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9
내가 한 치 물러섬 없이 눈을 치켜뜨자 1왕비가 눈웃음을 살짝 지웠다.
“소울 아카데미는 왕국의 주요 시설 중 하나입니다. 그 곳에서 소동을 일으킨 자에 대한 문책을 왕궁에서 담당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텐데요?”
“망상병 왕비님. 자기 머릿속에서 옳다고 믿으면 다 옳은 게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 식으로 명분을 따지자면 허접 교회가 먼저죠. 이 변태 쓰레기는 악신과 관련되어 있으니까.”
당신 같은 뒤 구린 사람에게 넘길 바에는 페이비한테 넘겨주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자 1왕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히야아. 살벌하다. 살벌해. 조금 있으면 아주 칼을 뽑아 들겠는데?
<루카를 넘겨줘선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거냐?>
이상할 정도로 단호한 내 태도가 신경 쓰인 듯 할아버지가 물음을 던졌다.
‘네. 이 인간은 루카를 목표를 위한 도구로 써먹을 테니까요.’
카바티 솔라딘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인간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걸 보는 자신의 감정이 어떤 지도 중요하지 않다.
카바티 솔라딘에게 중요한 것은 오롯이 자신의 앞에 존재하는 것이 왕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뿐.
그녀의 광기를 아는 나는 루카를 벌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다.
루카 이 녀석이 1왕비의 기대를 배신한 건 사실이다.
그로 인해 1왕비가 분노한 것도 명백한 진실이겠지.
그렇다 하여 루카의 쓸모가 다했느냐고 묻는다면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왕국 이곳저곳에는 루카의 제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루카가 자신에게 부여한 시련을 극복한 자들. 루카가 지닌 검은 속도 모른 채 그를 은인이라 여기는 이들. 루카라는 스승 아래에서 인맥을 형성한 사람들.
한 평생 자신의 스승께 감사를 표시하던 이들이 과연 루카가 헛짓거리를 했다 이야기할 때 그 말을 쉬이 믿을까?
아니. 일부는 배신감에 치를 떨겠지만 대다수는 루카가 함정에 빠졌노라고 생각할 거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에게 생겨난 오해를 풀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이 쌓아온 것을 이용하겠지.
이들 말고 루카가 음지에서 쌓아온 인연도 얼마든 이용할 수 있다.
루카의 입에서 흘러나올 여러 정보와 1왕비의 권력이 합쳐진다면 귀족 몇을 압박할 명분 쯤이야 가볍게 만들어낼 수 있으니.
뭣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유덴이 문제다.
유덴 이 녀석은 사건의 전말을 모두 다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루카를 걱정하고 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체 하고 있지만 지금도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단 말이다.
만약 1왕비의 손에 루카가 들어간다면 그녀는 루카를 이용해 유덴을 뒤흔들겠지.
이외에도 루카를 그녀가 손에 넣음으로서 얻을 이득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루카를 제대로 처벌하겠다고?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겠다고?
헛소리.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냐. 루카를 가지고 헛짓거리를 하는 걸 내가 몇 번이나 봤는데 당신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으란 건지.
‘차라리 넘겨도 주신 교회에 넘기고 말지. 이 녀석한테는 안 돼요.’
<그렇다면 추후에 알른 가문을 거쳐 연락하라고 이야기해라.>
알른 가문을 거쳐서 연락하라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난 할아버지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가 할아버지에 되묻는 것보다 1왕비가 말을 꺼내는 것이 빨랐다.
“알른 영애.”
아아아. 젠장. 몰라. 할아버지도 정치질에 도가 튼 사람이니 저 말이 맞겠지.
“망상병 왕비님. 죄송하지만 당신의 헛소리에 어울려주기엔 제가 많이 피곤해서요. 더 재잘재잘 떠들고 싶으시면 알른 가문을 통해 주시겠어요?”
할아버지가 시킨 대로 이야기를 하자 1왕비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을 하다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동안 루카 교수의 신병은 알른 가문에서 확보해두실 생각이신가요?”
“글쎄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이 꺼림칙한 녀석을 가문 안에 내버려 둘 순 없으니 아마 높은 확률로 변태 사도에게 떠넘기게 되겠지만 굳이 지금 그걸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자. 이제 어떤 식으로 따지고 들까. 자신의 바람을 위해 날 어떤 식으로 압박을.
“음. 일단은 알겠습니다.”
…어라?
“상황이 정리된 후 알른 가문 측에 전령을 보내도록 하죠. 그럼 그 때 다시 대화를 나누도록 합시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왕비는 나와 유덴, 그리고 프레테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나서 다시금 시계탑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불청객이 떠나가며 찾아 온 침묵 속에서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뭐. 뭐지? 왜 쟤가 저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야?
1왕비는 자신의 뜻을 저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닌데?!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눈을 끔뻑이고 있으려니 옆에서 유덴이 감탄한 티를 냈다.
“알른 영애께서 이토록 수완이 좋으실 줄이야. 정말 상상 외네요.”
응? 뭔데? 내가 뭘 했는데? 난 그냥 할아버지가 시킨 대로 한 것밖에 없는데?
“상상 외라는 표현은 실례이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풍경은 모두 다 알른 영애의 계획인데 말입니다.”
…내 계획이라고?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프레테?
오늘 일 중에서 내 계획대로 흘러간 건 루카의 한심하기 그지없는 개허접 표정뿐인데?
그거 말고는 하나 같이 다 엉망진창이었는데 모두 다 내 계획대로라니?
“사도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희 아가씨께서는 모르셔서 안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고 싶지 않기에 하지 않으실 뿐입니다!”
야. 칼. 그건 칭찬이 아니라 내 욕 하는 거 아니냐?
모르고 안 하는 년보다 알고도 안 하는 년이 더 나쁜 년이잖아.
눈을 치켜 뜬 내가 칼을 노려보자 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거야? 저 말이 진심으로 날 칭찬하려고 한 말이라고?
…아. 젠장. 몰라. 피곤해. 오늘 하루 종일 뛰어 다니느라 혼이 나가버릴 것 같아.
당장에 처리할 것만 처리하고 좀 쉬자.
복잡한 건 조금 뒤로 미뤄도 되잖아.
“변태 사도. 이 허접 쓰레기 좀 가지고 있어.”
“기꺼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아저씨 성애자. 너도 옆에 붙어 있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말하지 않으셔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유덴이 고갤 끄덕인 걸 본 나는 루카를 대충 던져준 후에 시계탑의 계단에 발을 디뎠다.
“얼빠여우. 너 결계 제대로 쳐 둔 거 맞아?”
“본녀가 오늘 피곤한 것과는 별개로 결계에 이상은 없었다. 그 여자가 온 후에도 결계는 멀쩡히 자리하고 있었어.”
“거짓말하는 거면 허접견 발바닥 닦개로 써버릴 거야.”
“…진짜다! 그 여자가 안에 들어온 것과는 별개로 다른 침입자는 없었잖으냐!”
그러고 보면 그렇네. 1왕비가 안에 들어오긴 했지만 이외의 다른 사람은 시계탑에 자리하지 못했어. 위에서 그런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는데도 말야.
1왕비한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으으으. 머리 더 아파졌어. 1왕비한테 무슨 변수가 생긴 거야.
“고용주님!”
시계탑 바깥으로 나오기 무섭게 카리아가 내게로 다가왔다.
“괜찮아? 방금 전에 미친 년이 이 쪽으로 왔었는데!”
“망상병 왕비님? 알른 가문을 통하라고 하니까 그냥 가던데?”
“…나 진짜 영애님이 바보인지 다 알면서 일부러 속을 긁는 건지 모르겠어.”
내 말을 들은 카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숙였다. 내가 한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카리아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걸 보면 잘 하긴 한 모양이야.
역시 할아버지! 음습한 교회와 더러운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다워요! 대단해!
<…이런 걸로 칭찬할 시간에 저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이나 해줬으면 한다만.>
‘그런 식으로 나오시면 다음번엔 고맙다는 말도 안 할 거에요.’
<그럼 나도 안 도와줄 것이다만?>
‘죄송합니다.’
할아버지에게 얌전히 패배를 인정하고서 고갤 돌린 나는 순식간에 모습을 바꾼 카리아를 보고서 눈을 끔뻑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본래 모습이었는데 어떻게 잠깐 안 본 새에 아카데미 시종의 모습으로 변한 거지!?
카리아가 아닌 건가?
카리아는 떠나고 아카데미의 시종이 온 거야?
“걸으면서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 지 설명할게. 말하지 말고 들어. 어차피 고용주님 생각은 아니까.”
카리아 맞네. 신기하다. 진짜 마법 같아.
“상황 자체는 꽤 괜찮아. 마지막에 검성님이 화려하게 용의 머리를 날려준 덕에 거기에 시선이 집중됐거든.”
결계가 깨진 후 모두가 일어난 순간 유덴이 일을 처리한 덕분에 이번 일을 해결한 공 대부분은 그녀에게 돌아갔다.
“성녀님께서 검성님 옆에 있던 것도 도움이 됐어. 검성님 혼자 일을 벌였다고 하면 의심하는 사람이 생기지만 성녀님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면 다 납득하거든.”
진실을 아는 몇몇 이들을 제외하고서 페이비가 주신의 뜻을 대행한단 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주신 교회의 성녀이자 여태까지 수많은 업적을 쌓아 온 그녀는 성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렇기에 페이비가 유덴과 함께 공허의 추종자들을 물리쳤다고 한다면 모두 다 고갤 끄덕이기 마련이다.
만약 의구심을 내비친다면? 너 이단! 당하는 거지.
과정이 어쨌던 간에 결과는 내가 바라는 대로 됬네. 덕분에 내가 주신의 사도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지금 성녀님께선 주신 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후처리 중이고. 파트란 영애는 다른 영애들의 안전을 확인하고 있어. 3왕자님은 2왕자님 쪽으로 가셨고.”
“바보검사는?”
“3왕자님이 반 강제로 끌고 갔어. 그 옆에서 도망칠 기회만 노리고 있을 걸?”
친구들이 저 마다 할 일을 하고 있단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방금 전 죽을 뻔 했단 사실이 체감되지 않는 듯 태연해 보였다.
꿈에서 깨어나 얼떨떨해 하는 이.
시험은 어떻게 되는 거냐는 태평한 소리를 지껄이는 이.
제발 연기됐으면 좋겠다 지껄이는 이.
왕비의 호감을 사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니는 이.
나도 검성님을 보고 싶었다며 한탄하는 이.
역시 성녀님이라며 탄성을 터트리는 이.
저들의 대화에는 공포도 두려움도 악몽도 존재치 않았다. 모두가 평소와 같은 일상을 구가하고 있었다.
흐응. 뭐. 이거면 됐지.
누군가의 희생으로 슬퍼하고.
평생 빠져날 수 없는 악몽에 갖히고.
구석에서 머리를 끌어안고 벌벌 떠는 것보다야.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좋잖아.
그리 생각하며 고갤 끄덕인 나는 기지개를 키면서 푸른 창을 열었다.
자. 그럼 위대하고 위대하신 아르마디님께서 내게 무얼 주셨는지 확인해보도록 할까.
당신의 사도로써 치졸하고 추잡한 병신허접 아그라한테 엿을 제대로 처먹였으니 상당한 걸 주셨을 거라 믿습니다.
모든 선신의 주 되시는 아르마디님께서는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화끈하시잖아요? 그쵸?
보상에 따라 즉시 개허접변태사디마조페도성범죄자주신으로 격하할 준비를 하며 메시지를 연 나는 맨 앞에 떠올라 있는 문구를 보고서 눈을 끔뻑였다.
[아서 솔라딘의 호감도가 70을 넘어섰습니다!]
[아서 솔라딘이 당신께 깊고도 깊은 은혜를 느낍니다!]
넹?
…
내가 뭐 했나?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