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8
“허접 후배님. 요즘 일은 잘 되어 가십니까?”
“뭐 그냥 평소처럼 힘들죠.”
루카는 갑작스러운 칼의 방문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늘 아침 재미없다는 말과 함께 루시가 떠나갔을 무렵부터 이를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영애께서는 내가 무얼 준비하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눈치를 채셨겠지.
그래서 루카는 루시와 대화를 나눌 당시 다소 계획이 어그러지더라도 즉석에서 일을 벌여야하는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만약 루시가 선전포고를 하러 온 것이라면 루카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어울려줘야 했으니까.
허나 루카의 걱정과는 달리 루시는 그의 신경을 긁어놓았을 뿐 그 이상 무어라 하지 않고 떠나갔다.
그를 본 루카는 어느 정도 의심은 하고 있지만 확신은 못 한 단계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만약 루시가 모든 걸 알았다면 악신과 연관된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니.
주신의 사랑을 받는 그녀가 이를 내버려 둘 리 없잖은가.
그래서 루카도 당분간은 유예를 두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계획된 것이 펼쳐질 때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아무리 알른 영애라 하여도 이 일주일 안에 완벽한 대처를 하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 기꺼이 준비할 시간을 드려야지.
영애께서 최선을 다할수록 이 계획이 끝이 아름다워 질 테니.
“허접 후배님 같은 고참이 힘들다 그러시면 전 어떡합니까?”
“칼 교수님께서는 알른 가문을 뒤에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평민 출신인 저는 아무것도 없으니 시키면 해야 한답니다.”
“하하. 저한테도 귀가 있답니다. 후배님. 뒷배라면 후배님도 만만찮지 않습니다.”
“이런. 너무 엄살을 부렸나요?”
어차피 계획은 이제 궤도가 올랐다. 칼 교수가 나를 옆에서 감시하고 있다 한들 문제가 생기진 않아.
다만 한 가지 거슬리는 것은 계획이 펼쳐지는 당일에 칼 교수를 어떻게 떨쳐내야 하는 가의 문제다.
“그치만 크게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지난 일 년. 칼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루카는 그의 실력이 단순한 기사 수준이 아님을 알았다.
빛나는 재능들이 모이는 알른 기사단에서도 유망주 취급을 받는 그는 자신이 왜 그리 여겨지는 지를 온 몸으로 보여 왔다.
루카의 눈으로 보기에 칼은 알른 기사단이 아닌 다른 기사단에 들어갔다면 이미 중책을 맡았을 법한 실력자였다.
여러 수단을 이용한다면 쓰러트릴 수야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소모가 생기겠지.
그래서는 곤란해.
나의 모든 건 별에 흔적을 남기는 데에 바쳐야 한다.
어중간한 발광석에 손이 내밀어져선 안 된다.
“평민이 고귀하신 1왕비님의 세력에서 뭐 대단한 걸 할 수 있겠습니까.”
고민을 좀 해봐야겠군.
애매한 재능을 다른 어중간한 놈에게 넘기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해.
*
예술 교단의 사도. 프레테는 의자에 앉아 팔뚝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는데.
하루라도 빨리 영애를 데리고 오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영애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준비해서 일생의 걸작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여신께서도 극찬을 하실 작품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프레테님. 너무 귀찮다는 티를 내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이런 식의 대우를 받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네? 제가 뭔가를 했습니까? 전 검성님의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었는데요.”
“정말 제 감각을 속일 수 있다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시죠?”
“…죄송합니다. 검성님. 최근에 몰두하고 있는 일이 있는지라.”
현직 검성이자 대륙 최초의 모험가 출신 검성인 자. 유덴은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예술 교단에서 만드는 장신구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요. 그 장신구가 얼마나 유명한데요. 돈 있는 상인들이라면 누구나 구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검성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았음에도 어느 한 나라의 명예 귀족이 되기보다 모험가로서 살아가는 것을 택한 유덴은 최근에도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있다.
검성의 이름이 워낙 유명한지라 정체를 숨긴 채 방랑을 하는 그녀는 보통 어느 행상에 호위로 참여해 파도처럼 흘러가는 중이다.
그렇기에 여러 상인들과 대화 할 일이 많은 유벤이 장신구에 대해 아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야기로는 들었습니다만 그렇게나 수요가 많습니까?”
“프레테님도 오래 방랑하셨으니까 아시잖아요. 상인들이 행운에 관련된 거에 환장한단 거.”
“음. 그런 경향이 있긴 하죠.”
“경향은 무슨. 운을 가져다준다면 오크 똥이라도 먹을 작자들이 상인이잖아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행운을 주는 데다 외형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는 것만으로 웃음을 짓게 하는 것이 예술 교단의 장신구다.
어찌 이런 것이 인기가 없을 수 있겠는가.
“…검성님. 제발.”
그리 이야기를 하며 웃음을 흘리는 검성의 모습에 프레테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이래서 현직 검성에 대한 시를 쓰기가 어려운 거다. 이 분이 평소에 하는 언행이 너무도 거친 탓에 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할 수가 없으니까.
“아. 제발 잔소리 하지 마세요. 그런 게 싫어서 작위도 포기한 사람한테 뭘 기대해요.”
“하아아.”
교양을 밑바닥에 처박은 모습에 한숨을 내뱉은 프레테는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뭐가 됐든 빨리 보내자는 생각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왜 잔소리 들을 걸 알면서도 여기 오셨습니까.”
“방금 이야기 한 장신구 때문에요.”
“…당신께서 그 장신구를 구하러 오셨다고요? 왜요?”
프레테는 유덴의 이야기를 듣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퍼뜩 치켜들었다.
프레테가 아는 유덴이라는 사람은 장신구 같은 것에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스스로를 왜 꾸밀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아름다움의 일말도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
괜찮은 장신구를 만들어줘도 거슬린다면서 땅에 내던지는 작자가.
먼저 찾아와서 장신구를 청한다고!?
“영애께서 지닌 아름다움은 당신 같은 막눈에게도 닿을 정도였군요. 실로 감동스러운 일입니다.”
“…뭐요? 무슨 병신 같은 소릴.”
“부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알른 영애의 아름다움에 감복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니까요. 제가 모시는 여신께서도.”
“아니. 아니. 저 진짜 장신구고 아름다움이 뭐고 아무 관심도 없거든요? 제가 정말 장신구에 관심 있었으면 그냥 적당한 놈 멱살 잡고 가져왔겠죠. 뭐 하러 여기까지 와요?”
“…당신. 정말 장신구 속 영애를 보고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요?”
“그런데요?”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아니. 저기요. 프레테님. 지금 속내가 완전 다 튀어나왔거든요? 표정관리도 안 되고 계시거든요?”
어지간하면 웃음기를 잃지 않는 프레테가 정색을 하는 모습에 유덴도 당황해서 목소리를 냈다.
뒤늦게서야 자신의 무례를 깨닫고 헛기침을 한 프레테는 애써 감정을 다독인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럼 여기에 온 목적이 장신구와 무슨 관계입니까?”
“거기에 그려지신 분이 알른 가문의 영애님이시잖아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는 소리는 프레테님과.”
“프레테님!”
두 사람의 대화가 이루어지던 도중 갑작스레 문이 벌컥 열리며 교단의 사제가 나타났다.
다급하게 달려온 듯 거친 숨을 내뱉던 그는 검성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급히 고갤 숙였다.
“죄송합니다! 검성님! 실례를!”
“됐어요.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허나.”
“그보다 급한일 있는 거잖아요. 말해요.”
“…배려에 감사하며 실례를 무릅쓰겠습니다. 프레테님. 알른 가문의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영애께서 오셨단 말입니까!?”
“알른 가문의 영애가 이 곳에 왔다고요!?”
*
일단 검성을 만나겠다 생각한 나는 즉시 카리아에게 찾아가서 그녀의 행방에 대해서 물었다.
이리저리 방황을 하는 것이 검성이란 사람이긴 하지만 그 정도 되는 거물이면 자연스레 그녀의 행방에 대한 정보가 모이기 마련.
내 예상대로 카리아는 검성이 어디에 있는지 즉각적으로 내게 답을 해줬다.
“그 사람 지금 예술 교단에 있는데?”
“…뭐?”
허나 그 대답은 내 예상과 저만치 떨어진 대답이었다. 모험가로써 생활하면서 험악한 곳만 찾아다니는 인간이 왜 예술 교단에 있어? 거기는 검성이 발을 옮길만한 곳이 아닌데?
내가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해서 현실이 달라지진 않았다.
검성은 분명 예술 교단에 있었고 심지어는 프레테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는 게 카리아의 이야기였다.
미친. 그 변태들이 있는 곳에 또 가야 한다고?
내가 지나가는 곳마다 무릎을 꿇고 질질 짜면서 기도를 올리는 미친 새끼들이 있는 곳에 진짜 가야하는 거야!?
<따지고 본다면 잘 된 일 아니더냐? 예술 교단의 사도와 친분이 있다면 설득하기가 더 쉬워질 텐데?>
‘…그건 저도 아는데요. 입장을 바꿔보세요. 할아버지. 매도를 해주면 축언을 받았다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야하는 거라고요! 할아버지라면 견딜 수 있겠어요!?’
<뭐 어떠냐. 나 때에도 비슷한 건 있었다.>
‘비슷한 게 있었다고요?’
<우린 암울한 세상의 영웅들이었으니까.>
가는 곳마다 축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자신들이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나였지만 딱히 공감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분들께서 제발 밟아달라면서 앞에 머리를 박으셨나요?’
<…어어.>
‘영감을 얻기 위해 침을 뱉어달라며 비셨나요?’
<음.>
‘아니죠?’
<…>
‘그럼 공감하는 척 하지 말아주세요. 저 진짜 거기 싫단 말이에요.’
<미안하구나.>
할아버지와 투닥대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한 나는 순간이동의 진을 타고서 예술 교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교단에 발을 들인 순간 일어난 일은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신의 현신께서 또 다시 찾아오셨다며 화색을 짓는 이들. 바닥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는 이들.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우는 이들.
그 지옥 같은 광경을 보며 진심 어린 경멸을 내비치던 나는 저 멀리에서 날 듯이 달려오는 이의 얼굴을 보고서 눈을 끔뻑거렸다.
낡은 티가 나는 로브. 모험가들이 흔히 입는 가죽 갑옷. 다른 장비들에 비해 다소 과하다 싶을 만큼 눈에 띄는 검.
저 인상착의를 지닌 사람은 분명 검성일 텐데 그 인간이 왜 나한테 달려오고 있는 거야?
…설마 저 인간도 변태인 건가?
얼빠여우나 변태사도 같은 이상취향인 거야!?
뭔가 변수가 일어나서 멀쩡했던 인간이 이상해 진 거냐고!
눈을 시퍼렇게 뜬 검성의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으려니 검성이 내 앞에 도착했다.
흑요석을 닮은 검은 눈동자로 가만 날 바라보던 그녀는 대뜸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목에 핏줄을 세웠다.
“알른 가문의 영애시여! 아버님을 주십… 아니! 알른 경을 뵐 기회를 만들어 주소서! 제바아아아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