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94
아서는 루시가 건네 준 던전 공략에 관한 책을 수도 없이 읽었다.
처음에는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 던전 공략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건지 궁금해서.
그 다음에는 책 안에 담겨 있는 막대한 지식에 감탄해서.
또 얼마 시간이 지난 후에는 자신을 무시하는 루시 알른에게 한 방 먹여주겠노라는 생각에서.
최근에는 한 번이라도 승리를 거둬서 루시 알른에게 원하는 대답을 듣겠노라는 다짐에서.
계속해서 그 책을 읽어왔다.
그러면서 아서가 느낀 것은 루시 알른이 지닌 지식이 단순히 주신께 내려 받은 것이 아니란 사실이었다.
그녀의 시작은 주신의 축복이었을지언정 그걸 체화시키고 자신만의 것으로 만든 것은 루시 알른이었다.
루시가 여태까지 해 온 모든 노력의 흔적이 그 책 안에는 남아 있었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신경 쓸 이유도 없는 잡스러운 마물에 대한 완벽한 공략법도.
몸으로 뚫고 지나가도 될 함정을 파훼하는 방법도.
기존에 있던 던전에서 길을 찾는 방법은 물론이고 아예 새로운 던전에 들어갔을 때 길을 찾는 방법도.
그 모든 글귀 안에는 루시 알른이 얼마나 던전에 진심인지. 그리고 그 던전에 진심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가 절로 묻어나왔다.
그 때문에 아서는 루시가 책에 적어 놓은 것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루시 특유의 장난스러운 어투로 적힌 책은 누군가를 놀리기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 깃든 것은 분명 루시의 진심이었으니까.
그녀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체화하고자 한 아서는 지금에 이르러서 자신의 성과를 느낄 수 있었다.
오른쪽에 함정이 있군. 뻔히 보이는 것 뒤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숨겨뒀어.
함정의 구성을 보면 저것이 발동되는 순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이 막힐 듯 하군.
통로의 차단. 도망치는 자를 막기 위한 구성.
저 곳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다른 길로 돌아가야겠군.
흐음. 저 쪽에 기다리고 있는 마물의 생김새는 루시 알른이 적어 두었던 것과 닮아있군.
저 허접한 강아지들은 소리에 민감하니 큰 소리를 내면 오줌을 지리며 빌빌 길거라고 했었지.
그 말이 옳았군. 덕분에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겠어.
이번에는 퍼즐인가. 여태까지 눈에 새겼던 단서를 기반으로 생각해본다면 금방 답이 나오는 군.
순조로히 던전을 나아가던 아서는 꼬마아이가 엄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점차 이해할 수가 없게 됐다.
시련이라는 것이 이토록 쉬워도 되는 것인가?
시조의 조각이 직접 관여하는 시련이라면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무언가가 존재해야 할 터인데. 그래야 자격을 증명할 수 있지 않나.
역시 이상해. 너무 쉬워. 차라리 루시 알른이 작년 기말고사에 내밀었던 던전이 더 지독하단 생각이 들 지경이다.
아니. 객관적으로 그 쪽이 더 지옥 같았지.
만약 그 곳을 공략할 기회가 한 번만 주어졌다면 단 한 번 만에 공략할 이가 존재하기나 할까.
아서는 헛웃음을 흘리면서 한층 더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이딴 곳에서 시간을 끌었다간 루시 알른에게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지금만 하더라도 한참 동안 놀림거리가 되어야 할 게 뻔한데 더 늦었다간 내 인격이 어디까지 박살이 날지.
얼마 전 의자가 되어 바닥을 기던 칼을 봤던 아서는 자신이 그 자리를 대체한 상상을 하고는 치를 떨었다.
그럴 순 없다. 그런 상황이 찾아온다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말 것이야.
“후대.”
식은땀을 흘리며 앞으로 발을 움직이던 아서는 갑작스레 옆에 나타난 꼬마아이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시련이 끝난 거냐?”
“그런 거면 좋겠지만. 아니. 최악의 상황이다. 악신의 기운이 이 곳에 개입하고 있다.”
“…뭐?”
“그걸 막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만 아무래도 내가 너무 낡은 모양이야.”
꼬마아이의 씁쓸한 웃음에 아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고 보면 에르기누스님께서도 말씀하셨지. 슬슬 결계를 보완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노라고 말이야.
몇 백 년이나 이 곳에 자리하고 있던 마법진이 최초의 강력함을 지니고 있을 순 없어.
이를 머리로는 이해하겠다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군. 제기랄.
“그 소리는 결국 공허의 개입이 시작될 거란 소리이지 않나.”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는 중이다. 보라. 눈 앞의 마물들을. 저들의 외견을 구분하는 것이 점차 힘들어 지고 있지 않나?”
꼬마아이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아서의 시야에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는 중이었으니까.
“저들이 완벽하게 장악을 끝마치기 전에 시련을 돌파해야 한다. 가능하겠나?”
“이 상황까지 왔으면 가능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나.”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아서에게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이건 시간 싸움이다.
공허의 권능이 이 마법진을 완벽히 장악하는 것이 더 빠르냐. 아니면 아서가 이 시련을 넘어서는 것이 더 빠르냐.
“해야지.”
시간싸움이라면 아서도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그가 여태까지 이기고자 노력한 상대는 이 쪽 분야에 있어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존재이지 않은가.
루시를 이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악해왔던 아서는 자신이 이 싸움에서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 믿고 맡긴 곳에서 패해버리면 어찌 얼굴을 들겠는가.”
*
– 당신이 우릴 죽였어.
아니다. 너희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은 것은 너희 자신이다.
시련을 넘어섰다면 별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실패한 건 너희들이야.
– 이루지도 못할 꿈에 우릴 바쳤어.
틀렸다. 나의 꿈이 멀어보였던 것은 너희들의 재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루시 알른이라는 이름의 별을 보아라.
하늘에서 태양보다도 밝게 빛날 저 별을 보란 말이다. 네 녀석들이 저만큼이나 밝았다면 나의 꿈은 진즉에 이루어졌으리라.
– 결국 당신은 혼자선 아무것도 못할 무능아야.
그래. 나는 홀로 밝게 빛나는 것을 포기했다.
이것이 잘못인가? 헛된 꿈을 믿으며 발버둥치는 대신 현실을 택한 것이 죄인가?
낭만이 어째서 낭만이라 불리는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낭만이라 불리는 것이다.
나는 낭만을 생각하는 멍청이로 살 바에는 현실 속에서 꿈을 이루리라 다짐했다.
루카는 길목을 돌아다닐 때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나하나 대답하며 그들의 존재를 찢어발겼다.
망설임은 없었다. 죄책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양심 따위에 멈출 발이었다면 여기까지 걸어오지도 않았을 테니.
그 과정에서 루카는 자신이 어긴 맹세를 따라 더러운 무언가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여태까지 퍼져나가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루카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외면하고 앞을 바라봤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알른 영애께서 한 행동은 어디까지나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
이까짓 사령들이 주변을 감싸더라도 결정적인 상처를 입힐 순 없어.
한 둘 정도 수가 줄 수는 있겠지만 그 뿐이야.
바꾸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시간은 끈다 해서 유리해 질 요소가 어디에 있지?
공허의 침식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이 쪽일 텐데?
정확하게 무얼 노리는 지는 알 수 없다만 저 쪽의 의도에 맞추어 줄 필요는 없어.
지금쯤이면 침식도 어느 정도 진행이 됐을 테니 슬슬 상대를 다급하게 만들어 볼까.
“렘누스. 바깥과 연락할 수 있습니까? 침식의 진행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만.”
“절반 이상 집어 삼킨 상태라고 합니다. 다만 바깥의 저항도 점차 격렬해지고 있는지라.”
“그럼 준비해 둔 것을 슬슬 사용하죠.”
아카데미 던전을 만들 때 사용하겠다는 핑계로 들여 놓은 여러 골렘들.
공허의 권능에 의해 침식이 끝난 그 물건들은 공허의 추종자들이 힘을 불어 넣는 순간 한 사람의 전력이 되어 결계 안에서 날뛰겠지.
“알른 영애. 듣고 계실테니 말씀드리자면 골렘들은 학살을 벌일 겁니다. 결계의 안에 잠들어 있는 이들이 무력하게 죽어나갈 거란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무능했기에. 당신이 방조했기에. 그들이 죽을 거라고요.”
자.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속은 연약한 당신은 이 소리를 듣고도 가만있을 수 있을까?
그들의 죽음을 애써 외면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당신은 그러지 못할 거야. 타인의 희생을 외면한 채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주신이란 작자가 당신을 선택했을 리가 없으니까.
“푸하하핳♡”
역시나.
복도의 어둠 너머에서 여자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선명하고 아름다워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얄미운 웃음소리가.
“하루 종~일 입만 나불나불나불♡”
붉은 색의 양 갈래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리고.
“그렇게 강한 체 하면 자괴감 안 들어?♡”
피보다도 진한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빛났으며.
“허세부리는 것과 달리 딱한 자신의 처지를 보면 자살 마려울 것 같은데♡”
히죽거리는 입가는 그녀라는 사람이 유리한 고지에 선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혹시 자기 상상이랑 현실을 구분할 수 없게 된 걸까?♡ 쿱♡ 크흡♡ 불쌍해라♡ 현실의 자신이 얼마나 추악했으면 정신병에 걸렸을까♡”
누가 보더라도 경탄을 감추지 못할 작고 아름다운 여자아이는 당당히 루카를 비롯한 공허의 추종자 무리 앞에 섰다.
“어떤 현실을 그렇게 부정하고 싶었어?♡ 네가 소추에 조루인 거?♡ 네 재능이 네 장식용 머리 만큼이나 못난 거?♡ 아니면 평생 이루어지지 못할 네 꿈?♡”
루카는 루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귓가를 관통할 때마다 이마에 핏줄이 서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감정을 다스렸다.
저 말에 넘어가는 순간 그녀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주도권을 쥔 건 내 쪽이여야 한다. 세공사인 나여야 한다.
“하하. 그런 소리를 떠들 틈이 있으십니까?”
“…”
루카가 목소리를 낸 순간 루시가 입을 다문다. 여유로운 체를 해도 속은 다급한 모양이군.
“그러는 동안 지상에 있는 이들이 하나 둘 죽어갈 텐데요? 나약한…”
“푸하하하핳♡”
당신이 그걸 견딜 수 있겠느냐고 루카가 말을 하려던 순간 루시의 웃음소리가 그의 말을 끊는다.
처음 그 웃음을 들은 순간 루카는 루시가 연기를 하는 거라 생각했다. 여유로운 체 하기 위해 일부러 웃으려는 것이라고 봤다.
“웃음으로 당혹을 무마하려 하셔도 의미는 없습니다.”
“큽♡ 크흐흡♡ 변태 교수♡ 너 진~짜 멍청하구나?♡ 지금 내가 가짜로 웃는 것처럼 보여?♡”
“허세를 부리셔도.”
“푸흐흫♡ 허세 부리는 건 너지♡ 재능도 열정도 뭣도 조루인 멍청아♡”
…허세가 아냐?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어.
무언가 변수가 생겼다면 진작에 내가 알았어야 해!
“아♡ 설마 지금 자기 말이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네 병신같은 계획이 방해당하지 않을 거라고 여긴 거야?♡”
“하. 어디 마음대로 지껄여 보시죠.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루카 교수! 지상에서!”
공허의 추종자에게서 당혹어린 목소리가 들려 온 순간 루카는 다급히 루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흐흐흡♡ 이딴 병신이나 상대하고 있어야 한다니♡ 나 너무 불쌍한 거 같아♡ 그치?♡”
그녀의 웃음에는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