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5
아서가 마법진에 개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꼬마아이가 그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고했다. 완벽히 장악당하기 전에 제어권을 되찾았군.”
“다른 마법진과의 연결을 끊어진 건가?”
“그래. 이제 악신에게 장악당할 일은…”
“그거면 됐다! 빨리 날 내보내다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단 말이다!”
“잠깐만 기다려라. 내 너에게 설명해줘야 하는 것이.”
“그 따위 것은 나중에. 아니지. 후일 다시 찾아오마! 그 때 지겹도록 이야기에 어울려주지.”
“허?! 자. 잠시! 진짜 조금이면 된다! 조금이면. 조금이면 된다고 이 성질머리 급한 자식아!”
꼬마아이의 욕지거리를 뒤로 한 채 시련의 공간에서 빠져나온 아서는 다급히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젠장. 다른 녀석들은 어디로 간 거지?
내가 시련을 치르는 동안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루시 알른 그 녀석이 다른 이에게 쉬이 당할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혹시나.
‘…죄송해요.’
울먹이던 루시의 얼굴을 떠올린 아서는 입술을 곱씹으며 다급히 방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복도 쪽에는 전투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이 안까지 누군가가 침입하는 걸 막기 위해 바깥으로 나갔다 판단하는 편이 옳아.
온갖 수단을 활용해가며 부서진 벽 바깥으로 나온 아서를 맞이해 준 것은 시녀의 외견을 한 사령이었다.
그녀는 아서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따라오라는 건가.
저 사령이 아드리가 부리는 것임을 아는 아서는 의심하지 않고 사령의 뒤를 따랐다.
마중을 보낸 것을 보면 최악의 상황은 아닌 듯 하구나.
상황이 정말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면 저런 여유도 없었을 터이니. 그렇게 얼마나 내달렸을까.
아서의 귓가에 전투의 소음이 들려왔다.
철이 무언가를 튕겨내는 듯한 경쾌한 소리.
폭음.
분노에 찬 누군가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
아직 전투가 진행 중인 건가!?
소리를 따라 한층 더 속도를 높인 아서가 마주하게 된 풍경은 자그마한 여자아이와 괴물의 전투였다.
자신의 몸에서 불길한 검정을 줄줄 흘려대는 괴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을 뿜어대고 있었다.
허나 그 맞은편에 선 여자아이는 괴물의 위압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붉은 색의 머리카락은 피로 흠뻑 젖어 본래의 빛을 잃어버렸고.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의 하얌은 더럽혀졌고.
말끔하게 정돈되었던 갑옷은 넝마가 되었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팔과 다리가 한계를 고하고 있음에도.
여자아이는 자신을 죽이기 위한 공격을 쳐내며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두렵지 않을까?
그럴 리 없다.
겉으로는 강한 체 해도 속은 여린 녀석이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리 없다.
아프지 않을까?
이 또한 그럴 리 없다.
주신의 사도라 한들 그녀도 사람이다.
통증을 모를 리가.
힘들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거친 숨이.
비틀거리는 다리가.
흔들리는 시선이.
그녀가 한계에 달했음을 증빙하고 있는데 어찌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
저 녀석은 그저 참고 있을 뿐이다. 인내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겪는 모든 고통을 마음 안에 묻고 있을 따름이다.
자신을 사랑해주던 사람을 잃은 고통을 마음 한켠에 밀어 넣었던 것처럼.
아서가 이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그의 눈에 보이는 풍경이 달라졌다.
루시 알른에게서 빛이 나고 있었다.
어둠으로 물든 지하의 정경 속에서 그녀의 주변만이 환한 빛을 내고 있었다.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정신을 놓고서 멍하니 루시가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던 아서는 괴물이 저 멀리로 날아가는 걸 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
“끄으으…”
괴상한 모양새가 된 팔을 치유하고 있으려니 절로 비명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스킬 위력은 참 마음에 드는데 반동이 너무 커.
공격 한 번 했다고 팔이 박살나는 게 말이야?
그나마 내가 주신의 사도라서 어찌저찌 써먹을 생각을 하는 거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뭐 이딴 쓰레기 기술이 있냐며 거들떠도 안 봤을 걸.
속으로 투덜투덜 불평을 내뱉고 있으려니 옆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 알른! 괜찮은가?!”
“무능하기 그지없으신 왕자님께선 이게 멀쩡해 보이시나요?♡ 왕족이신 당신께선 아랫 것들의 몸을 인형관절정도로 여기는 거군요?♡ 무능하고 게으르고 제멋대로인데 동정인 폭군이라♡ 푸흡♡ 이건 좀 재밌네요♡”
“…헛소리를 할 여유가 있는 걸 보면 멀쩡한가보군.”
무능한 지각생을 갈굴 생각으로 주절주절 목소리를 냈지만 아서는 버럭 소리를 지르긴커녕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얘 진짜 눈치 없네. 일을 제대로 못하면 샌드백 역할이라도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평소처럼 버럭 소리를 내질러줬으면 마음 편히 비웃어줬을 텐데.
재미 없어.
– 띠링.
– 띠링.
– 띠링.
어떤 식으로 긁어야 화풀이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내 앞에 푸른 색 메시지가 수도 없이 떠올랐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대부분 아르마디와 아그라의 이름이 적힌 것이었다.
개입을 하고자 하는 아그라와 그를 막고자 하는 아르마디의 싸움.
중간에 아그라가 끼어든 걸 보면 결국 허접 주신이 패배한 모양이네.
자기 사도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줬다고 해야 하나. 아님 자기 사도조차 지키지 못하는 개허접 무능 주신이라며 비난해야 하나.
어느 쪽이건 간에 좋아 죽을 것 같은 게 진짜 짜증나.
나중에 읽을 생각으로 푸른 창을 내린 나는 루카의 목덜미를 들어 아서에게 집어 던졌다.
“…루카 교수!? 이 괴물의 정체가 루카였나!?”
“그것도 몰랐어요?♡ 우아아♡ 진짜 멍청하시네요♡ 그런 머저리같은 눈치로 어떻게 왕궁에서 살아남으셨담?♡”
이번에는 제대로 긁힌 건지 아서의 얼굴이 벌개졌지만 여전히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진짜 뭐야? 얘 왜 이렇게 인내심이 강해? 혹시 되도 않은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건가?
“뭐. 됐어요. 그보다 무능한 왕자님.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를 열어주세요.”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 그건 무슨.”
“못 해요?♡ 마법진의 권한을 얻으셨으면서 그것도 몰라요?♡ 쿨쿨 자는 동안 대체 뭘 한 거에요?♡ 정말 입맞춤으로 깨워주길 바라서 자는 척 연기를 한 건가요? 개변태 왕자님?♡ 푸하핳♡ 이래서 동정은♡”
“아아아! 좀 닥쳐봐라! 지금 알아보고 있으니!”
“이렇게 귀엽고 자그마한 여자아이한테 그런 폭언을 하다니♡ 포용력이 이렇게 부족해서야♡…”
“좀 조용히 하래도?! 나도 권한을 얻은 지가! 아. 이건가.”
아서가 손을 휘저은 순간 우리의 앞에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가 열렸다.
흐응. 마냥 게으름만 부리고 있었던 건 아닌가.
“빨리 나가죠. 변태 교수한테 자기 주제를 알려 줘야 하거든요.”
*
리나와 에린을 양 팔에 짊어진 칼은 공허의 추종자들을 떨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에린 양! 이번에는 어디로!”
“이제 저 골목에서… 어라?”
“에린 양!? 지금 그럴 때가!”
“시끄럽다. 멍멍아. 이젠 그럴 때이니 멈춰서라.”
“예? 리. 리나님!? 갑자기 그러시면 중심이!”
칼이 당혹스러워하건 말건 간에 리나는 몸을 뒤틀어 그의 허리춤에서 빠져나왔다.
그 탓에 칼의 속도가 느려졌고 그들을 추적하던 공허의 추종자들이 코 앞까지 들이닥쳤지만 맨 땅에 발을 디딘 리나는 저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이제야 끝이 난 건가.”
검게 물든 결계에 자잘한 금이 새겨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가 부서지듯 비산하며 어둠이 무너져 내린다.
서서히 커져가는 구멍 너머로 흘러들어오는 태양의 따스한 빛은 이번에도 악신이 패배했단 사실을 증빙했다.
“참으로 피곤한 하루였어.”
공허의 추종자들은 혼잣말을 내뱉는 리나에게 무작정 달려들었지만 악신의 권능을 잃어버린 자들은 숲의 주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리나가 부리는 연기에 사로잡힌 이들이 허공에서 질식하여 바닥에 나자빠진다.
“이만큼 고생을 했으니 땀이 잔뜩 배긴 수건 정도는 주겠지?”
방금 전 보인 위엄과는 동떨어진 개소리를 하던 리나는 태양 아래에서 포효하던 용의 머리가 날아가는 걸 보며 담뱃대를 꼬나물었다.
“거 참 화려하군.”
“예. 정말 아름답습니다.”
“저것이 검성.”
*
지옥에서악마들에게 쫓기고 있던 비시는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내. 내 몸 멀쩡한 거 맞지?
구멍 난 데 없지!?
이리저리 둘러보며 자신이 멀쩡함을 확인한 비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다급히 고갤 돌렸다.
화창한 하늘 아래로 용의 거대한 육신이 떨어지고.
대지를 울리는 소리에 악몽에 빠져 있던 이들이 하나 둘 눈을 뜬다.
*
“어찌저찌 잘 해결된 듯 하군요.”
결계가 무너져내림에 따라 힘을 잃어버린 악신의 추종자들을 제압한 프레테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의 옆에 있던 교회의 주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쉴 때는 아닙니다. 안에 학생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예에. 어찌보면 이제부터 더 바쁠지도 모르겠군요.”
주신 교회와 예술 교단은 결코 좋은 관계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 자리에 선 성직자 중에서 그걸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지금 이 곳에 머무는 이들은 자신들의 신념보다 다른 이들을 더 중시하는 이들이었으니까.
“염치는 없습니다만.”
지친 몸을 달래며 아카데미 안 쪽으로 성직자들이 발을 움직이던 그 때. 아카데미 거리에 여럿이지만 하나처럼 들리는 갑옷의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 작업에 손을 얹어도 되겠습니까?”
삼엄한 기사들의 맨 앞에 자리한 이를 본 순간 프레테가 재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프레테의 옆에 서 있던 주교도 마찬가지였다.
주교는 자신이 바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표시했다.
그들의 앞에 선 이는 그럴 만한 지위에 선 존재였다.
“두 분. 굳이 그러실 필요는… 어머.”
프레테와 주교를 만류하던 이는 용을 넘어 하늘을 가르는 검을 보고서 눈을 굽혔다.
“저게 검성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