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0
여기가 끝인가? 죽어라 내달린 끝에 던전의 마지막 문 앞에 도착한 아서는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이제 마지막 시련이다.”
허나 그의 옆에 있던 꼬마아이는 아서에게 잔혹한 진실을 알려주었다. 아직 남은 것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그 목소리를 들은 아서는 고개를 치켜들고 꼬마아이를 노려봤지만 꼬마아이는 팔짱을 낀 채 무덤덤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 곳까지 왔으면 알 터인데? 이 곳은 던전이다. 그럼 그 끝에 기다리는 건 무언가.”
던전의 끝에 무엇이 있는가. 던전의 주인이 있지. 이 곳에도 마찬가지인건가.
“…젠장. 이럴 때는 조금이라도 절차를 무시할 순 없나!?”
“앞서 했던 말을 꼭 다시… 빨리 들어가기나 해! 당장!”
꼬마아이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아서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며 뒤 쪽으로 고갤 돌렸다.
질척하고 검은 어둠은 몰아치는 파도처럼 빠른 속도로 던전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제기랄. 아주 잠시 멈춘 것 뿐이었나! 이대로 있다간 어둠에 잡아먹힐 것이란 생각에 다급히 보스룸에 손을 가져다 댄 아서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음을 던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다만 이 안에는 무엇이 있나!”
“그대의 악몽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너지지 마라! 그럼 된다!”
간절한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던전의 마지막에 발을 들인 아서는 보스룸의 풍경을 보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 안은 던전의 험악한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초원은 봄날을 맞이한 듯 자신의 활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드문드문 구름이 보이는 푸른 색의 하늘은 청량하다는 단어를 형상화 한 것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내 앞에서 웃음 짓고 있는 여인은 주변의 풍경처럼 생기 넘치는 옷을 입은 채 웃음을 흘리고 있다.
“어서 오렴. 아서.”
그의 악몽이 찻잔을 들고서 그를 맞이한다.
*
살갗의 털들이 삐죽 서는 느낌.
싸늘해진 등줄기.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본능의 경고.
모든 것들이 내게 이야기를 한다.
지금의 루카는 무척이나 위험하다고.
내가 거기에 해줄 대답은 간단했다.
그런 당연한 소리를 왜 지껄여! 누가 보더라도 저건 위험해 보이잖아! 다섯 살짜리 꼬맹이를 데려다 놔도 저거 보면 바로 엉엉 울겠다!
“처음은 가볍게 시작할까요?”
루카의 발이 떼어지는 순간부터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위에서 내리쳐지는 대검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지는 단순한 동작처럼 보이긴 하지만 손과 팔의 근육이 움직이는 거나 루카의 걸음으로 보면 저건 함정이겠지.
노리는 건 내가 겁을 먹고서 굳은 순간을 노려 옆으로 후려치는 쪽인가. 상대의 노림수를 읽은 나는 그에 맞추어서 방패를 움직였다.
루카의 움직임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체만 하고 그 후를 본 것이다.
방패를 내미는 타이밍도 정확해.
패링에 성공할 테니 충격이 그리 강하지는.
콰앙!
방패가 검과 부딪히는 순간 폭탄이 터진 듯한 굉음이 귓가를 가득 채움과 동시에 팔을 타고서 찌릿한 통증이 전해진다.
“정말. 당신의 방패술은 놀라운 경지라니까요.”
느긋한 루카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입술을 꾹 깨문다. 패링에 성공했음에도 이 정도 충격인가.
단순히 외형과 능력에 변화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신체능력도 강화된 모양이네.
“계속 가볼까요.”
육중한 대검을 몰아치듯 휘두르는 루카의 동작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예전부터 대검을 다뤄 온 사람처럼 말이다.
<루시. 괜찮으냐?!>
‘버틸 만 해요.’
그렇지만 그의 검에서 나오는 충격은 충분히 버틸만한 수준이었다.
위협적이긴 하지만 그 뿐. 라샤나 베네딕의 수준에 미칠 정도는 아냐.
그럼 막을 수 있어.
내가 대검을 상대하는 데 익숙하단 점도 유효했다.
알른의 기사들과 대련하다 보면 꽤 자주 나오는 무기니까.
길게 휘두를 수 없도록 거리를 좁히고 무기의 길이가 방해가 되도록 만든다.
거리를 벌리려는 상대의 의도를 계속해서 방해한다.
수많은 대련 속에서 만들어 온 전투 논리를 바탕으로 움직이던 중 갑자기 루카의 전신이 어둠으로 물든다.
처음으로 보는 현상에 순간 멈칫했던 나는 어둠을 뚫고서 튀어나온 도끼날을 보고 다급히 방패를 치켜들었다.
“…큽!”
적을 방패 채 반으로 갈라버리기 위한 일격이 내리 찍히며 전신에 거대한 충격을 선사한다.
그 충격을 버티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던 나는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비릿한 맛을 느끼며 루카의 굽은 눈매를 마주했다.
“이제는 깐족거리지 않으십니까? 벌써 기세가 죽으면 곤란한…”
루카의 목소리를 끊은 것은 옆에 있던 프레이의 기습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다 바람처럼 날아든 그녀는 정확하게 목을 노리고서 검을 휘둘렀다.
내게 집중하느라 뒤늦게 저를 눈치 챈 루카는 목이 반절쯤 잘려나간 채로 뒤로 물러섰다.
“이성을 붙잡는 게 더 힘들어졌네요. 이건 곤란하군요.”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미 죽었어야 할 치명상이었지만 루카는 태연한 웃음과 함께 자신의 상처를 붙잡았다.
그리고 루카의 손이 떨어진 순간 그의 목은 최초의 상태를 되찾았다.
“저거 뭐야? 신기하네?”
프레이의 태연한 목소리를 들으며 웃음을 짓는 루카를 바라본다.
그의 모습은 방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단순히 무장이 바뀐 수준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루카의 모든 것이 도끼라는 투박한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 변한 것이다.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의 치명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낸 모습까지 보면 지금의 루카가 어떤 악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건지 추측할 수 있다.
공허의 권능.
이 아카데미를 장악하고 있는 악신이 아그라의 힘을 빌려 루카에게 자신의 권능을 나누어 준 것이다.
쯧. 귀찮게 됐네.
루카만큼이나 공허의 권능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놈도 흔치 않은데.
세공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것에 손을 대 온 저 미친놈이 즉석에서 온갖 전략을 바꾸어가며 사용한단 거잖아.
아아악! 진짜. 아서 이 새끼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언제까지 쳐 자빠져 자고 있을 생각이야?!
설마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잃은 척 꿀 빨고 있겠다 이거냐!?
만약 이게 진짜라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아서!
네 인격을 바닥까지 끌어 내려서 다시는 세울 수 없게 만들어 줄 거야!
“영애. 제가 무얼 할 수 있는지 눈치 채신 듯 하군요.”
“뭘 말하는 거야?♡ 네가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추잡한 병신이란 거?♡ 여자애 하나 이겨 먹겠다고 자기 혼을 팔아넘긴 쓰레기라는 거?♡”
일부러 키득대는 소리를 내며 루카를 도발하자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어둠에 뒤덮힌 채로 달려든 루카가 내 머리보다 더 큰 둔기를 휘두르는 걸 보면서 방패를 치켜들었다.
또 다시 울리는 굉음. 온 몸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 나를 찍어누르겠다는 일념이 담긴 루카의 눈동자.
“알른 영애.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만 변화가 이 곳에만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내가 대꾸하지 않고 웃음으로만 대응하자 루카가 자신의 분노가 담긴 공격과 함께 입술을 나불거린다.
“악신의 권능은 이 결계 전체에 퍼졌습니다. 당신의 소중하신 분들도 지옥의 정경을 마주하고 있겠죠.”
…
“당신의 친우분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것을 들려드리지 못하는 게 한입니다. 그 시련을 넘어선다면 당신은 진정 별이 될 수 있을 텐데.”
“매도 받고 싶어서 아주 난리네♡ 그렇게 자기가 마조란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
내가 짜증어린 목소리를 내자 루카의 눈가가 굽는다. 그를 보고서 머리에 살짝 열이 올랐지만 난 목소리를 내는 대신 메이스를 휘둘렀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루카의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그라 이 좆같은 새끼가 나한테만 수작질을 벌였을 리가 있나.
분명 그 놈의 개입은 바깥에도 영향을 끼쳤을 거다.
제기랄. 위쪽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는 루카 이 변태 새끼를 떨쳐내야 하는데.
“입장이 반대가 되니 어떠십니까? 열이 받으시나요?”
미친놈이 내가 다급한 걸 알고 지연전을 펼치고 있어.
어떻게든 도발을 걸어 보면서 프레이의 기습으로 상처를 새겨 넣고는 있지만 공허의 권능 때문에 모든 것이 무마돼.
으아악! 젠장!
뭔가 방법이 없나?!
해답이 없나!?
생각해! 이 멍청아!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다니면서 이럴 때는 왜 아무것도 떠올리질 못 하는 건데!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으십니까?”
재차 루카의 공격을 받아낸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다가 문득 루카가 휘두르는 힘 속에서 자그마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녀석이 다루는 힘은 단순한 공허의 권능과는 달라.
그 위에 아그라의 힘이 뒤섞여 있어.
잘 생각해보면 애초에 이 녀석이 공허의 권능을 쓰는 것 자체가 이상해.
공허의 악신한테 아무것도 바치지 않은 녀석이 어떻게 공허의 권능을 이용하겠어.
…어?
잠시만.
이거 잘만 이용하면.
갑작스레 떠오른 발상에 눈을 크게 뜬 나는 필사적으로 그 발상을 붙잡았다.
가능해.
충분히 가능해.
발상의 끝에 도착한 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 양 끝을 끌어올렸다.
*
현 대륙의 최강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 마다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저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강함이 다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허나 대륙에서 가장 강한 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용.
하늘을 뒤덮을 것처럼 거대한 날개.
신화 속의 금속을 호수의 수면을 파고들 듯 가뿐히 꿰뚫는 발톱.
용암마저도 따사롭다 느끼게 만드는 비늘. 대마법사들도 무릎을 꿇을 막대한 마력과 세상 모든 것을 불태우는 불꽃.
용이란 종족이 지닌 특권이란 것은 다른 생물들이 경이로운 재능으로 평생을 바쳐야지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일 지어니.
용종이 최강의 종족이란 것을 부정하는 이는 어디에도 존재치 않으리라.
“순백의 주인께서 자신의 송곳니를 내려보내셨구나!”
사도의 환히 어린 목소리 아래에서 유덴이 눈가에 힘을 더한다.
성장을 끝마친 용 자체로도 끔찍한 재앙인데 그 용이 공허의 권능에 의해 강화된 상태로 찾아오다니.
정신이 나가버리겠군. 저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잖아.
“…검성님. 혹시 저건 환각이.”
“아니에요. 성녀님. 당신도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 안에 담긴 강대한 힘을.”
저만큼이나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가 환각일 리 없다. 설령 환각일지라도 저만한 기운을 품고 있다면 진짜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될 테지.
유덴이 단호하게 이야기 하자 페이비가 입을 꾹 다문다.
“파트란 영애. 마법진은.”
“…죄송합니다.”
고개를 돌린 유덴은 검게 물들어 있는 마법진을 보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방금 전에 어둠이 내리앉음과 동시에 저기에도 영향이 간 건가.
알른 가문의 빌어먹을 꼬맹이는 대체 뭘 계획 한 거야? 하. 진짜 돌아버리겠네.
“도망쳐요. 두 분.”
“…예?”
“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거에도 한계가 있거든요.”
유덴은 검성이란 지위를 지닌 뒤에도 수많은 강적들을 쓰러트렸다. 그 중에는 용의 피를 지닌 이들도 여럿이 있었지.
그렇기에 유덴은 자신이 저걸 감당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성체 한 마리라면 어떻게든 해봤을 거야.
그렇지만 저 녀석은 공허의 권능으로 강화된 상태인 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성의 영역이 사그라 들면 저 녀석과 함께 공허의 추종자들도 함께 상대해야 상황이야.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깎여갈 테고 저들은 더욱 더 강해지기만 할 게 분명한데 어떻게 저걸 이기겠어.
그럴 바에는 나 혼자 뒈지는 편이 낫지.
“그럴 수 없습니다! 검성님!”
“맞아요! 저희는 끝까지!”
“헛소리 할 시간 있으면 빨리 튀기나 해요! 당장!”
“크하하! 거 참 눈물나는 광경이군요!”
방금 전까지의 조급함은 어디로 간 건지 공허의 사도가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던 그 때. 유덴의 날카로운 감각이 아주 자그마한 변화를 잡아챘다.
방금 전까지 용을 휘감고 있던 기운 중 아주 작은 일부가 저 아래로 흘러가는 풍경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