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6
아침 일찍 방문한 루카의 집무실에는 당연하다는 듯 불이 켜져 있었다.
“알른 영애.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단정한 차림으로 차를 마시던 루카는 내 방문에도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차 한 잔 드릴까요?”
“싫~어. 추잡한 변태 교수라면 이상한 걸 넣을 것 같단 말야.”
“으음. 어지간한 건 영애께 먹히지도 않을 듯 합니다마는.”
어깨를 으쓱인 루카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는 그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시험 문제라도 유출해 드릴까요?”
“너 같은 허접이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하려면 할 수 있죠. 시험 문제를 내는 교수분들은 대부분 초임이시거든요. 권력도 능력도 애매한 분들에게서 시험 문제를 가져오는 게 뭐 어렵겠습니까.”
어?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가능한 거야? 시험문제 유출이 가능해!?
순간 저도 모르게 혹해버렸던 나는 뒤늦게 이성을 붙잡았다.
아냐.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시험 성적이 아니라 지능을 올린다는 행위 그 자체잖아.
시험 문제만이 중요했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로그와 할배에몽, 그리고 다이스 갓에게 모든 걸 걸었겠지! 시험문제 유출 같은 게 필요하겠냐!
“뭐 영애께 이런 게 필요할 리는 없겠죠.”
가볍게 웃음을 흘린 루카는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가만 내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변태 교수. 솔직하게 말해봐. 네가 하고 있는 허접한 개짓거리가 뭔지 말야.”
나는 어설프게 상대를 떠보기보다 직선적으로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찻잔을 들고 있던 루카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너무 꾸밈이 없으신 거 아닙니까?”
“개한테 어려운 말 해봐야 못 알아듣잖아? 그래서 배려해준 거야.”
루카에게 찾아오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난 고민했다. 어떻게 이 능구렁이에게서 말을 이끌어낼지에 대해서.
근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어설픈 수작을 부려봐야 나 혼자 고꾸라질 것 같더라고. 나는 이런 심리전에는 재능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들이박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내가 뭘 해도 루카는 날 해할 수 없지 않나.
“으음.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게 있긴 합니다.”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말을 잇는 루카를 가만 살핀다.
“허나 이건 던전학 교수님들과 연결해서 준비하는 것인지라 제가 말씀드리기 그렇군요.”
“그 허접들이랑 너랑 무슨 상관인데.”
“이래 뵈도 전 전투학 교수니까요. 작년의 일도 있고 하니 연관이 없진 않죠.”
루카는 어디까지나 던전학 교수들의 제안을 받아 던전 제작에 도움을 주고 있을 뿐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난 그의 말이 온전한 진실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눈에 보이는 걸. 이 화제에 깊게 파고들지 않아주길 바라는 게. 이 부분이 그의 약점이 될 거라는 것이.
“변태 교수♡ 네 옹졸한 눈에는 내가 상당한 멍청이로 보이나봐?♡”
왜 이것이 약점이 되는 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어차피 제 입으로 자연스레 불게 될 텐데 내가 왜 그런 것을 신경 쓰겠는가.
“다른 재능 앞에 겁을 느끼고 도망친 겁쟁이주제에♡” 루카가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과거를 언급하자 그의 어깨가 움찔하는 게 보인다.
“남들한테 자신의 소망을 맡길 수밖에 없는 허접쓰레기가♡”
그의 눈가에 옅게나마 힘이 들어간다.
“자길 돌봐주던 친구한테 질투를 느끼고 추하게 도망친 병신이♡”
자. 어디 한 번 지껄여봐. 루카. 네가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어떤 누구와 붙어먹고 있는지.
“왜 자기가 잘난 줄 알고 뻗대는 걸까?♡”
루카는 내 웃음소리를 귀에 담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제 표정을 관리했다. 여태 나를 상대하던 이들이 보여주었던 광경을 생각해본다면 초인적인 인내심이라 불러 마땅할 테지.
“왜 평소처럼 나불나불 안 해?♡ 내가 너무 아픈 데만 찔려서 말문이 막혀버린 거려나?♡”
허나 그래봤자다. 감정이 없는 골렘조차도 내 도발의 앞에서는 시선이 끌리는데 분명한 감정이 존재하는 루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자존심을 다 팔아먹는 지 오래라 화가 안 나는 걸 수도 있겠네♡ 푸하핳♡ 이거다!♡ 찌질하고♡ 추잡한♡ 변태 교수라면 이걸 거야!♡”
루카의 손이 감춰진 책상 아래에서 가죽 장갑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화났어?♡ 나 때리고 싶어?♡ 건방진 꼬맹이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어?♡”
“…영애.”
“상상 속에서 잔뜩 해♡ 현실에서는 절대 못 할 테니까♡ 그렇잖아?♡ 내가 아니라면 네 병신 같은 꿈은 평~생 꿈으로 남을 텐데 어떻게 날♡…”
열이 오른 루카가 손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그 과정에서 이 녀석이 숨겨둔 무언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쉴 새 없이 웃음을 흘리던 그 순간.
갑작스레 내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공포나 두려움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그보다는 좀 더 본능적인 무언가. 그래. 이건 굳이 따지자면 직감이라고 불러야 하겠지.
“왜 갑자기 말을 멈추십니까?”
눈웃음이 지어진 루카의 얼굴을 마주하며 생각한다. 나는 방금 전 루카의 콤플렉스를 찌르려고 했다.
평생 발악을 해봐야 네가 네 친구 아래를 기어 다닌단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말해 루카의 이성을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헌데 그 순간 나의 직감이 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고하며 비명을 질렀다.
“영애?”
메스가키 스킬의 고양감에 의해 들떴던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루카를 살핀다.
그러자 까마귀 여신이 주었던 미적감각이 내게 이런저런 위화감을 이야기해주었다.
루카의 주변에 이상한 부분이 한 둘은 아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나 이상하다 말하는 건 책상 아래에 감춰진 루카의 손이었다.
가죽 장갑에 의하여 가려진 맹세가 있는 부분을 본 순간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단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연금술사의 던전을 공략할 때보다도 더 강렬한 감정을 마주한 나는 모니터 너머에서 보았던 맹세에 관한 설정을 떠올렸다.
맹세를 어긴 자는 뒷세계의 쓰레기들에게도 혐오 당한다.
이전의 나는 그것이 관습이나 풍토 같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 혐오에는 실체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재미없어.”
미간을 찌푸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내 등을 바라보는 루카의 시선을 외면한 채 그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서 무작정 발을 움직였다. 내 몸 전체에 내리 앉은 본능의 경고가 사라질 때까지.
“허억. 헉.”
루카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에서 멀리 벗어난 나는 벽을 붙잡고 거칠어진 숨을 달랬다.
<루시. 괜찮으냐?>
‘…일단은요.’
방금 전에 그 감각은 도대체 뭐야?
그건 여태까지 내가 느껴왔던 감각과는 전혀 달랐어.
그건 좀 더.
혹시.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나는 로그 기능을 열어서 위로 쭉 올려 보았다.
어젯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정확하게는 훈련 기능 속에서 할아버지와 구르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무예의 신이 당신에게 권능을 내립니다.]
[무예의 신이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일말의 불쾌함이 남아 있습니다.]
위기감지.
어젯밤.
무예의 신은 내가 모르는 새에 자신의 권능을 내렸다. 내가 자신의 개입을 모르길 바라는 것처럼.
나와 대화를 나누고자 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던 무예의 신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추측이 간다.
간슈. 그 멍청이. 내가 부탁한 건 스킬을 달라는 거였지 다른 신의 적의를 사게 해달라는 게 아니었다고!
이래서 도서관에 처박혀 사는 히키코모리가 안 되는 거야!
다음에 만나면 화가 너무 나서 질질 짤 때까지 놀려주겠노라 마음을 먹은 난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으로 당장의 감정을 떨쳐냈다.
‘할아버지. 방금 전에 루카한테서 살의가 느껴졌나요?’
<그랬다면 내가 너에게 목소리를 냈겠지.>
‘…네? 그치만.’
<그 녀석은 분명 분노했지만 자신의 감정과는 별개로 널 가늠하고 있었다.>
위기감각이 무어라 할 이유는 하나 밖에 없다 생각하던 나였지만 할아버지의 말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할아버지가 이런 데서 착각할 것 같진 않아.
그럼 뭐지? 왜 루카에게서 위험을 느낀 거지?
머릿속이 혼잡해지는 것을 느낀 나는 푹 한숨을 내쉬고서 첨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의심.]
내 앞에 떠오른 푸른 창은 한 마디 단어로 방금 전의 상황을 설명했다.
루카는 내가 자신이 벌인 일을 눈치 챘다고 의심했어.
그게 확신으로 바뀌려하니까 내가 뭔가를 하기 전에 계획을 펼치려 한 거야.
그리고 그 계획은 내가 감당하기에 어려운 종류였겠지. 나의 예상을 긍정하듯 알림음과 함께 내 앞에 푸른색의 창이 떠오른다.
[루카의 시련.]
[별이 되고자 했으나 지상에 떨어지고 만 자는 다른 별에 그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자신의 흔적을 새기고자 합니다. 그 자의 계획을 뛰어넘어 당신이 그 누구보다 밝게 빛나는 별이라는 걸 증명하십시오.]
[보상 : ???]
[실패시 : GAME OVER]
…하. 젠장. 평소 같았으면 허접 주신한테 왜 미리 설명 안 해줬냐고 따질 텐데 이번에는 그러질 못하겠네.
허접 주신은 루카가 개짓거리를 할 거란 신호를 미리 줬으니까.
그걸 보고서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은 건 나야. 설마 루카가 맹세를 어겨가면서까지 미친 짓을 하리라 생각하지 않은 건 나라고.
입술을 꾹 깨문 채 벽을 후려친 나는 내 앞에서 메시지를 지워버렸다.
어쩌겠냐. 내가 멍청한 짓거리를 해버린 걸.
길게 숨을 내쉰 나는 다시금 발을 움직였다.
처음에 루카는 자신이 던전을 만드는 일에 협력하고 있다고 했어.
그게 거짓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벌인다면 그 쪽을 건드리는 게 제일 편하긴 할 테지.
루카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꽤 시간이 흐른 듯 아카데미 내에 여러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 눈 앞에 닥친 중간고사를 가장 큰 위기라 여기는 이들이 말이다.
그들의 모습을 살피던 나는 문득 루카가 정말 나 하나만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미친 놈이 진정 자기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무언가 계획을 세웠다면. 그 대상이 나 하나일 이유는 없잖아.
입술을 잘근거리던 나는 어느새 목표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아카데미 시험의 던전이 만들어지는 곳. 후일 시험 기간이 찾아오면 여러 학생들의 절망이 자리할 방. 그 곳에 발을 디딘 나는 벽 근처에 자리를 잡고 [역사 확인] 스킬을 사용했다.
[?@$입@%!%!5건]
목록에 적혀 있는 글자는 누군가 개입한 듯 알아볼 수 없는 형태가 되어 있었다.
신의 권능에 대응할 수 있는 게 같은 신 뿐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하. 씹. 어쩐지 아카데미 내에 공허의 추종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난 다 했더니.
루카 이 미친 새끼랑 연관되어 있었던 거냐.
[역사 확인] 스킬을 멈춤에 따라 현기증이 몰려온다.
힘을 잃고 비틀거리던 나는 벽을 붙잡고서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이 쪽에도 생각이 있어.
루카. 이 개자식아.
네가 준비한 무대의 막은 네 악몽이 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