엘프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한 거짓말이었다.
어떻게 인간의 기준에서 12시간이 오래가 아닐 수 있냐!
“파트란 영애. 알른 가문의 시녀입니다. 아가씨께서 이 곳에 계십니까?”
“그래요. 루시는 여기 있어요. 무슨 일이죠?”
“이제 곧 통금 시간이 되는지라.”
“벌써 그런 시간인가요. 아직 할 게 많이 남았는데.”
미련으로 가득한 조이의 눈동자를 본 나는 다급히 책을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아쉬워하는 조이에게서 빠져나온 나는 비틀비틀거리다 결국 에린에게 안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서 내 발로 걸을 수가 없었다.
공부 싫어. 문법 싫어. 수학 싫어. 아무튼 그냥 다 싫어어어어.
<평소엔 밤을 새워가며 훈련을 거듭해도 멀쩡하던 녀석이 왜 이리 약한 체를 하는 것이냐.>
‘…차라리 악신을 상대하면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때가 더 편했어요.’
<크하핳! 그 정도로 싫으냐?!>
‘그 정도에요.’
내가 생각한 조이와의 스터디는 이런 게 아니었어.
적당히 공부하면서 중간중간에 떠들고 약간 힘들다 싶으면 중간에 나가서 단 것도 먹고 몸도 좀 움직이는 거였다고!
근데 왜 스터디의 장르가 청춘물에서 열혈 쪽으로 넘어가버린 건데! 왜 조이의 방이 기숙학원이 되어 버린 거냐고!
‘뭐 그래도 이제 끝났으니까.’
<끝났다고? 그건 네 생각이지.>
‘…네?’
<단언하마. 네 친구는 너를 놓아 줄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 그럴 리가.’
<네가 선택한 지옥이다! 루시!>
할아버지의 말은 다음 날 바로 실현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여느 때처럼 훈련장에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조이가 날 찾아온 것이다.
“루시! 그럴 시간 없어요! 시험이 얼마 안 남았다고요!”
“아니. 얼빵아. 잠.”
“어서 가요! 이미 준비 다 끝내뒀다고요!”
그렇게 나는 그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통금 시간이 올 때까지 조이의 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
“요새 통 얼굴을 보기가 힘들구나.”
마법 관련 수업에서 조이를 만난 아서가 슬며시 말을 꺼내자 조이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루시 알른과 둘이서 대체 무얼 하는 거냐.”
“공부요.”
“공부? 루시 알른. 그 녀석이 공부를 한다고? 하. 그것 참 말이 되는 이야기구나.”
아서가 생각하는 루시 알른은 천재였다.
평상시에 수업을 듣기는커녕 매일 책상에 처박혀서 자기만 하는데 수석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이.
몸을 단련하는 데에 하루 대부분을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 대부분의 학생을 압도하는 자.
앞선 1년 동안 다른 이들에게 공부하는 모습을 한 번 보여준 적이 없던 루시 알른이 다른 이와 함께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있다니.
거짓말도 그럴 듯 하게 해야지.
공작 가문의 영애라는 녀석이 왜 그리 핑계가 서투냐고 타박하려던 아서는 조이의 표정을 보고 꺼내려던 말을 삼켰다.
“진짜 공부를 하고 있는 게냐?”
“그렇대도요.”
“허. 신기하군. 그 녀석이 공부를 한단 말이지.”
책을 펼치기는 할까 의문스러웠던 녀석이 공부라.
“그런 거라면 같이 하는 게 어떠냐.”
“…네?”
“마법 쪽은 네가 더 잘 알겠지만 그 이외의 부분에선 내가 더 뛰어나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뭣보다 루시 그 녀석이 어떤 식으로 공부하는 지 확인하고 싶기도 하니. 아님 뭐냐. 그 녀석과의 오붓한 시간을 빼앗기기 싫은게냐?”
“제가 그리 귀찮은 사람처럼 보이시나요?”
“어쩌면.”
아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조이의 표정을 관찰했다.
자기 나름대로는 표정관리를 하려는 듯 하다만 내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이 녀석과 알고 지낸 지가 얼마인데.
뭔가 숨기고 있군.
“사실대로 말해라.”
“네? 뭘요?”
“그렇지 않으면 네 바보 짓을 루시 알른에게 모두 이야기해버릴 테다.”
“왕자님? 정말 무슨 말을 하시는 지 잘.”
“성녀님께도 말씀을 드려봐야겠군. 서로가 지닌 추억을 공유하자 말한다면 기꺼이 응해주실. 오. 성녀님.”
“무슨 일인가요?”
저 멀리에서 페이비가 모습을 드러내자 조이의 눈동자가 파들파들 떨렸다.
“조이 이 녀석이 루시 알른을 독점하고 싶다고 해서요.”
“어머. 정말요?”
페이비의 어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눈은 아니었다.
루시에 관한 일이라면 이상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페이비의 표정은 너무나도 두려운 것이었다.
“안 그래도 조금 질투가 나던 참인데.”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아서의 추궁은 버텨도 페이비의 어투는 견딜 수 없었던 조이는 말끔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뭐냐.”
“뭔가요?”
“…어.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조이는 아서가 소리를 차단하는 결계를 치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런. 영애님께서.”
페이비는 조이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살짝 울먹이는 기색을 보였지만.
“흐음?”
아서는 무언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이의 생각은 크게 허황되지 않다. 작년 까지만 하더라도 항상 정상의 자리를 지키던 녀석이 갑자기 백치가 되어버렸다면 기이하게 여길 법도 하지.
그렇지만 말이다.
애초에 루시 알른이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던 사람은 아니지 않나?
자신의 재능만으로 모든 걸 해결하던 녀석이 무언갈 잊었다 하여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뭔가 말이 안 되는데?
아니 그 전에 정확하게 공부와 관련된 부분의 기억만을 가져가는 것이 가능한가?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왜 그 기억을 가져간단 말이냐. 보통 기억의 수거와 관련된 설화에선 가치 있는 기억을 택하기 마련이거늘.
그 녀석이 쓴 것 중에 특이한 게 있기는 했나? 무언가 이상한 게 있었다면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가 그리 당혹을 표하진 않았을 터인데.
의혹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것을 느끼던 아서였지만 그는 굳이 자신의 의심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루시의 희생을 굳게 믿고 있는 두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간 쓰레기 취급을 당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여태까지 주변의 여자들에 의해 갈굼을 당해왔던 아서는 제 발로 고난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조이. 제가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라도 말해 주세요. 저도 영애님의 희생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으음. 뭐. 나도 마찬가지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을 꺼내도록. 여태 루시 알른에게 받은 것이 많으니.”
“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말씀드릴게요.”
*
“이번 시험의 던전은 아카데미 던전과는 다를 겁니다! 알른 영애! 기대하시죠!”
선전포고를 하고서 떠나가는 던전학 교수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헛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지난 번 아카데미 던전을 공략할 당시 정석적인 방법이 아니라 기상천외한 방식을 택한 게 많이 거슬렸던 듯 던전학 교수는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게 누가 빈틈을 만들어 두래? 꼬우면 그런 방식이 불가능하도록 신경을 썼어야지.
하여튼 그 때의 일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던전학 교수들은 자신들의 몸과 대학원생들의 몸을 함께 갈아가며 중간고사 던전을 준비했다는 모양이다.
내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새로운 던전을 공략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
허나 나의 들뜬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하아아. 오늘도 또 조이한테 잡혀서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해야 하겠지.
진짜 싫다. 책만 봐도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아.
그럼 거절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상대가 날 괴롭히려고 하는 거라면 그랬을 거야!
지랄하건 말건 그냥 내 맘대로 했을 거라고!
그렇지만 조이의 행동은 선의로 가득 차 있잖아!
내가 살짝 불편한 티를 내면 상처받았단 티를 팍팍 내는 데 어떻게 거절을 하냐고!
또 다시 지옥으로 걸어들어가야 한단 사실에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내가 아는 얼굴은 아니네. 생김새를 보면 아카데미의 사용인 같은데.
“아줌마. 여기서 왜 시간낭비 하고 있어?”
무슨 일이냐는 질문을 꺼낸 순간 메스가키 스킬의 어휘가 자연스레 아줌마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변장하고 있을 때는 좀 신경을 써주지?”
누군가 했더니 카리아였구나. 목소리가 확 변해서 깜짝 놀랐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마. 버릇 없는 아줌마. 그래서.”
“아아아아. 됐어. 말하지마. 내가 알아서 파악할 테니까.”
알겠단 뜻에서 고갤 끄덕이자 카리아가 한숨을 내뱉은 후에 말을 이었다.
“고용주님. 지금 아카데미 내부에서 뭐 이상한 거 못 느끼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