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4
루카가 휘두르는 공격을 막아낸다. 악신 아그라의 기운을 가득 담은 공격을 주신의 신성이 담긴 방패로 튕겨낸다.
붉은 색으로 물든 눈동자를 내 붉은 눈으로 마주한다.
이해가 되지 않을 거다.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내가 왜 무너지지 않는 건지 말이다.
악신의 기운에 물든 루카는 모든 방면에서 나를 압도한다.
근력은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한 수준이고.
속도 또한 눈으로 따라잡는 게 한계일 지경이며.
공격 하나 하나에 담긴 위력은 내가 팔을 날려먹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들 정도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내가 루카를 상대로 대치를 이루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놀아줄 거면 좀 더 제대로 하지?♡ 이렇게 단조로우면 재미가 없잖아♡ 뇌도 좆처럼 작아서 생각을 하기가 어려운 거야?♡”
현실은 현실이다.
채앵!
루카의 공격은 또 다시 내 방패 앞에 가로 막혔다.
흐으으. 진짜 실시간으로 수명이 깎여나가는 듯한 느낌이네.
한 번 실수하는 순간 저 도끼날에 짓뭉개질거라고 생각하면 진짜 끔찍해.
모든 패턴이 즉사기인 보스라니!
이거 너무 좆망겜인 거 아냐!?
거기에 하나하나 대응하고 있는 입장이라 뭐라 할 순 없지만 밸런스는 좀 잡아줘야지!
허접 주신! 너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야!
채애앵!
방패 너머로 약간의 충격이 전해졌다.
타이밍이 살짝 엇나갔나.
젠장. 기운이 몰려들면서 좀 더 강화가 진행되는 모양이네.
객관적으로 지금 내가 벌이고 있는 일은 일종의 곡예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외줄을 타는 묘기.
휘청하는 순간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죽어버릴 위험천만한 짓거리.
심지어 내 발치에 있는 밧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얇아지는 중이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 곡예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보이지 않는 반대편에 언제 도달할 수 있을까.
조금씩 치솟아 오르는 불안을 짓누르며 나를 찌르기 위해 날아드는 창대 끝을 본다.
그 끝에 모여들어 폭발할 시간만을 기다리는 기운을.
그 때였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온 것은.
창대 끝에 맺힌 기운이 흔들린다.
그에 따라 루카가 내지르는 공격에 날카로움이 사라진다.
그 공격에 담긴 충격을 이용해 훌쩍 뒤로 물러선 나는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령의 제어권이 돌아왔다며 환호하는 아드리.
당혹에 빠진 공허의 추종자들.
점차 옅어져가는 주변의 어둠.
힘을 더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퍼져나가는 나의 신성.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께서 드디어 깨어나셨나.
열심히 자는 체를 하다 뒤늦게 누구도 자신의 냄새나는 입술에 키스해주지 않을거란 걸 눈치 챘나 보네.
키득키득 웃던 나는 주변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금 루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주변에 도사리던 어둠이 점차 허물어져 간다.
공허의 권능을 유지시켜주던 마법진의 힘이 사라짐에 따라 루카에게 주어졌던 힘도 옅어지는 것이다.
아그라의 분노가 사그라든 것은 아니기에 여전히 악신의 권능이 달라붙어 있긴 하지만 그저 그 뿐.
지금의 루카는 방금 전처럼 압도적이지 않다.
아르마디님. 빠른 밸런스 패치 감사합니다. 덕분에 가지고 놀기 좋아졌네요.
“왜 가만있어?♡ 날 위한 시련이 되겠다면서?♡”
방패를 슬그머니 내린 후 대놓고 웃음을 지어 보인다.
“찌질하고 치졸한 찐따 아그라가 도망쳐서 겁먹은 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개허접이구나?♡”
결계가 무너짐에 따라 공허의 추종자들이 무너져 가고 있다. 이제 남은 구심점은 저들이 아닌 루카다.
악신 아그라의 힘을 부여 받고 있는 저 녀석을 무너트린다면 저들은 완벽하게 와해되고 만다.
“아님 뭐야?♡ 설마 시련이라는 게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는 허접에 조루에 소추에 변태에 병신인 널 놀려선 안 되는 그런 거야?♡”
그러니 도발한다. 루카의 이성을 다시금 좀 먹는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못하게 그를 건드린다. 뇌를 거치지 않고 목소리를 낸다.
어떻게 놀리면 좋을까 고민할 이유가 어디 있어. 어디를 건드려도 열이 잔뜩 받을 것 같은데.
“푸하하핳♡ 그런 거라면 절~대 통과 못 하겠네♡”
어둠이 흐려짐에 따라 드러난 루카의 눈동자엔 벌건 실핏줄이 새겨져 있다.
“죄송합니다~♡ 페도 변태 교수님~♡ 제가 졌어요~♡ 교수님의 시련이 너무너무 어려워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힘줄이 선명하게 치솟아 있는 루카의 손이 할버드의 대를 잡는다.
“이제 뭘 하실 건가요?♡ 당신의 변태적인 성취향을 제게 강요하실 건가요?♡ 쿱♡ 벌건 눈으로 제 몸을 훑어보는 걸 보니 너~무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하겠네요♡”
루카가 자세를 취한다. 최초의 공격과 같은 자세. 나의 기억과 다를 바 하나 없는 자세.
“우와아♡ 취향에 조금 맞춰줬다고 흥분해서 달려들려는 것 좀 봐♡ 변태~♡ 역겨워♡ 나가 뒤져 버려♡”
나를 향하는 공격을 보며 방패를 든다. 과거의 기억을 쫓는다. 모니터 너머에 있던 나를 떠올린다.
그 시절의 내 노력을 상기한다.
그러고 머잖아 청량한 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퍼진다.
패링에 성공함에 따라 훤히 드러난 루카의 몸 안 쪽으로 파고 든다.
당혹이 서린 그의 눈동자를 보며 메이스를 치켜든다.
자. 루카. 내가 특별히 이번에 새롭게 얻은 스킬의 첫 실험대로 사용해 줄 게.
영광으로 생각하도록 해.
마조끼도 은근히 있는 너라면 곰의 괴력을 감당하고도 웃을 수 있을 거야.
그치?
스킬을 사용하겠다 생각하기 무섭게 인간을 한참 초월한 근력이 내 팔에 깃든다.
난 그 근력을 조금도 죽이지 않은 채 모든 걸 메이스에 담아 휘둘렀다.
루카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팔로 내 공격을 막아내려 했지만 인간의 가녀린 팔은 짐승의 괴력을 견디지 못했다.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일격이 닿음과 동시에 인간의 몸이 잠시나마 하늘을 난다.
일순 중력에서 벗어났던 루카는 이내 바닥에 떨어지더니 몇 번이나 바닥을 구르고서 널부러졌다.
…죽은 건 아니겠지? 그건 곤란한데!?
저 놈이 뒤져 마땅한 놈인 것과는 별개로 아직 쟤가 봐야할 게 있단 말야!
다급히 루카를 향해 달려간 나는 그의 숨이 붙어있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정신승리를 한 채로 뒤지게 내버려 둘 뻔 했잖아.
*
가장 먼저 변화를 느낀 사람은 조이였다.
에르기누스의 마법진을 해석하고 보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그녀는 마법진에 생겨난 변화를 즉각적으로 인지했다.
여태까지 마법진에 흘러들어오던 막대한 기운이 끊어졌어.
어째서? 무슨 변화가 생겼기에? 내가 뭔가를 잘못 건드린 건가?
또 얼빵한 짓을 한 게 아닐까 고민하던 조이는 마법진이 힘을 잃어가는 것을 보며 다급히 마력을 불어넣으려다 순간 멈칫했다.
아니지. 굳이 마법진을 지켜야 할 필요가 없잖아.
지금 이 마법진은 공허의 추종자들에게 힘을 더해주고 있어.
이게 무너져내린다면 지금 공허의 추종자들을 유지해주고 있는 막대한 힘도 사라져버릴 거 아냐.
이를 깨달은 조이는 오히려 마법진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마법진의 구조를 부수고, 어떻게든 이를 유지하고서 하는 비상 동력을 무너트리고, 마법진의 근간이 되는 부분을 지워버리고.
본래의 마법진이라면 조이가 지닌 능력정도로는 분해하기 어려웠을 테고, 설령 분해했다 한들 금방 복원됐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동력을 잃어버린 마법진은 자신의 붕괴에 조금도 대응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빠른 속도로 마법진이 붕괴된다.
그로 인해 생겨난 변화는 여럿이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결계였다.
결계가.
소울 아카데미 전체를 휘감고 있던 결계가.
공허의 권능에 의해 검정으로 물들었던 결계가.
학생들을 지키지 못하고 악신에게 힘을 건네주고 있던 결계가.
위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조금씩. 마력으로 이루어진 파편을 떨어트리며 무너져 내린다.
어느새 하늘에 자리한 태양의 따스한 빛이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오며 어둠을 물러서게 만든다.
“안 돼.”
그를 본 공허의 사도가 다급히 결계를 붙잡으려 하지만 결계의 금은 계속해서 커져가기만 한다.
“안 돼!”
사도가 결계 안에서 전능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던 건 어디까지나 에르기누스의 마법이 그에게 무한한 힘을 선사했기 때문.
그 전능이 사라진 지금 공허의 사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걸 보는 것뿐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파트란 영애.”
태양의 빛을 받은 유덴이 느슨한 목소리를 내자 공허의 사도가 목에 핏대를 세운다.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공허께서 남긴 심판자가 남아있다!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다!”
유덴은 사도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위 쪽으로 고갤 들었다. 사도의 말은 옳았다.
아직 허공에는 검은 비늘의 용이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검은 비늘의 용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이전처럼 강대하지 않았다.
악신의 권능에 의해 유지되던 모든 걸 잃어버린 용은 그저 하나의 생물일 뿐이었다.
“저거 말이지?”
그리고 단순히 생물일 뿐이라면. 힘의 대부분을 상실한 도마뱀에 불과하다면. 저 존재는 유덴에게 시련이 될 수 없었다.
점차 밝아지는 아카데미의 풍경 속에서 유덴이 검을 뽑아 든다. 그리고 그 검 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싣는다.
검성 유덴이 지닌 절기. 자신이 생각하는 최강의 남자와 맞부딪히기 위해 만들어낸 필살의 일격.
그녀의 인생을 담은 검로는 구름과 함께 용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럼 이제 진 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