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그 날 에린은 여느 때처럼 새벽부터 준비해서 루시의 방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루시가 일어났을 때 에린이 없다면 몇날며칠을 그에 관해 꼬투리를 잡기 때문이다.
이전에 1분가량 루시를 기다리게 했던 날 호되게 혼난 후로 에린은 언제나 미리미리 나와서 루시의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고, 두시간이고 간에.
이렇게 기다리다 보면 안에서 종소리가 들리고 그 때 방 안에 들어가면 되지만 그 날은 달랐다.
에린이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루시가 문을 벌컥 열고 나온 것이다.
루시의 얼굴을 본 순간 에린은 이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루시가 종을 울렸는데도 듣지 못했다고. 그 때문에 화를 내러 오신 거라고.
에린은 루시가 무어라 하기 전에 일단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고 빌었다.
그 분노가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루시는 그녀를 혼내지 않았다.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린을 바라볼 뿐.
평소의 루시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루시의 기행은 이걸로 멈추지 않았다.
그 날 하루 루시는 평상시 그녀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여럿 하고 다녔다.
식사를 할 때에 아무런 꼬투리도 잡지 않고 모두 다 맛있게 먹는다거나.
시녀가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질책하고 넘긴다거나.
얌전히 교사가 하는 수업을 듣는다거나.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여러 개의 책을 읽는다거나.
이런 행동들이 이어지다 보니 시녀들 사이에선 ‘루시 아가씨가 머리를 크게 다치신 거 아닐까.’ 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다만 모두들 루시가 바뀌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십 년이 넘도록 패악질을 부리던 사람이 하루 이틀만에 바뀔 리가 없으니까.
에린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다.
그렇지만 루시의 변화가 하루가 되고, 이틀이 지나 삼일 동안 이어지자 에린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되도록 루시를 만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다른 시녀들은 루시가 이전과 비슷하다고 말을 했다.
꼬투리를 잡는 게 평소보다 줄었을 뿐 특유의 건방진 태도나 어투는 그대로라면서.
하지만 항상 루시의 곁에 붙어 다니던 에린은 루시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모든 걸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이전과 달리 루시는 여유를 가질 줄 알게 됐다.
질책을 하는 횟수가 줄었다. 화를 내는 횟수가 줄었다. 에린이 하는 일을 가만 내버려 두게 되었다.
칭찬에 가까운 말을 하게 되었다.
‘나쁘지 않네. 허접 시종치고는 말이야.’
머리를 빗고 나면 언제나 여기가 잘못됐다 저기가 마음에 안 든다 소리를 치던 루시가 웃음을 지어 보인 그 순간을 에린은 잊지 못했다.
루시가 쌓아 둔 일이 워낙에 많았기에 사람들은 아무리 에린이 루시가 달라졌다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설령 믿더라도 그 변화가 얼마 가지 않을 거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에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근거가 무어냐 그러면 말이 궁하지만 그래도 에린은 루시의 변화가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으리라 믿었다.
“허접 시녀.”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아가씨의 목소리에 에린이 어깨를 움찔했다.
“나 목말라. 물이랑 수건 내놔.”
“넵! 아가씨!”
에린은 자신이 사용할 줄 아는 유일한 마법인 냉기마법으로 차갑게 식혀 둔 물과 수건을 루시에게 건넸다.
루시는 갑작스런 차가움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에린은 이 순간을 좋아했다.
평소에 항상 뿌루퉁하거나 틱틱대는 표정만 짓는 루시지만 이 때만큼은 루시도 행복한 듯 느릿한 웃음을 지었으니까.
이렇게 웃으면 참 예쁘신데 말이야.
“허접시녀. 왜 징그럽게 웃는 거야? 기분 나빠.”
“죄송합니다!”
그런데 기왕 바뀌실 거면 어투도 바꿔주시면 안되려나.
*
내가 달리기를 시작하고서 6일이 되는 아침. 베네딕이 갑작스레 날 만나러 왔다.
아버지가 딸을 만나러 온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전에도 딸바보인 베네딕이 기습적으로 날 보러 온 일이 몇 번 있었고.
“우리 딸! 창고에 있는 영약 세 개를 다 먹었다는 게 진짜니?!”
허나 내 얼굴을 보자마자 베네딕이 꺼낸 말이 문제였다.
역시 가문에 있는 영약을 몽땅 다 처먹은 건 그랬나?
아무리 알른 가문이 규모 있는 백작가라도 영약은 귀중품일 테니까.
하지만 어떡하라고. 이미 입 안에 다 털어 넣어버렸는데.
이제 와서 몸 안에 스며든 영약을 뱉어낼 수도 없는 거 아닌가.
그래서 오히려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더니 베네딕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니?”
‘네.’
“그런데 뭐.”
내가 재차 수긍하자 베네딕은 허리를 굽히곤 조심스레 내 몸을 살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니? 영약 먹었을 때 엄청 아팠을 텐데 그건 또 어떻게 버텼니. 그리고…”
처음엔 그가 나를 혼낼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베네딕은 나를 걱정하는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뭐야?
‘안 혼내세요?’
“바보 아버님. 나 혼내러 온 거 아냐?”
“내가 널 왜 혼내야 하니?”
‘영약을…’
“내가 영약을 다 먹어버렸으니까.”
“그까짓 영약이 먹은 게 뭐가 대수니! 오히려 이 아버지는 영약을 다 먹은 네가 자랑스럽다! 무척 아팠을 텐데 그걸 견뎌냈다는 소리니까!”
‘그럼 왜 오신 건가요?’
“그럼 왜 온 건데?”
“혹시나 우리 딸 몸에 이상이 생겼을까봐 확인하러 왔단다!”
베네딕은 생긴 것만큼이나 배포가 큰 사람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딸사랑에 정신을 놓아버린 바보였다.
영약 같은 귀물을 혼자 독식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는 말이 칭찬과 걱정뿐일 줄이야.
베네딕은 내가 아카데미 시험에 부담감을 느껴서 영약을 먹었다 생각한 건지 나를 붙잡고는 여러 애정 어린 잔소리를 했다.
아카데미 시험이 아무리 걱정돼도 무리해선 안 된다드니.
그깟 시험은 떨어져도 괜찮다느니.
그보다는 네 몸이 더 중요하다느니 뭐니.
잔소리는 십 분을 넘어 삼십분이 동안 이어졌고 이윽고 한 시간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 때 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가면 오늘 하루 종일 이 트롤에게 붙잡혀 있어야 할 것 같았으니까.
‘저기. 다 알겠으니까 그만해주시면 안될까요?’
“바보 아버님. 짜증나. 그만해.”
어.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당혹스럽다 생각을 하면서 베네딕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석상마냥 굳어 있었다.
바보니 허접이니 하는 말 정도는 웃어넘기던 그도 짜증난다는 말에는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베네딕은 이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상처 입은 소녀마냥 어딘가로 도망쳐버렸다.
결과적으로 바라는 대로 되긴 했지만…
나중에 사과하러 가야겠지. 베네딕이 삐져버리면 여러모로 곤란하니까.
그 후 저택에서 빠져나온 나는 최근에 항상 그러던 것처럼 알른 가의 훈련장으로 나와 메이스와 방패를 든 나는 훈련장 외각을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게임 속 빌드를 지키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였지만 최근엔 달랐다.
나는 달리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하루 이틀 달리기를 한다 해서 변화를 체감하기란 쉽지 않았다.
한두달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의 체력이 좀 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지.
허나 이 곳에선 달랐다.
매일. 아니 매일도 아니었다. 그냥 두어시간 달리다 보면 체력이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게임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면 경험치를 얻고 레벨업을 하는 것처럼 달리기를 하다 보면 즉각적으로 체력수치가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원래 사람들이 운동을 꺼려하는 이유가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변화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것 때문인데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게 느껴지니 운동이 재밌을 수밖에 없었다.
목표로 한 열바퀴를 다 채운 후 잠시 쉬고 있는데 이전에 쓰러졌던 날 도와주었던 기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루시 아가씨. 오늘도 열심히 하시네요.”
이 기사는 내게 매몰찬 대답을 들은 이후로도 계속 날 신경 썼다.
배려를 해주는 게 고맙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 의심스러운 행동이었다.
소문도 안 좋고, 성격도 별로인데다, 아무리 배려를 해줘도 고맙다는 말 한 번 해주지 않는 싸가지 없는 백작 영애에게 굳이 다가올 이유가 뭐가 있겠나.
다른 마음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추측하기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두 가지였다.
이 기사가 백작의 외동딸인 루시의 마음에 들어서 인생역전을 하길 바라고 있거나.
아니면 이 사람이 단순히 메스가키에게 매도 당한느 걸 즐기는 정신 나간 마조히스트거나.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봤을 때 후자일 것 같진 않았으니 이 놈은 남자판 신데렐라가 되고자 야망가라고 봐야 했다.
아주, 아아아주 낮은 가능성으로 이 사람이 그저 고결한 기사일 가능성이 존재하긴 했지만 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조연으로도 등장하지 않는 NPC가 고고하고 고결한 기사일 리가 없잖아.
“체력이 많이 느셨더군요. 역시 알른가문의 영애십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걸 칭찬이라고 하는 거야?”
감사를 전하려던 말이 시비조로 바뀌어 버렸지만 메스가키 스킬의 언어왜곡에 익숙해진 탓인지 화도 나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제가 어찌 아가씨의 열정을 비꼬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선선히 웃으며 내 시비를 받아 주었다.
속으로는 분명 험한 말을 내뱉고 있겠지.
표정관리 장난 아니네. 결혼으로 인생역전을 꿈꾸려면 이 정도는 되야 하는 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결혼 해 줄 생각은 없지만.
시이벌. 내가 아무리 메스가키가 됐다지만 남자랑 사귈 생각은 없거든요?
메스가키가 된 것만 해도 억울해 뒤지겠는데 남자랑 연애를 하라고?
그럴 바에는 혀 깨물고 뒈지고 만다. 진짜로.
이런 내 적의가 시선에 담긴 건지 기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가씨. 이 주 뒤에 기사단이 던전에 들어가는 걸 아십니까?”
‘던전이요?’
“던전?”
던전이란 소울 아카데미의 중점이 되는 설정 중 하나다.
던전 그 자체는 여느 게임에 나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몬스터와 보물이 기다리는 장소라는 것.
특정한 규칙 없이 제멋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것.
오랫동안 방치해두면 그 안에 있던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기에 빠르게 토벌해야 한다는 것.
여러 등급으로 나뉘어 있고 등급에 따라 안의 규모도 등장하는 적도 달라진다는 것.
다른 게임과 설정이 다른 부분이라고 한다면 던전 토벌의 주체가 귀족이라는 걸까?
소울 아카데미에서 던전 토벌은 귀족의 권리이자 의무다.
외적들로부터 영민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영지 내에 던전이 나타나면 그 영지를 소유한 귀족이 던전을 토벌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던전을 직접 처리하지는 않는다.
던전의 위험도가 낮은 경우엔 그 안에서 나오는 것도 허접하다보니 모험가라 불리는 용병들에게 던전의 해소를 대리한다.
그렇지만 던전의 규모가 클 경우엔 다르다.
일정 크기 이상의 던전이 나타나면 영지의 귀족이 직접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출정하게 된다.
그런데 방금 이 기사는 베네딕이 이끄는 기사단이 던전에 들어간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렇단 소리는 영지 내에 위험한 던전이 생겼단 건데.
‘많이 위험한 곳인가요?’
“어떤 곳이야? 허접 기사가 벌벌 떨 정도로 큰 곳이야?”
“하하하. 아뇨. 저희라고 항상 위험한 곳에만 가는 건 아닙니다. 그런 고위 던전은 쉽게 생기지 않으니까요. 이번엔 중소 규모 던전에 훈련을 하러 가는 겁니다.”
어쩐지 던전에 간다고 말하면서도 긴장감이 없더라.
‘어디 있는 건데요?’
“어디로 가는데?”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반스라는 곳으로 갑니다. 거기에 사라지지 않는 던전이 있거든요.”
‘에반스?!’
“에반스?! 허접기사. 진짜야?!”
내가 벌떡 일어서면서 소리를 치자 기사는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스 근방에 있는 사라지지 않는 던전이라면 하나 뿐이야.
그렇지만 에반스 근방에 있는 던전에 관해선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다.
거기엔 전설급 메이스가 숨겨져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