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2
소울 아카데미의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날. 아카데미의 아침은 해가 아직 떠오르기 전부터 시작된다.
개인실에서 밤을 새워 공부를 하겠노라고 했지만 한 것이라고는 자신의 침으로 친구의 필기를 더럽힌 것밖에 없는 누군가는 쓰레기 같은 자신을 한탄했고.
평소에도 밤을 새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던 3학년들은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모양새로 흐느적거렸으며.
나름 준비를 잘했다 자부하는 이들 중에서도 손을 벌벌 떨며 긴장한 티를 내는 자들도 많았다.
“파트란 영애.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그 긴장한 사람 중 하나인 조이는 럼리 가문의 영애가 물음을 던지고 나서야 자신이 손을 떤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번 시험을 준비하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긴장을 해버린 모양이네요.”
“파트란 영애께서도 긴장을 하실 때가 있군요?”
“후후. 럼리 영애. 공작 가문의 영애라 하여 사람이 아닌 건 아니랍니다.”
평소에도 조이는 무언가 중요한 일을 앞에 뒀을 때 심장박동 소리가 몸을 가득 채울 정도로 긴장을 하곤 했다.
다만 그 긴장을 마법을 통해 인위적으로 가렸기에 모두들 알지 못할 뿐.
바꾸어 말하자면 지금 조이는 자신의 긴장을 감추어야한단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굳어있단 것이기도 했다.
루시의 말이 사실이라면 머잖아 공허의 추종자들이 무언가를 벌일 거야.
이 아카데미 내부에 혼란이 찾아올 거라고. 영애들이 모인 자리에서 홀로 미래의 위협을 예상하고 있는 조이는 다른 이들에게 자세히 말을 하지 못함을 답답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을 지켜야한단 생각에 입가에 힘을 더했다.
생각해보면 이제 다른 영애들에게 슬며시 말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오늘 일이 벌어지는데 슬그머니 언질만 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어차피 조금 있으면 모두 다 알게 될 거 아냐.
“그래도 아카데미가 무너지길 바랄 정도로 긴장을 한 건 아니랍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어머나.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는 무슨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는데요.”
“저도요. 하루만 더 준비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어요.”
조이가 농담인냥 어미를 떼자 자연스럽게 다른 영애들이 대화를 잇는다.
귀족 영애들간의 계급사회가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대화의 현장.
그 속에서 럼리 영애가 옅은 웃음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잔인한 이야기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요. 이 곳은 소울 아카데미인걸요. 자그마한 사고는 있을 수 있지만 중간고사 기간이 뒤로 밀릴 정도의 큰 일? 그걸 교수님들이 가만 내버려 둘까요?”
소울 아카데미 전체를 습격한다는 것은 다소 허황된 이야기다.
이 곳에 자리한 교수진들은 모두 다 현역에서 인정을 받고서 이 곳에 온 사람들.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라 한들 그 괴물 같은 교수들이 차곡차곡 모여 있는 아카데미를 무너트릴 만큼 거대한 세력이 어디 흔하겠는가.
설령 그런 세력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왕국 한 가운데에 있는 이 곳까지 파고들 순 없다.
그런 세력이 움직이는 걸 왕국에서 가만 바라볼 리가 있나.
“더욱이 지금은 1왕비님과 2왕비님의 시선이 쏠린 상황이니. 어느 정신이 이상한 세력이 이 곳을 건드린다 한들 금방 세력 채로 지워지지 않을까요?”
“럼리 영애. 너무 진지하세요.”
“그러게요. 최근 어울리는 평민 남자와 닮아 가시는 것 같아요.”
“…잠이 부족해서 너무 진지해졌나봐요.”
주변에 머무는 백작 가의 영애들이 서로 기싸움을 하는 동안 조이는 방금 전 럼리 영애가 한 말을 되새겨보았다. 그녀의 말은 옳다.
아카데미를 습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번처럼 짧은 사고는 일어날 수 있어도 아카데미의 일정이 완벽히 정지될 만큼 커다란 재앙이 일어나는 건 현실적으로 버거워.
…그렇지만 루시는 분명 말했어. 아카데미에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날 거라고. 거기에 대비해야만 한다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무슨 일이 펼쳐지기에 루시가 경고를 할 만큼 커다란 일이 일어나는 거야?
공허의 추종자들은 도대체 뭘 준비한 걸까.
*
루카는 문 바깥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칼의 기척을 느꼈다.
기사라는 작자가 어찌 저리 암행을 잘하는 지. 루카가 악신의 권능을 빌려 설치해 둔 마법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칼의 존재를 놓쳤을 것이다.
뭐. 물론 그런다 하여 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기 전까지 루카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었으니까.
‘모두들. 준비가 되셨습니까?’
루카에게 행운으로 다가왔던 것은 이번 년도가 시작되기 직전 일어난 1왕비와 2왕비 간의 세력전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세력을 아카데미 교수로 꽂아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그 사투는 외부의 인원이 안으로 들어오기에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었지.
여기에 더해서 한 가지 더 좋았던 것은 기존의 아카데미 교수들이 많이 빠져나갔다는 점이다.
오랜 기간 소울 아카데미의 교수로 활동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괴물 같은 작자들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온갖 귀족들은 물론이고 왕족들까지 들어오는 이 아카데미에서 살아남는 게 가능하겠는가.
헌데 그 괴물 같은 교수들은 지난 번 왕비들 사이의 권력 싸움에 항의를 표하기 위해 다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학장이 죽어라고 발품을 팔아가며 그 자리를 어떻게든 채우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 여러모로 모자라진 것은 분명.
아카데미에 오랜 기간 재직했던 루카는 기존의 교수들과 새로운 교수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혼란을 중재하는 체 하며 그 사이사이에 혼돈의 씨앗을 심어두었다.
덕분에 지금 교수들 중에는 악신의 추종자로 대체된 이들이 여럿 존재하며 심각한 곳은 교수는 물론이고 그 아래에 머무는 대학원생들까지도 대체된 경우도 있지.
이토록 좋은 상황을 만들어낸 루카이지만 그래도 아카데미를 전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몇몇 괴물이 나갔어도 여전히 이 곳에는 괴물들이 남아있고.
현재 아카데미의 학생들 중에서도 위협적인 이들이 몇 존재 하는데다가.
길게 시간을 끌면 왕국의 여러 괴물들과 주신 교회의 사냥개들이 친히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공허의 추종자들을 단죄하러 올 테니 말이다.
이러한 사안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루카는 정면에서 일을 벌이는 대신 다른 방향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아카데미에서 오랜 시간 재직한 루카의 지식과 공허의 사도가 지닌 권능이 합쳐졌기에 할 수 있는 수작질을 말이다.
‘슬슬 시작하죠.’
*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머리를 만지는 에린을 가만 지켜봤다.
변태 사도를 만났던 것이 에린에게 큰 도움이 된 듯 에린은 날이 지날 때마다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나 하나를 꾸미는 데에 한정한다면 변태 사도에 비견될 정도로. 어느새 완성된 머리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접 에린.”
“예. 아가씨.”
“오늘은 이 방에 처박혀 있어.”
“…네?”
옆에 있는 얼빠여우에게 눈짓을 하자 얼빠여우가 에린의 어깨 위로 폴짝 뛰어 올라선 자신의 연기로 에린을 홀렸다.
에린은 얼빠여우의 권능에 저항하려고 했지만 비틀거리다가 결국 침대 위에 나자빠졌다.
“여신께서 이 아이를 아끼긴 하나 보구나. 애를 먹었어.”
“네 권능이 허접한 건 아니고?”
“허. 아무리 분체여도 본녀는 본녀다. 여신의 힘이 없었다면 이깟 아이 하나 재우는 데에 고생을 할까.”
코웃음을 치는 얼빠여우를 보던 난 그녀에게 에린을 잘 부탁한다 이야기하고 나서 방 바깥으로 나왔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악신의 기운이 조금씩 느껴지는 구나. 활동을 시작한 게야.>
‘흐응. 역시 교수들 사이에 미리 잠입해있었나보네요.’
루카가 관련이 되어 있을 때부터 대충 예상한 거긴 하지만. 내 생각보다 그 수가 더 많았던 모양이네. 그렇지 않고서야 대담하게 움직일 리가 없으니.
<과연 어찌할 생각일까. 공허의 추종자들이 지닌 권능으로 이 곳을 무너트릴 순 없을 텐데.>
‘그건 저도 좀 궁금하긴 해요.’
공허의 추종자와 관련된 아카데미 퀘스트는 대부분 저들의 음습한 행동을 주인공이 분쇄하는 종류다.
저들이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했지.
과연 어떤 식으로 나오려나. 기왕이면 뭐가 됐든 재밌고 신선한 방식이면 좋으련만.
…음. 지난 번에 숲에서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면 기대했다가 배신만 당할 것 같긴 한데.
무장을 갖추고서 아카데미의 광장에 발을 디딘 순간 소울 아카데미 본관의 가장 높은 장소에서 불온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저기는 분명… 아카데미의 결계가 있는 장소잖아.
본래 투명하던 아카데미의 결계가 밤보다도 짙은 검은 색으로 물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을 집어 삼킨 듯한 어둠.
“…무슨?”
“뭐야?! 뭐야!?”
“꺄아아악!”
“갑작스런 시험인가!?”
“일단 불을 만드는 것부터.”
갑작스레 찾아온 어둠에 주변에서 이런저런 소란이 일어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의 소리가 잠잠해진다.
<…어둠의 악신?>
언젠가 보았던 풍경에 할아버지가 당황하여 목소리를 내지만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달라요.’
이건 어둠의 악신이 보여주었던 권능과는 다른 종류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집어삼켰던 어둠과 달리 지금의 검정은 여전히 오감을 남겨두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건.>
‘뭐. 그거죠. 기대해서 배신당한다는 거.’
<…음?>
‘정말 창의력이 없는 녀석들이라니까요.’
내가 투덜대는 소리를 내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 풍경이 생겨난다.
생명 하나 살펴볼 수 없는 죽어버린 대지가. 그 위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불온한 생명이.
검은 색으로 바뀌어버린 태양이.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공허는 결핍이라고 해요.’
게임 속에 등장했던 공허의 악신 본인이 한 이야기다.
‘세상에 도사리는 모든 은혜가 부재한 곳. 그것이 공허의 공간이죠.’
<잠시. 그럼 지금 이 곳은.>
‘네. 아마 그럴 거에요.’
지금 나는. 우리는. 아카데미의 모두는. 공허의 공간에 초대받았다.
‘재미없죠?’
정확하게는 초대 받은 것처럼 꾸민 거겠지만.
<지금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