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91
루카와 공허의 추종자들은 이전보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방금 전 눈이 돌아가서 동료를 공격하려했던. 그리고 루카라는 인간에 의해 목과 몸이 분리되어 바닥에 나자빠졌던 동료의 최후가 그들을 조심스럽게 했다.
덕분에 던전을 진행하는 속도가 한층 더 늦춰졌지만 그에 대해 불평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공허의 추종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여 개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진 않으니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조심성은 악수가 되어버렸다. 추종자들이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게 됨에 따라 사령들이 더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져 굳어버린 이들은 상대의 입장에서 공격하기 좋은 과녁에 불과했으니. 머잖아서 또 다른 공허의 추종자가 눈을 까뒤집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추종자가 미쳐가는 기미를 보이자마자 목을 날린 루카는 다른 추종자들의 불안 어린 표정들을 보며 단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귀찮은데 그냥 다 죽여 버릴까. 별은커녕 개똥벌레조차 되지 못할 잡놈들을 끌고 다니는 게 이토록 거슬리는 일일 줄이야.
알른 영애께서 준비한 무언가에 실험용 생쥐마냥 던져버릴 생각으로 귀찮음을 감수했지만 점점 더 실용성보다 귀찮음이 커져가.
“루카 교수. 아직도 많이 남았습니까?”
“…음. 이제 절반은 지나온 것 같군요.”
“아직도 말입니까?”
“꽤 복잡한 장소거든요. 여긴.”
추종자 무리를 이끄는 자는 약간 불만이 어린 기색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루카에게 반기를 들진 않았다.
그 판단이 추종자 무리를 살렸다. 반발의 기미가 보이는 순간 루카는 한 치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여 버리고 홀로 움직였을 테니까.
점차 무거워져가는 침묵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던 이들은 어느 순간 한 방에 도착했다.
누가 머무르기라도 하는 듯 여러 가구 같은 것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은 방의 한 가운데엔 그 곳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성의 외모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동그란 눈동자에선 아이 같은 순수함이 느껴졌으며. 입가에 옅게 서린 미소는 부드러웠고. 전체적인 자세에서도 귀족 영애 특유의 기품을 풍겼다.
다만 그녀에겐 아주 커다란 하자가 몇 가지 존재했다. 하나는 그녀의 외견이 반투명하다는 점.
또 다른 하나는 그녀의 주변에서 풍기는 사기가 악신의 추종자들마저 식은땀을 흘리게 할 만큼 강대하다는 점.
– 어서 오세요. 손님분들. 저택 사용인들의 접대는 마음에 드셨을까요?
드레스 끝을 들어 올리며 건네는 가증스러운 인사에 공허의 추종자 중 하나가 튀어나갔다.
그렇지만 그의 공격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되지 못했다. 여성에게로 향하려던 공격을 한 사령이 가로 막았으니까.
– 갑작스럽게 방문인지라 준비가 부족했던 점 사과…
“…테라?”
추종자의 공격을 가로막은 사령은 추종자가 익히 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착각할 리가 없었다. 여태까지 몇 번이나 함께 일을 해왔으며 이 던전에도 함께 들어왔던 이의 얼굴을 어찌 착각할 수가 있겠는가.
– 동료 분과의 재회는 마음에 드시나요? 워낙에 남은 원망이 많으셨는지라 사령으로 만들기 수월했답니다.
“이 미친년이 감히!”
이성을 잃은 남자가 자신의 가면 위로 공허의 권능을 덧씌운다.
흉내내고자 하는 것은 남자가 알고 있는 최고의 전사가 지닌 외견.
공허의 축복으로 가득 찬 이 공간이라도 완벽하게 재현하는 건 불가능 할 테지만 그 일말로도 이 년을 조지기엔 충분.
“…끅.”
추종자의 발치에서 솟아난 사령무리의 창이 그 몸을 꿰뚫는다. 그는 자신이 지닌 권능으로 상처를 가리려 노력했지만 그보다 그의 몸이 기우는 것이 더 빨랐다.
한 사람의 숨이 끊어지고 사령의 옆에 또 다른 사령이 생겨난다.
– 어머나. 이번 분도 원한이 많으셨나보네요. 이렇게 빨리 친구가 될 줄이야.
공허의 추종자들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전율했다. 항시 음지에 숨어 활동하던 그들은 흑마법사나 사령술사에 대해서도 대충 알고 있다.
그런 이들이 협력할 기회가 몇 번 존재했기에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 그렇기에 추종자들은 눈 앞의 사령이 벌이는 일이 얼마나 괴악한 것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죽여서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해야 할 이를 굴복시켜 즉석에서 바로 자신의 사령으로 삼다니.
저 사령은 도대체.
“그게 끝입니까?”
추종자들의 당혹 속에서 루카가 목소리를 내자 여성이 웃음을 흘렸다.
– 당연히 아니죠. 이런 것도 준비되어 있답니다.
여성이 손가락을 튕긴 순간 이곳저곳에서 사령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천장에서. 바닥에서. 벽에서. 가구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이들의 시선은 오롯이 루카를 향해 붙박혀 있었다.
관심의 당사자인 루카는 저들이 왜 자신을 바라보는 지 이해했다.
“안녕하세요. 실패작 여러분들.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 남아 계셨군요?”
저들은 과거의 루카가 위기로 몰아넣었던 이들이다. 검성을 뛰어넘을 빛을 만들기 위해 제물로 바쳤지만 하늘에서 떨어지고만 폐품들말이다.
루카는 저들이 내뱉는 저주의 말들을 들으면서 입술을 끌어올렸다.
“베멤. 랄. 루다. 이외에도 몇 분들에겐 죄송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 때는 제가 아직 미숙했었거든요. 여러분들은 더 밝게 빛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세공사로써 미숙했던 루카의 실수에 의해 떨어져버린 자들에게 사과한 루카는 다른 이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그렇지만 다른 분들은 아닙니다. 별이 될 기회를 주었거늘 떨어져버린 쓰레기들에게 왜 제가 죄송하겠습니까.”
루카의 웃음소리에 저들의 원망이 한층 더 거세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루카는 실망스럽다는 기색을 보였다.
“저까짓 실패작들로 저를 괴롭히고자 하셨습니까. 알른 영애? 정말 실망스럽군요.”
사령이 지닌 힘은 대개 살아있을 적에 지녔던 힘과 직결되기 마련이다. 생전보다 강해질 수도 있고 약해질 수도 있지만 현격한 차이가 생길 순 없다.
그렇기에 저들의 원망이 얼마나 강하더라도 루카를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시련 앞에 굴복해버린 실패작들이 어찌 루카를 쓰러트린단 말인가.
“당신이 눈치를 챈 그 순간에 일을 벌일 걸 그랬어요. 그랬다면 당신에게 간절함을 선사할 수 있었을 텐데. 괜히 시간을 주어서 당신에게 헛된 여유를 줘버리고 말았군요.”
루카는 단검 두 개를 양손에 쥐며 순순히 자신의 부족을 인정했다.
“그러니 수습도 제가 해야겠죠.”
그가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그의 몸이 온갖 사령들을 뚫고서 여성의 앞에 도착했다.
그러면서 얻은 가속력을 담아 휘두르는 단검이 여성의 목을 노린다.
이 여성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알른 영애에게 협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자신의 주변인이 자신이 예상치 못한 일에 의해 죽는다면 영애께서도 조금은 다급해 지겠지. 그리 생각하던 루카는 여성의 대응을 보고서 순간 의문을 품었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혹스러워할 만도 하건만 여성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단검을 보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던 것이다. 단검이 휘둘러지는 걸 보지 못했나?
아냐. 이 정도 수준을 지닌 자가 그럴 리 없어.
그렇다면 함정? 겉으로 보기에 이상은 존재치 않았는데?
혹시 모른단 생각에 루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여성이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고, 여성을 따라 다른 사령들도 함께 웃음을 지었다.
사령들의 불길한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뭐가 그렇게 웃기죠?”
– 아하핳. 그치만 말야! 뭐라도 된 것마냥 나불대던 녀석이 꼬맹이의 예상에 놀아나는 걸 보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꼬맹이? 알른 영애?”
– 그래. 그… 앗차. 맞아요. 알른 가문의 영애분 말이에요.
알른 영애에게 내 행동이 예측 당했다고? 그게 무슨.
– 그 분께서 한 말을 그대로 전해드리자면. 크흠. 변태 교수는 개허접이라 의미심장한 티를 내면 도망칠 거야. 자기를 하나도 못 믿는 찌질한 인간이거든.
…저건 지금 날 도발하는 거다. 그러니 저기에 넘어가서는 안.
– 이 말 들으면 일부러 도발하는 줄 알고 가만히 듣고만 있을 걸? 진짜 보잘 것 없는 인간이야. 그런 주제에 어떤 부분에선 지가 대단한 줄 안다니까? 이런 찐따가 어떻게 교수가 된 건지.
여성의 말에 놀아난 루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 자신의 단검을 꾹 쥐었다.
– 어때요? 알른 영애의 말씀이 옳았나요?
“하하. 영애께서 제게 그리 관심이 많으실 줄은 몰랐군요.”
– 알른 영애를 대신해서 대답하자면 자의식 과잉이시네요. 찐따 교수님. 당신 같은 피라미한테 누가 관심을 주겠어요? 보석으로도, 세공사로도, 하찮디 하찮을 뿐인 당신을 동정할 순 있겠지만 관심을 줄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루카가 수많은 사령들의 비웃음을 뚫고 재차 앞으로 뛰어들었지만 여성은 거기에 대응하지 않고 땅을 파고 들어서 사라져 버렸다.
다른 사령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벽 뒤에 숨어들어 비웃음을 흘릴 뿐 대놓고 그들을 공격하진 않았다.
“루카 교수. 어떻게.”
“…시간 끌기입니다.”
“예?”
“주변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저희가 안에 도달하는 속도를 늦추려 할 뿐입니다.”
그러다 방금 전처럼 도발에 넘어가는 자가 나오면 빈틈을 파고들 테지.
“여긴 던전이 아닙니다. 귀신들이 산 자를 가지고 노는 장소일 뿐.”
공허의 추종자들의 불안을 떨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루카였지만 정작 그의 뇌리에는 방금 전 여성이 했던 말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갑시다. 이미 돌아가기엔 늦은 듯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