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3
갑작스레 찾아온 암흑. 그리고 그 뒤를 잇듯 찾아온 불길한 정경. 찻 잔을 든 채로 정체 모를 공간에 떨어진 조이는 눈을 끔뻑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 전까지 조이와 함께 웃고 떠들던 이들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들이 머물던 자리엔 이상하리만치 차가운 공기만이 자리했다.
소름을 돋게 만드는 냉기에 놀란 조이는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몸을 데우려 했다.
“…어?”
그리고서 깨달았다. 지금 그녀가 떨어진 공간이 정상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대기에 머무르는 마력의 밀도가 이상할 정도로 적었다.
아니. 마력 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다. 생기도. 온도도. 다른 많은 것들도.
본래의 세상에는 당연하다는 듯 자리 잡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지금 이 공간에는 결여되어 있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점점 더 버거위 지는 듯한 공간 속에서 조이는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었던 동화를 떠올렸다.
악행을 반복하다 지옥에 떨어졌던 이가 생생하게 묘사하던 지옥의 정경.
말도 안 돼. 왜 갑자기 여기에 지옥이 펼쳐진 거야?
무슨 문제가.
…공허의 악신.
공허가 도사리는 장소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태양도. 따스한 바람도. 대지의 생기도. 하늘의 축복도. 옛 사람들은 세상을 유지하는 모든 긍정적인 것들이 사라져버린 장소를 사람들은 지옥이라고 불렀다.
공허의 악신이. 공허의 추종자들이. 아카데미에 지옥을 펼친 거야.
주변의 다른 분들이 사라진 걸 보면 각자 다른 장소에 떨어진 걸까.
그렇다면 일단 다른 학생분들과 합류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본능에 경종을 울리는 직감.
얼마 전 알른 가문에서 훈련을 받았을 때부터 자연스레 생겨난 6번째 감각이 조이에게 위험을 알린다.
조이는 자신의 감각을 의심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방어마법을 펼쳤다.
콰직! 방어막을 꿰뚫는 불길한 소리에 다급히 고갤 돌린 조이는 방어마법에 박혀 있는 화살촉을 확인하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 멀리에 활을 들고 있는 존재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사람처럼 생겼고, 악마같기도 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천사처럼 보이기도 했고, 짐승과 비슷한 구석도 존재했고, 마물, 어쩌면 신경 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미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악마.”
공허의 공간을 지키는 자. 적막한 대지 위에 그 어떤 것도 남지 않게 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존재.
…겉모습을 추측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대라 그런가 강함을 추측할 수가 없네.
일단은 탐색전을 펼쳐 볼까.
조이는 즉석에서 다섯 개의 마법진을 만들어내며 그 중 세 개에서 마법을 펼쳤다.
하나는 바람의 칼날.
눈으로 볼 수 없으며 화살만큼이나 빠른 이 마법으로 상대의 방어를 무너트린다.
다른 하나는 화염으로 이루어진 화살.
바람보다는 느리지만 위력 하나만큼은 믿을 만한 이 마법으로 상대에게 타격을 가한다.
마지막으로 앞 선 두 개 마법에 신경이 쏠린 상대를 묶기 위한 얼음 감옥.
발치를 얼려 움직임을 제약하기 위한 이 마법이 먹혀 들어간다면 앞선 마법도 제대로 박혀 들어갈 테지.
조이의 노림수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앞선 두 마법에 시선이 끌린 악마는 조이가 숨겨 둔 얼음 감옥에 의해 발이 묶였고 어쩔 수 없이 다른 두 마법을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콰아앙! 바람의 칼날에 이어 날아든 화염화살이 거대한 폭발이 일으키는 걸 확인한 조이는 안심하지 않고 다른 마법을 구성했다.
저기에 있는 게 진짜 동화 속의 악마라면 저 정도로 쓰러지진 않을 거야.
그러니 다음을 준비해야 해.
대기의 마력이 적은 게 거슬리긴 하네.
일단 고위 마법 쪽은 건드리지 말고 하위 마법을 여럿을 엮어서 상황을 타개하는 방향으로.
“…어라?”
연기가 걷힌 순간 조이의 입에서 의문 어린 목소리가 새 나온다.
방금 전까지 멀쩡히 서있던 악마가 박살이 난 채 바닥을 굴러 다니고 있었다.
폭발에 휘말려 조각조각 나버린 악마의 모습은 페이비조차도 고개를 내저을 만큼 끔찍했다.
뭐…지?
저게 정말 내가 아는 악마라면 저렇게 허무하게 쓰러질 리가 없는데?
앞으로 열 댓 개의 마법을 더 박아 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끝이 난단 말야?!
자신이 강해진 건지 악마가 전승보다 약했던 건지 생각하던 조이는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듣고 어깨를 움찔했다.
발소리는 하나였지만 하나가 아니었다. 대지를 진동시키는 발소리는 결코 하나일 수 없었다.
하나이며 여럿인 군단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움직이는 이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순물을 지워버리겠노라는 의무만으로 움직이는 존재들이.
악마의 시체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저들의 수를 확인한 조이는 멍하니 서 있다가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반칙! 저건 반칙! 나 하나 잡으러 온 놈들 치고는 너무 많잖아아아아아!
조이는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임과 동시에 자신을 추적하는 이들을 떨치기 위해 여러 마법을 준비했다.
땅에 얼음을 펼쳐 움직이기 어렵게 만들고. 대지의 모양을 뒤틀어서 달리는 걸 버겁게 하고.
공기의 저항을 더 강하게 만들어서 움직이는 데에 더 많은 힘이.
…응? 문득 발을 멈춘 조이는 다시금 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악마 군단의 바로 앞이었다.
이상해. 이 곳의 환경을 생각해본다면 내가 저런 마법을 숨쉬듯 펼치는 건 말이 안 돼.
저번에 대마법사님께 가르침을 받으면서 실력이 많이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거기에도 정도라는 게 있잖아.
뭔가가 잘못됐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군단을 보며 길게 숨을 내쉰 조이는 자신이 만들어낸 마법을 펼쳤다.
공허의 권능이 만들어낸 환각에 대처하기 위해 그녀가 만들어낸 기적. 아무것도 아닌 것에 존재를 부여하는 마법을 말이다.
그러자 주변의 풍경이 사라지고 조이의 정신이 위쪽으로 부상한다.
“…꿈?”
끔뻑이는 조이의 눈 속에 검게 물든 아카데미 결계가 비친다.
*
<지금 네 말에 따르면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모두 지옥에 떨어진 셈 아니더냐!>
‘정확하게는 지옥을 흉내 낸 어딘가에요.’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 그래봐야 많은 이들이 위험에 빠졌단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터!>
‘그랬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어요?’
나는 타인의 죽음에 민감하다.
그것이 무고한 누군가의 죽음이며. 내가 막을 수 있었거늘 막아내지 못한 것이라면 더더욱.
얼마 전 공허의 추종자들이 점거한 숲에서 피비린내를 맡았을 때도 속이 살짝 올라올 뻔 한 게 나인 걸.
근데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죽는다?
그것도 평소에 얼굴을 마주하던 이들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저런 일이 벌어지면 나 절대로 정신 못 붙잡고 있을 거야.
<다른 이들의 위험하지 않다고?>
‘말했잖아요. 여기는 지옥을 흉내 내었을 뿐인 곳이라고.’
<제대로 이야기를 해라.>
‘간단한 이야기에요. 할아버지. 지난 번 숲에서 거하게 일을 벌이려다 실패한 공허의 악신에게 지옥을 현현할 힘이 남아있을 것 같아요?’
<…그렇진 않겠지.>
‘그게 아니라도 말이죠. 그런 장대한 계획이 준비되고 있었다면 저나 할아버지, 페이비가 아무런 전조도 못 느꼈을까요?’
아니 애초에 그럴 가능성이 존재했다면 내가 이렇게 여유를 부리지 않았겠지.
당장 베네딕을 찾아가서라도 울먹거리며 ‘파파. 도와줘요.’ 라고 했을 걸.
그랬으면 딸바보 베네딕이 아카데미에 강림해서 친히 모든 걸 박살내버렸을 테고.
<그럼 이건 뭐냐.>
‘공허의 추종자들이 잘하는 일 있잖아요?’
아무것도 아니기에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이들이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꿈.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 될 수 있는 공간임과 동시에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는 것이 한없이 어려운 장소.
‘꿈속에서 무언가 잘못되어봐야 길고 긴 잠에 들 뿐이죠.’
본래는 이것도 꽤 큰일이지만 지금 나 같은 경우엔 걱정을 할 이유가 없다.
얼빠여우가 있고. 페이비가 있고. 이외에도 여러 도움을 구할 수단이 차고 넘치는데 그까짓 잠이 무슨 상관인가.
이런 내 설명을 들은 할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명석하구나.>
‘그럼요. 저 머리 완전 좋다구요. 제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 한다니까요?’
<며칠 전 네 친구와 공부할 때의 일화를 언급해주랴?>
‘왜 제 기를 죽이려고 그러세요!’
내가 멍청한 짓으로 매드무비를 찍은 이야기를 굳이 이 상황에 이야기해야겠습니까?!
손녀 천재 짓 하지 말라고요! 빌어먹을 할배!
<뭐 어쨌든. 꿈이란 걸 알고 있다면 왜 안 빠져나가고 가만히 있는 것이냐.>
‘처음에 소란을 일으키는 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인 게 좋으니까요.’
<…음?>
*
“허. 이건 또 뭔.”
유덴은 미간을 찌푸린 채 검게 물든 아카데미의 결계를 바라봤다.
“공허의 추종자들이 드디어 일을 벌인 모양이네.”
옆에서 들려 온 카리아의 목소리에 유덴의 표정이 한층 더 찌푸려진다.
아서와 프레이 두 사람이 돌아간 후. 유덴은 밤을 새워가며 둘을 어찌 가르치면 좋을지 고민했다. 루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만족하기 위해서 말이다.
괜찮은 재능들에 신이 난 그녀의 생각을 끊은 건 카리아였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방문을 벌컥 연 그녀가 유덴을 바깥으로 불러낸 것이다.
그리고 바깥에 나오자 마자 보게 된 풍경이 바로 검게 물든 결계였고.
“일이 벌어질 거란 걸 알고 계셨습니까?”
태연한 카리아의 표정에 의심이 확신이 되는 것을 느낀 유덴이 한 소리를 하자 카리아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널 만나러 간 이유가 이건데?”
“…근데 왜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 두셨죠?”
“그건 나도 잘 몰라. 고용주님이 그러자고 했는걸.”
“강제로 입을 열게 해드리면 됩니까?”
“진짜로 모른다고! 난 시킨 일을 할 뿐인 사람이란 말야!”
카리아의 외침을 들은 유덴은 검 손잡이를 매만지며 목소리를 냈다.
“그렇담 나중에 알른 영애를 추궁하는 일을 도와주시죠.”
“싫어. 고용주님을 건드리면 나만 피해보잖아.”
살기까지 보이면서 협박을 했는데도 싱글거리다니.
내가 자길 공격할 리 없음을 아는 걸 테지.
젠장. 진짜 좆같은 인간이야.
들으란 의도에서 혀를 찬 유덴은 다시금 결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계를 베도 됩니까?”
“구멍은 내도 되지만 박살내면 곤란하다더라.”
“구멍이라.”
결계의 앞에 선 유덴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검게 물들어 있던 결계의 일부가 무너지며 안 쪽의 정경이 드러난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지원을 불러주십쇼.”
“지원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다 박살낼 거 아냐?”
“모르죠. 악신의 추종자들을 상대하는 일은 항상 변수로 가득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