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9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내가 무슨 환청을 들은 건가?
그래. 분명 그런 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검성이라는 사람이 아버님을 주십시오! 같은 헛소리를 할 리가.
“혹여 오해하실까봐 미리 이야기를 하자면 결코 농담 삼아서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는 진지하게 베네딕 알른 경을 뵙고자 합니다. 그 분의 흣. 흐헷. 헷.”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건지는 몰라도 검성의 입꼬리는 얼빠여우를 연상케 할 정도로 느슨하게 늘어졌다.
“…징그러워.”
검성의 행동에서 익숙한 혐오감을 느낀 나는 무심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주변에서 하나 둘 사람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라도 그냥 도망칠까? 일단 검성만 데리고. 아니 이 인간도 문제의 근원 중 하나잖아.
답이 없네. 주신되는 녀석부터 답이 없으니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 같이 이 꼴인 걸까.
전향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으려니 검성의 뒤를 이어 변태 사도가 등장했다.
변태 사도는 다급히 내 쪽으로 달려오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자신의 손으로 코를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새 나오는 걸 보면 코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거겠지.
생긴 것만큼은 괜찮아서 겉으로 보기엔 병약한 사람 같은 느낌이 나는데 실상은 여자애한테 허억허억대는 로리콘 변태라니.
정말 끔찍하다. 하루 빨리 수갑을 채워서 감옥에 처박아야 해.
“…실례 했습니다. 알른 영애. 이전보다도 더 아름다워지신 듯 하여 놀라버렸습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너무 아기자기하여 정신을 잃을 뻔 했네요.”
“그냥 정신을 잃고 나자빠지지 그랬어? 머리를 땅에 박아서 뒈져버리는 게 세상에 더 도움이 됐을 텐데.”
“하하. 그럴 수는 없지요. 아직 제겐 영애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널리 알린단 사명이 있으니까요.”
“진짜 하루 빨리 뒈져버렸으면 좋겠다.”
내 폭언에도 불구하고 변태 사도는 싱글거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진짜 꼴 받네. 대체 뭘 해야 이 녀석에게 여태 겪었던 걸 되갚아줄 수 있을까. 여신을 욕해도 나라면 그래도 된다며 웃어넘기는 녀석이라 진짜 답이 안 나와.
“그래서 이 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혹여 저번 이야기 때문에 찾아오신 거라면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인지라.”
“걱정 마. 너 같은 귀축 변태한테는 요만큼의 관심도 없으니까.”
“그러면.”
“여기 있는 이 오크녀를 찾아온 거야.”
오크녀라는 말에 검성이 어깨를 움찔한다.
“저. 알른 영애. 제가 오크녀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검성이 발끈해서 꺼낸 말처럼 그녀의 외모는 꽤 괜찮은 축에 속한다. 게임 속 최강자급 인물 중 하나이자 개인스토리까지 있는 여자NPC인데 외견이 괴악할 리 없잖은가.
“바깥이 아니라 안에 든 게 오크 같다는 이야기야. 인간의 사회에 들어와선 안 될 마물 같은 인간아.”
“…어.”
“말을 꺼내자마자 발끈한 걸 보니까 찔리는 구석이 있나봐? 푸하핳. 그러게 머리를 장식으로 쓸 거면 좀 예쁜 걸 달고 다니지. 왜 속도 겉도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거람?”
내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검성의 얼굴이 점점 더 벌겋게 물든다. 도발이 척척 먹혀 들어가고 있다는 걸 증빙하듯이.
사실은 이러면 안 된다. 나는 검성에게 협력을 청해야하니 그녀를 화나게 만들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를 낼 때마다 말로 그녀를 찌르고 싶단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뒤따라오길 잘했네. 하마터면 난리가 날 뻔 했잖아.”
검성이 툭 튀어나오길 바라며 어디를 찔러넣을까를 고민하던 중 뒤 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레 등장한 카리아는 다급히 나와 검성의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오랜만. 이라고 해도 기억 못 하려나. 얼굴 본 게 거의 십 몇 년 전 일이니까?”
“아뇨. 기억해요. 카리아님. 당신은 잊기 쉬운 사람은 아니니까요.”
“이야. 뒷세계의 잔챙이를 검성님께서 기억해 주실 줄이야. 영광이네.”
검성은 눈에 띌 정도로 카리아를 꺼림칙해 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카리아는 예전의 힘을 대부분 잃어버린 상태. 그러니 검성급의 실력자라면 카리아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거늘 검성은 카리아의 웃음을 보고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긴 세월 숨어계시다 얼마 전에 복귀하셨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뵙게 될 줄은.”
“걱정 마. 난 검성님한테 아무 용건 없으니까. 고용주님이랑 검성님이랑 가만 내버려 두면 뭔가 터질 것 같아서 다급히 따라온 거거든.”
카리아의 말은 맥락에서 벗어난 부분이 많았지만 검성은 그를 듣고서 당혹스러워하는 대신 입술을 곱씹었다.
“대체 어떻게 생각을 읽은 겁니까. 표정과 행동을 다 감추었는데.”
“하하. 그건 못 알려주지. 예전 같은 힘도 인맥도 없는데 영업비밀까지 풀 순 없잖아?”
“…”
“내가 정 껄끄러우면 가만히 고용주님의 이야기나 들어줘. 그래야 우리가 빨리 헤어질 수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알른 영애와의 대화는 저도 바라는 바였으니. 기꺼이 응하죠.”
검성이 고갤 끄덕이기 무섭게 카리아가 슬며시 변태 사도 쪽으로 고갤 돌린다.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던 변태 사도는 뒤늦게 카리아의 눈짓을 확인하고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응접실로 안내해드리면 되겠습니까?”
*
검성 유덴은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는 여자아이를 마주했다.
턱을 괸 채 유덴을 노려보고 있는 그 여자아이는 누구라도 경탄을 할만큼 아름다웠다.
오죽했으면 여자아이를 처음 보았을 당시 유덴이 예술 교단의 사도조차도 저 아름다움을 완벽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을까.
허나 그 경탄을 지우고 나서 다시금 여자아이를 바라보면 다른 것들이 보인다.
자신의 일생을 무에 바친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훈장이 말이다.
괴물의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나. 그 괴물의 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재능을 지닌 자인가.
이전에 라샤 그 녀석이 했던 평가대로네. 그 미친 년이 성장할 때가 기대된다면서 군침을 흘리던 것도 이해가 가.
당장 나만 해도 하나만 아니었다면 검을 배워 볼 생각 없냐고 물어봤을 것 같으니까.
“야. 오크녀,”
…그래. 이 빌어먹을 놈의 어투만 아니었다면 말야.
신경을 툭툭 건드리는 어투에 미간을 구긴 유덴이었지만 그녀는 옆에 있는 카리아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애써 짜증을 억눌렀다.
“뭐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 물어볼 게 있어. 너처럼 뇌가 텅텅 빈 오크가 우리 바보 파파를 어떻게 알아?”
“베네딕 알른 경 같은 뛰어난 무인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진짜 머리 장식으로 달고 다녀? 그런 의미로 물어본 게 아니란 걸 이해 못 하는 거야?”
루시의 표독스러운 어투에 유덴이 입을 다물자 카리아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그건 내가 설명해줄 수 있어.”
“아줌마가?”
“그럼. 이건 내가 한창.”
“카리아님. 제발 멈춰 주십시오. 제 입으로 말하겠습니다.”
활동을 그만 둔 지가 십 년이 훨씬 넘었는데 저 빌어먹을 음습한 성격은 여전하네.
저래서 저 사람이 껄끄러운 거야. 자기 속은 항상 감추고 사는데 다른 사람 속은 마구잡이로 헤집어대니까.
긴 한숨을 내쉰 유덴은 목을 뒤로 젖혀서 천장을 바라봤다.
“알른 영애. 미리 결론부터 말해두자면 저와 베네딕 알른 경의 관계는 일방적인 동경에 가까운 것입니다.”
유덴이 처음부터 검성이었던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과거의 그녀는 검성이라는 자리에서 한없이 먼 존재였다. 제대로 된 스승 하나 두지 못한 채 자신의 재능만으로 검의 길을 개척하던 인간이 어찌 검성이 될 수 있겠는가.
유덴이 경이로운 재능을 타고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여 여태까지 쌓인 검의 역사를 홀로 지나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고, 유덴
본인 또한 굳이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으니, 본래라면 그녀는 그저 그런 수준의 강자로 남게 되었으리라.
이런 유덴이 변화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우연히 마주했던 한 괴물이었다.
용병으로 고용되어 전장에 서게 되었던 그녀는 멀찍이에서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이 날뛰는 걸 보았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만한 크기의 대검을 들고 날뛰는 괴물의 검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솔직히 말해 유덴이 추구하는 검의 방향성과는 큰 차이가 존재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덴은 괴물의 검에 압도되고 말았다.
내가 저 앞에 선다면 버틸 수 있을까? 저 검을 받아낼 수 있을까? 저 검을 넘어설 수 있을까?
유덴이 지닌 재능은 그녀의 의문에 즉각적으로 답을 해 주었다.
불가능하다고.
용병 나부랭이에 불과한 그녀는 저 검을 넘어설 수 없다고.
압도적인 무력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눈으로 체험한 그녀는 용병 일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이 여태까지 배워 둔 돈으로 여러 검술 도장을 돌아다녔다.
자신이 괴물의 검 앞에 서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을 때까지.
검을 배우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또 다른 곳에서 검을 배우고.
모험가로써 일을 하고.
계속. 계속. 계속.
그러다 괴물의 검 앞에 서는 것은 물론이고 그와 맞붙어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유덴은 검성이라 불리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럼 이제 바보 파파한테 찾아가면 되잖아. 뇌가 있는 지 의심스러운 멍청한 여자라도 검성은 검성이니까 바보 파파가 만나줄 텐데?”
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시가 의아하다는 티를 내자 유덴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도저히 자신의 입으로는 말을 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에 루시의 눈가가 가늘어진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바보 파파를 먼저 찾아가는 게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핑계거리만 찾고 있는 건 아니지? 푸하핳.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네. 뇌가 텅텅 빈 오크녀가 그런 소녀 같은 생각을 할 리가.”
“제가 좀 수줍어 하는 게 뭐 나쁩니까!? 동경의 대상이라고요! 베네딕 경은!”
얼굴이 시뻘개진 유덴이 소리를 내지르자 눈을 끔뻑거리던 루시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진심으로 우습다는 듯 다리를 저어가며 꺄르륵거리는 루시의 모습에 유덴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지만 루시는 웃음을 멈출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 눈물마저도 찔끔 흘린 루시는 자신의 눈가를 닦아내며 웃음기 서린 목소리를 냈다.
“미리 말해두자면 헛된 망상은 안 하는 편이 나을 거야. 바보 파파의 취향은 너 같은 오크녀랑은 하아아안참 멀리 떨어져 있거든.”
“저도 아는 사실 굳이 지적해 주셔서 참 감사하네요..”
“뭐. 포기하란 말은 안 할게. 기대하다 배신당해서 질질짜는 꼴을 보고 싶긴 하니까.”
“…조언. 귀에 새겨두도록 하죠.”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하루 지나면 다 잊어버릴 텐데 뭐 하러 그래?”
“제 지능이 그리 낮진 않습니다만.”
“그래애애애?”
“예. 그렇습니다.”
“그럼 진짜 제대로 된 조언 해줄게. 오크녀. 한심하고 멍청한데다 여성스러움이라곤 조금도 없는 널 포용해줄 멍청이를 찾아봐. 으음. 예를 들자면. 변태 교수 같은 쓰레기 말야.”
“변태교수는 또 누굽니까?”
루시의 입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명칭에 유덴의 의문을 표하자 카리아가 루시를 대신해 거기에 대답했다.
“루카라는 이름의 교수야. 검성님도 잘 아는 사람일 걸?”
“제가 아는 그 루카 말하는 겁니까?”
“응. 맞아.”
카리아가 고갤 끄덕이자 유덴이 헛웃음을 흘린다.
“하. 그 녀석도 고생이 많군요. 이런 괴악한 성격의 귀족들을 상대로 수업을 해야한다니. 저는 절대로 못할 것 같습니다.”
루카를 언급하는 그녀의 어투는 그를 향한 친애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