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95
일주일 전. 루시는 공허의 추종자들이 벌이는 계획을 알아내기 위해 역사 확인 스킬을 사용했다.
그 때 당시 루시는 악신의 개입 탓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인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어디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아낼 수 있었지.
역사확인 속에 기괴한 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그 곳에 악신의 추종자들이 날뛰고 있단 소리나 다름없었으니까.
어떤 장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는 게 가능하다면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해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
루시는 자신의 추측을 기반으로 여러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 중 대부분은 루시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지금 아카데미 부지 안을 내달리는 칼과 에린, 리나 이 세 사람에게도 한 가지 계획이 주어졌다.
바로 소울 아카데미의 던전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골렘들을 파괴하는 일이 말이다.
“이상합니다. 왜 이렇게 방해가 적은 거죠?”
건물 바깥으로 나와 에린을 품에 안은 채 달리던 칼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정경에 의문을 드러냈다.
아카데미 전체를 장악할 만큼 화려한 계획을 펼친 것이 공허의 추종자들이다. 헌데 바깥 부지를 대놓고 달리고 있는데 어찌 방해가 끼어들지 않는단 말인가.
이 일을 방해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달려들 걸 예상했던 칼은 저 쪽에서 함정을 파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걱정마라. 저들은 어디까지나 바깥의 개입에 대처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의 걱정을 무마시켜 준 것은 리나였다.
자그마한 안개 여우들을 여기저기 퍼트려 둔 그녀는 점점 커져가는 결계의 구멍을 사이에 두고 공허의 추종자들과 주신 교회의 사제들을 비롯한 외부의 세력이 치열하게 다투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공허의 권능이 결계를 장악함에 따라 추종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있지만 그만큼 외부의 세력도 커지고 있다. 당분간은 저들의 개입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다.”
저들 사이의 균형은 서서히 공허의 추종자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외부의 인원들이 보충된다 하더라도 전력이 되는 이들은 소수. 극적인 변화는 존재치 않는다.
그에 반해 공허의 권능을 빌리는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실하게 강해지고 있으니. 균형의 추가 기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제대로 하면 돼.”
“알겠습니다.”
던전학과의 건물에 일행이 발을 들인 순간 리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공허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군.
연기를 퍼트려서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면 되긴 하겠지만 그래서야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기사님. 오른쪽으로 가주세요.”
“…오른쪽말입니까?”
“네. 저 쪽이 덜 역겨워요.”
확신에 찬 에린의 말에 칼이 멈칫했지만 리나는 아니었다. 그녀가 누구의 가호를 받고 있는지 아는 리나는 히죽 웃으며 그 쪽으로 발을 움직였다.
“루시 그 아이는 이런 상황도 예측한 것인가.”
왜 굳이 자신의 시녀를 데려가라 했나 싶었다만 이유가 있었군.
“리나님?”
“멍청한 기사 놈아. 네가 안고 있는 아이의 말을 따라라. 그 또한 네 주인의 설계이니.”
“…알겠습니다. 에린 양. 계속해서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네!”
에린의 지시는 옳았다. 그녀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항시 제대로 된 정답을 찾아냈다.
과거 악신의 권능으로 가득 찼던 숲을 돌파하던 프레테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해 준 것은 공허의 추종자 몇과 그들 너머에 존재하는 골렘 무리였다.
“계획을 막으러 왔나?”
공허의 추종자 중 맨 앞에 선 이는 세 사람을 마주하고도 입가에 웃음을 새겼다.
“그럴 거면 더 빨리 왔어야지. 지금은 이미 늦었다. 쓰레기들아.”
그가 목소리를 내기 무섭게 골렘들 사이에 공허의 권능이 깃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기질적인 금속이었던 것들이 하나 둘 사람의 피부를 지니기 시작한다.
공허가 지닌 권능이 저들에게 인간의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절망적인 광경을 바라보던 칼은 에린을 바닥에 내려주고는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그의 새하얀 오러가 주변의 어둠을 물린다.
“리나님. 에린 양을 부탁합니다.”
“걱정말거라. 이 아이를 다치게 했다간 루시가 날 아는 체도 안 해줄 것 아니냐.”
“하하. 그것보다 더 할 것 같습니다만.”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보고서 공허의 추종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신이 나간 거냐? 눈앞에 도사리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가?”
“걱정 마십시오. 보입니다. 저한테도 눈이 있거든요.”
“근데.”
“그저 긴장할 필요가 없어 보였을 뿐입니다.”
칼이 가벼운 웃음을 짓자 공허의 추종자가 이를 악물고서 골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앞에 도사리는 방해물을 배제하라고.
악신의 권능에 침식된 골렘들은 한 치 망설임 없이 그 명령을 따랐다.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방해물을 배제하기 위해 내달렸다.
허나 그들의 돌격은 제대로 된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저들이 방해물에 닿기도 전에 방해물이 휘두른 검이 골렘들을 반토막내버렸으니까.
“참으로 물렁하군요.”
칼의 웃음이 진득해짐에 따라 공허의 추종자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알른의 기사단에서도 유망주라 평가 받았으며. 그런 재능을 지녔음에도 자신의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 옆에 서기 위해 게으름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온 기사의 일검이 빛을 발한다.
*
휴우. 다행이다. 칼이 제 시간에 도착한 모양이네. 루카가 의기양양하게 이야기를 하길래 무슨 변수가 생겼나 싶어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냥 늦었을 뿐이었나.
“저기♡ 저기♡ 빨리 더 지껄여봐♡”
“…”
“골렘들이 사람들을 죽일 거라며?♡ 근데 그 물렁골렘들이 박살나고 있네?♡”
긴장을 애써 감추며 히죽 웃음을 지은 나는 당혹에 빠진 이들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네 엉성한 계획을 내가 못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한 거야?♡ 푸하핳♡ 현실감각이 많이 부족하네♡ 진짜 병신같다♡”
루카와 공허의 추종자들이 보내는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꽂히지만 나는 오히려 어깨를 폈다.
저들 모두를 압도할 자신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따지자면 오히려 반대다.
뒤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달려들지 못할 거라 생각하기에 난 허세를 부렸다.
“몇 달 동안 벌레들이 바닥을 기길래 뭘 준비하나 했는데 벌레는 벌레였네♡ 여자애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꼴이라니♡”
내가 계획했던 일 대부분이 현실화 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서 상황이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문제는 아서다. 잠자는 지하의 왕자님이 되어버린 그 변태새끼가 일어나질 못하는 탓에 계획의 근간이 꼬여버렸다.
“왜 표정을 찡그리는 거야?♡ 나처럼 귀여운 여자애의 손바닥 위를 기어다니는 거잖아♡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젠장. 나름대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본다고 했는데 아직까지도 그 놈이 깨어나질 못했어.
이대로 가다가 마법진이 완벽하게 장악당할 때까지 그 녀석이 잠에 빠져 있으면 상황이 꼬여.
내가 직접 움직일 필요성이 생긴단 말야!
“아~♡ 팔을 타고 기어오르고 싶은데 못해서 실망한 거야?♡ 푸흐흡♡ 징그러운 페도변태새끼들 같으니라고♡”
그랬다간 어찌저찌 모든 일을 해결한다 쳐도 루카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꼴이 돼.
저 녀석이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성불하는 모습을 봐야 한다고!
심지어 이것도 그럭저럭 잘 풀린 케이스야. 진짜 최악의 경우에는 사람들의 피가 잔뜩 흐를지도 몰라. 내 방조 때문에 사람들이 죽게 돼.
“눈으로 보게 해줄까?♡ 시선으로라도 기어올라 볼래?♡”
더 시간을 끌어야 해. 아서가 일어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시간을 끌려 하시는군요. 알른 영애.”
내 도발을 끊어내며 루카가 목소리를 낸다.
“무언가가 안 풀리시는 모양입니다?”
“안 풀리는 건 너겠지♡ 네가 너~무 무능해서 네 계획도 다 박살나고 있잖아?♡”
“아아. 인정합니다.”
방금 전까지 찌푸려져 있던 루카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서린다.
“제가 준비해 둔 여러 일들이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의 어투에 여유가 새겨진다.
“영애께서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에요.”
…쟤 갑자기 왜 저래?
왜 갑자기 순순히 인정을 하는 거야?
설마.
“허나 그래봐야 이 계획의 근간은 여전히 제대로 진행되고 있잖습니까.”
루카가 입꼬리를 끌어올림과 동시에 복도에 어둠이 자리한다.
아드리가 만들어낸 어둠이 아닌. 악신의 기운이 만들어낸 어둠이.
*
“검성님! 앞에 날려주세요! 그리고 페이비는!…”
유덴은 조이가 목에 힘을 주는 걸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야. 파트란 영애 지휘하는 게 상당히 괜찮네.
공작 가문에서 어떤 식으로 교육을 하길래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어린 아이가 저렇게 지휘를 잘 하는 거람.
내가 저 나이 때는 진짜 짐승처럼 돌진하는 것밖에 못했었는데.
수많은 이들과 함께 일을 해봤던 유덴이 이렇게 감탄할 정도로 조이의 지휘는 세련된 것이었다.
덕분에 세 사람은 공허의 추종자들의 쉴 새 없는 방해 속에서도 빠른 속도로 나아가 목표로 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가 남겨 둔 마법진이 있는 장소.
수많은 악신의 추종자들이 결집해 있는 곳이며 공허의 권능이 가장 짙은 곳.
그리고 이 모든 계획의 중심이 되는 자.
공허의 사도가 자리하고 있는 방.
“오랜만에 뵙습니다. 검성님. 지난 번에 뵌 후로 몇 년만인가요?”
“아는 체 하지마. 쓰레기 새끼야.”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악신 무리 토벌에서 놓쳤던 적을 다시금 만난 유덴은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냈다.
“아하하. 그래도 인연이잖습니까.”
“지랄하네. 어차피 뒤질 놈이 인연은 무슨.”
“아뇨. 검성님. 저희는 인연이 될 것입니다. 뒤에 계시는 성녀님도. 파트란 가문의 영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의 연은 길고 긴 세월 동안 이어질 테죠.”
공허의 사도가 뒤집어 쓴 로브 아래로 그의 웃음이 비쳐 나온다.
“공허의 악신께서 그리 만드실 테니까요.”
그의 뒤 편에 존재하는 마법진은 이미 검고도 검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