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8
절망이 서린 루카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나의 승리를 확신했다.
자신을 추하게 만들었던 별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냈음을 깨달은 그는 정신승리조차 하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리고 말았지.
그 과정에서 유덴한테 빚을 좀 쌓아두게 되긴 했지만. 뭐. 그거야 베네딕한테 잘만 이야기를 해주면 알아서 해결 될 문제니까.
“저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난장판의 수습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잠시 쉬어야겠다 생각하던 나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든 것은 뒤 편에서 들려 온 목소리였다.
왕국의 1왕비. 카바티 솔라딘.
내가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아 여겼던 사람임과 동시에 결코 약점을 잡혀서는 안 될 위험인물.
그녀는 시계탑의 계단 위에서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
시계탑 인근에 얼빠여우가 결계를 깔아 둬서 허락받은 사람 이외엔 들어올 수 없을 텐데?!
단순 무력으로 뚫어냈다 쳐도 얼빠여우나 할아버지가 눈치를 못 챘다는 게 말이 안 돼!
<…미안하구나. 눈치 채지 못했다.>
‘할아버지가요?’
<이런 경험은 처음인지라 나도 당혹스럽구나.>
당황이 서린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란 걸 설명했다.
뭐…지? 1왕비에게도 무슨 변수가 존재하는 건가? 내가 모르는 뭔가가.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문제이니 제게도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만 전후 관계를 따지는 것은 나중에 하자꾸나. 지금은 1왕비를 떨쳐내는 게 우선일 듯 하니.>
‘…네.’
할아버지의 말이 옳다. 어떻게 1왕비가 이 곳에 찾아온 건지는 나중에 생각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저 눈동자를 극복하는 것.
“차라리 협박을 하시죠? 망상병 왕비님?”
…야! 메스가키 스키이이이일!
대체 어떻게 변역이 되면 안녕하세요. 1왕비님. 이라는 대사가 저렇게 바뀔 수 있는 거냐!
저건 번역이 아니라 왜곡이잖아!
내용 자체가 달라졌잖아아아아아!
침묵으로 물든 주변의 싸늘한 분위기에 등줄기를 타고서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내가 이래서 1왕비랑 만나기 싫었던 건데. 이 꼴이 날 게 너무 뻔해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건데에에.
왜 이런 최악의 타이밍에 쳐 등장하시고 그러십니까. 빌어먹을 트럼프 왕비님. 왕궁에 틀어박혀서 왕국을 더 위대하게 만들 방법이나 고민 하시라고요오오오!
“망상병인가요?”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 속에서 목소리를 낸 것은 당사자인 1왕비였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그저 의문만이 담긴 어투로 말을 이었다.
“궁금하네요. 왜죠? 제가 딱히 망상이 심한 사람은 아닌 듯 한데.”
어. 그러게요? 왤까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굳이 메스가키 스킬을 변호해보자면 이 나라가 자신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망상에 빠진 정신병자시라 그런 게 아닌가 싶긴 한데 이걸 입 밖으로 내면 당신 허리춤에 걸린 검이 제 목을 노릴 것 같으니까 슬그머니 넘기도록 할게요.
“그 정도는 혼자 생각해보시죠? 명색이 왕비님이신데 그 정도 사고력은 있으시잖아요?”
“그치만 말이죠. 알른 영애. 당신은 예전에 절 미치광이 왕비님이라고 부르셨는걸요. 왜 호칭이 변화한 건지. 그 변화한 호칭이 왜 망상병인지. 정말 궁금하답니다.”
루시 양. 이미 전과가 있으셨군요. 하긴 왕한테도 가축 같다고 박아버렸는데 그 옆에 있던 1왕비한테 아무런 말 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음. …진짜 용케도 살아남았네. 루시도. 베네딕의 모근도.
옛 루시가 저지른 기행에 오랜만에 경악하고 있으려니 1왕비가 쓴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대답해주시기 싫은 듯 하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도록 하죠.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당신의 계획이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하나의 시련은 어찌저찌 잘 넘어갔지만 그 다음에 또 다른 시련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지?
아니. 애초에 메스가키 스킬의 번역으로 이걸 납득가게 설명하는 게 가능한가?
1왕비를 납득시키는 것보다 1왕비한테 최면을 걸어서 내 말을 믿게 만드는 편이 차라리 설득력 있을 것 같은데?
<이야기가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구나.>
‘…네? 좋은 쪽이요? 밑에 받침이 바뀐 거 아니고요?’
<그래. 명분은 우리 쪽에 존재하거든.>
할아버지가 지적을 한 부분은 이번 사태가 벌어진 원흉이 바로 눈 앞의 1왕비라는 점이었다.
악신의 추종자들이 아카데미에 침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1왕비가 무리하게 자신의 사람들을 아카데미에 심어 넣으려 했기 때문.
이 소란이 아니었더라면 아카데미 내부에서 이토록 큰 소동이 벌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을 주도한 범인 중 하나인 루카 또한 1왕비의 세력에 속해 있던 인물이니.
이번에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사건의 책임자는 내 앞에 선 1왕비고.
나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을 수습했을 뿐인 입장인 것이다.
<제일 귀찮은 상황은 상대가 자신의 입장을 무시한 채 권력으로 찍어 누르려 드는 것이었다만 다행히 1왕비에겐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 네 주변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그러기도 어렵겠지만.>
‘그럼 어떻게 하면 돼요?’
<평소에 네가 그랬던 것처럼 뻗대라. 그거면 충분하다.>
할아버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대충 이해는 했는데요.
뻗대라고요? 이 미친 년 앞에서?!
그랬다가 나중에 무슨 보복을 당할 줄 알고!
<이런 일로 보복할 사람이었으면 네가 예전에 벌인 일을 넘겨줬겠느냐.>
…어.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할아버지의 말에 저도 모르게 납득해버린 나는 1왕비의 앞에서 당당히 어깨를 폈다.
“무슨 계획이긴요. 망상병 왕비님이 권력 투쟁을 하느라 저지른 바보짓을 수습하기 위한 계획이죠.”
메스가키 스킬은 상황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데엔 적절하지 못하다. 이 스킬이 중간에 내 말을 어떤 식으로 번역할지 모르는 데 어떻게 상대에게 상황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그렇지만 상대의 잘못을 하나하나 꼬집는 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스킬이 없다.
내가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아서 열 받는 어휘를 선정해주는 이 스킬은 팩트폭행에 한없이 적합한 것이다.
“왕비님께서 뇌를 놓고 만들어낸 혼란이 아무것도 아닌 걸 믿는 정신병자들을 이 곳으로 들여놓았어요. 심지어 왕비님의 세력 안에 포함된 이 변태 교수는 그들을 막기는커녕 그들이 계획을 펼치는 데에 도움을 줬죠. 제가 이 멍청이들의 허접한 계획을 눈치 채지 못했다면 더 큰 일이 벌어졌을 걸요?”
왜 내가 추궁당해야 하느냐는 불만을 담아 쏘아붙였더니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 온 유덴이 말을 덧붙였다.
“정확한 전말을 알지 못합니다만 영애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습니다. 그녀가 있었기에 아무런 희생 없이 오늘이 지나갈 수 있었단 건 분명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1왕비님.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저희는 수많은 희생을 낳고서도 여전히 공허의 추종자들과 싸우고 있었을 겁니다.”
질새라 유덴의 뒤를 이어 프레테까지 날 두둔하자 1왕비가 살짝 눈썹을 치켜 들었다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두 분. 무언가 착각을 하시는 듯 하여 말씀을 드리자면 전 조금도 알른 영애를 추궁할 생각이 없답니다.”
…응? 추궁할 생각이 없다고? 그렇지만.
“전 정말 전후사정을 파악하고 싶었을 뿐이랍니다. 그래야 상황을 정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만 가보시죠? 망상병 왕비님께서 듣고 싶은 건 다 들으신 것 같은데?”
내가 아는 1왕비라면 결코 하지 않을 말에 놀라 일부러 신경을 긁어보았지만 1왕비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공허의 추종자와 전투를 벌이셨으니 많이 피곤하실텐데 시간을 끌었네요.”
진짜 이상하네? 대놓고 반기를 들었는데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고?
“마지막으로 루카 교수의 신병에 대한 것만 정리하고 가보겠습니다.”
“얘는 왜요? 설마 망상병 왕비님께서 받아가실 생각이신가요?”
“영애께서 허락해 주신다면요.”
1왕비의 눈웃음을 본 나는 머릿 속에서 여러 생각을 지웠다.
이 변화에 대한 부분은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은 지금의 대화에 집중해야 해.
“혹여 오해하실까봐 미리 설명하자면 당신의 공을 빼앗을 생각은 아니랍니다. 영애.”
“공 같은 건 신경 안 써요. 이딴 허접 쓰레기들을 상대한 게 무슨 공인가요? 이런 걸 자랑스레 늘어 놓는 녀석이 있다면 그건 이 허접들보다 더 한심한 녀석일 걸요?”
나는 공을 바라지 않는다. 겸손의 의미가 아니라 진짜 눈에 띄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랬다가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버리면 일이 귀찮아진다고!
주신 교회에서 내 쪽에 진지하게 관심을 쏟기라도 하면 진짜 힘들어진단 말야!
내가 뭣하러 유덴한테 온 관심이 집중되도록 했는데!
1왕비가 직접 공로자가 나라고 이야기를 하면 내 모든 고생이 물거품이 되잖아!
“그럼?”
“뭐라고 생각하세요? 망상병 왕비님?”
내 말대꾸를 어떤 의미로 해석한 걸까. 1왕비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내 앞까지 걸어와서는 허리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췄다.
“영애. 당신께서 저를 어찌 생각하시는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라는 사람은 왕국을 위해 모든 걸 내버릴 수 있는 인간이랍니다.”
그건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요.
당신이 왕국을 위한답시고 얼마나 미친 짓을 벌일 수 있는지를 다 보고 온 사람이 나거든.
어쩌면 당신의 광기를 당신보다 더 잘 아는 게 나일지도 몰라.
“그리고 루카 교수는 저의 기대를 최악의 방식으로 배신했고요.”
1왕비가 지은 눈웃음 사이로 그녀의 차디 찬 눈동자가 보인다.
너무나도 딱딱하게 얼어붙어서 평생 녹지 않을 듯한 얼음 같은 눈동자가.
“제겐 그를 벌해야 할 의무가 있답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무난한 선택은 그냥 루카를 넘겨주는 것이리라.
1왕비의 손에서 루카가 어떻게 되건 말건 내 알 바는 아니거든.
정신승리에도 실패한 허접조무래기한테 난 아무 관심이 없어.
이딴 쓰레기를 처리하는 걸로 권력자의 경계를 피할 수 있다면 대환영이지.
만약 내가 1왕비에 대해 몰랐다면 귀찮은 짐을 떨치게 됐다 환호하면서 1왕비에게 루카를 넘겼을 걸?
1왕비에 대해 몰랐다면 말야.
“흐응. 그래요?”
근데 난 1왕비가 어떤 인간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죄를 범한 루카의 신변을 확보했을 때 무슨 짓을 벌일지도 알고 있으며.
당신이 상식이란 단어가 통하는 인간이 아니란 것도 너무도 잘 알고 있지.
“근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그래서 넘겨줄 수 없는 거야.
1왕비의 눈웃음에 똑같이 눈웃음을 지어 준 나는 그녀의 가식적인 눈웃음 너머로 색이 더해지는 걸 봤다.
…
와아. 진짜 더럽게 살벌하네.
객기 부리지 말고 그냥 넘겨줄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