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
합격을 했단 사실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내가 입학시험에서 보여준 게 얼마나 많은데!
대련에서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고, 비록 중간에 사고가 있긴 했지만 던전 공략에서도 놀라온 성과를 냈다.
그러니 필기시험이 망해도 특별 입학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란 자신이 내겐 있었다.
그렇지만 신입생 대표 연설이라니.
이런 걸 왜 나한테 맡기는 건데?!
대표 연설이라는 건 신입생 중에서 가장 성적이 뛰어난 사람이 맡는 거잖아!
내 성적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그럴 리가!
실기 시험에서 거둔 성적이야 높겠지만 필기시험 성적이 그만큼 나올 리가 없잖아!
던전학빼고는 거의 던진 거나 다름없었는데 대놓고 천재라는 설정이 붙어 있는 3왕자를 이겼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래. 내가 좀 양보할게.
겨우 두 달 남짓 공부를 한 할배가 내놓은 대답이 모두 정답이었다고 치자고.
근데 마법학은 그런 도움도 없었잖아.
다이스 갓이고 개뿔이고 그냥 연필 던져서 찍었단 말이야.
한 과목을 던져 버렸다고!
근데 어떻게 내가 신입생 대표 연설을 맡을 수가 있는 거냐? 어?!
분명 무언가 잘못된 걸 거야.
무슨 절차상의 오류 때문에 내가 잘못 선정된 거겠지. 그래야만 해.
나는 눈앞에 닥친 현실을 부정하면서 입학통지서를 읽어 나갔다.
무언가가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기를 바라면서.
그렇지만 현실은 비정했다.
소울 아카데미는 자신들이 한 일에 오류가 없었음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내게 여러 팩트를 들이밀었다.
‘루시 알른 영애께서 시험에서 거두신 성적은 구체적으로 이렇습니다.’
‘국어 87점’
<내 말하지 않았느냐. 귀족이라면 어휘를 사용함에 있어서 실수가 없어야 한다고.>
‘역사 98점’
<무언가 실수한 부분이 있나보구나. 다 맞추었다 생각을 했거늘.>
‘던전학 100점’
<허어. 기이한 답을 여럿 적어 내더니 그게 다 맞는 소리였단 말이더냐? 과연 자신만만할 법 했구나.>
‘마법학 68점’
<…이건 무언가가 잘못되지 않았느냐? 분명 그대는 마법학에서 문제를 푼 적이 없을 터인데 어찌 68점이란 성적이 나온단 말인가.>
‘대련 91점’
‘던전 공략 100점’
<이것은 그리 놀랍지 않구나. 네가 거기서 뛰어난 모습을 보인 건 사실이니.>
‘총합 544점으로 루시 알른 영애께서는 이번 년 소울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둠과 동시에 소울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이에 저희는 알른 영애를 신입생 연설 대표로 선정하려 합니다. 편지를 수신하셨다면…’
글을 끝까지 다 읽은 나는 편지를 접어서 편지봉투에 넣은 다음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허나 편지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쓸모없는 허접 기사가 놀라운 반응속도로 편지를 잡아챈 것이다.
“아가씨. 이걸 왜 던지십니까! 가주님께 보여 드려야.”
“허접. 입 다물어.”
“옙.”
안 그래도 머리가 어지러워서 정신이 나갈 것 같은데 왜 난리를 치는 거야?
모시는 사람의 발에 짓밟히고 싶다는 변태같은 욕망을 각성하기라도 한 거야? 응?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자 칼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왜 그러냐고요?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고 있어요?!’
이 일의 원흉이나 마찬가지인 인간이 대체 왜 그러냐고?!
할배. 당신이 쓰잘데기 없이 똑똑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을 안 벌어졌을 거 아냐!
왜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해서 이렇게 높은 성적을 만들어 낸 거야!
그렇게 자기 지능이 높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어?!
<모두를 대표해 연설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자리이지 않으냐.>
‘영광이요?! 할아버지. 제가 지닌 축복 까먹었죠?!’
<아.>
할배. 내가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싫어서 이 난리를 치는 것 같아?!
내가 태생이 아싸라 남들 앞에 서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건 맞아.
그렇지만 하라 그러면 할 수는 있어!
개판난 평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잖아. 득밖에 없는 일을 내가 왜 거절을 하겠냐고!
메스가키 스킬만 아니었더라도 할배가 말한 것처럼 영광스러운 자리라 생각하고 받아들였을 거야!
근데 나한테는 메스가키 스킬이 있잖아!
‘할아버지. 생각해봐요. 여러 귀족들이 뭉친 자리에서 제가 허접이니 좆밥이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걸!’
수많은 유력자들이 나만을 바라보는 상황에서 연설문을 읽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았다.
‘안녕. 나보다 멍청한 허접들. 루시 알른이야. 너희들이 얼마나 좆밥이었길래 내가 이 자리에 선 걸까? 하기야 허접 아카데미에 지원한 쓰레기들이니까 좆밥일 수밖에 없나?’
끔찍했다.
물론 메스가키 스킬은 존댓말을 해야 할 땐 존대를 하니까 이보다는 순화가 되겠지.
그래도 연설을 하는 동안 허접이니 좆밥이니 머저리니 병신이니 하는 단어가 시도 때도 없이 튀어 나올 거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 내 평판은 어떻게 되겠는가.
소울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나를 미친놈이라 생각할 것이고, 왕가의 사람이고 귀족들이고 가릴 것 없이 나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었다고 확실할 테고, 심지어 평민들조차도 나를 피하고 다닐 거다.
내가 이전에 상상하던 아카데미 생활보다 끔찍한 상황이 펼쳐진다는 소리다!
안 돼.
이 미래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걸 막아야 한다고.
얼굴을 쓸어내리던 나는 고개를 들어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지켜보는 칼을 바라보았다.
‘칼…’
“야. 허접. 너 소울 아카데미 졸업했잖아.”
“예. 그렇습니다.”
‘신입생 대표 연설을 거부할 수도 있나요?’
“이 쓰잘데기 없는 연설을 거절할 수 있어?”
“어… 모르겠습니다.”
‘네?’
“뭐?”
“전례가 없습니다. 소울 아카데미의 신입생 대표 연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신성 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뛰어남을 증명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아카데미 역사상 이를 거절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게…’
“그게 규칙으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닌가 봐?”
“그렇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래? 그럼 내가 허접 아카데미의 최초가 되면 되겠네.”
괴상한 사람이라고 여겨지겠지만 여러 유력자들에게 미친년으로 찍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리 결정을 내린 나는 칼의 손에 들린 편지를 가로채듯이 뺏어들고는 저택으로 향했다.
신입생 대표 같은 건 절대 할 수 없다는 편지를 적기 위해서.
그 쪽에서 어떤 대답을 할진 모르겠지만 반드시 거절하고 말겠어.
빙의자가 지닌 손 패가 얼마나 방대한지를 알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내 의사를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
“그래서 차등인 본인에게 대타를 맡기겠단 소린가?”
통신 마법을 통해서 이번 입학식의 대표를 맡아달란 이야기를 들은 3왕자 아서 솔라딘은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가감없이 전달했다.
무례하다 못해 웃긴 이야기였다.
자신이 다른 이에게 뒤쳐저 1등을 빼앗긴 것도 짜증나 죽을 지경인데 그 1등이 선심을 쓰듯 신입생 대표 자리를 넘기겠단다.
자신은 그런 영광에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신입생 대표라는 영광을 거머쥐기 위해 평생을 내달려 온 본인을 바보취급 하는 것인가?
아서도 그럴 리 없다는 걸 이성적으론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감성은 달랐다.
그의 마음은 계속해서 온도를 높일 뿐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아서는 입 안에서 피맛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입술을 강하게 씹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빌어먹을.
그가 여태까지 신입생 대표 자리를 바라왔던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가 바라던 풍경은 소울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음으로써 1등을 차지해 신입생 대표가 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 따위 방식으로 양보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 신입생 대표 자리를 포기한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괘씸하구나.
본인을 소울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신입생 대표 자리를 거절한 사람의 뒤치닥거리를 한 병신으로 만들려 하다니.
“미안하지만 거절하겠네.”
<알겠습니다.>
아서가 단호히 거절의 의사를 표하자 통신 마법 너머의 사람도 그 이상 아서에게 무언갈 권하지 않았다.
“잠시.”
통신 마법이 끊어지기 직전 아서가 상대방을 불렀다.
“뭐 하나만 물어보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본래 신입생 대표가 되어야 할 사람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겠나? 어차피 머잖아 알려질 사실이지 않나.”
소울 아카데미 입학자 상위 20명의 성적은 입학식과 동시에 공개되니만큼 숨길 이유가 없는 정보다.
통신 마법 너머의 사람은 잠시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아서의 물음에 답했다.
<알른 가문의 루시 영애입니다.>
“루시? 내가 아는 그 알른 가문의 영애가 맞나?”
<상상하시는 게 옳을 겁니다.>
루시 알른.
아서는 사교계에 나간 일이 없기에 루시 알른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에 관한 소문만큼은 익히 들어 보았다.
본디 소문이라는 것은 좋은 것보다는 안 좋은 것이 더 쉽고 빠르게 퍼져나가는 것이니까.
이름보다는 알른 가문의 수치라거나 망나니 영애라는 호칭이 더 자주 사용되던 그 여자가 아카데미의 신입생 대표가 될 뻔 했다고?
그 무슨.
“설마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난 사고에 대한 보상 개념인가?”
<아서 왕자님. 저희 아카데미는 시험의 성적에 관해 언제나 공정을 기하고 있습니다.>
아서는 상대의 말을 듣고서 무척이나 실례되는 이야길 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무마하기 위해 뇌물로 대표 자리를 준 게 아니냐는 소릴 한 거니까.
“미안하군. 살짝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야.”
<아닙니다. 왕자님께서 아카데미의 공정함을 알아주셨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래. 고맙네. 이만 끊지.”
<예. 평안한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거 아는가?
자네가 말하는 평안한 하루는 방금의 통신으로 날아가 버렸다네.
통신 마법이 끊어진 후에 아서는 등받이에 기대어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루시 알른.”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 군.
소울 아카데미의 엄격한 시험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둔 사람에게 가문의 수치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
영광이라면 모를까.
“루시.”
뭐어. 그녀가 영광이건 수치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녀가 어떤 사람이건.
어떤 성격을 지녔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녔건.
아서 솔라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관련이 있는 건 둘 뿐이었다.
루시 알른이 본래 그가 지녀야 할 영광을 빼앗아 간 존재라는 것.
그리고 어줍잖게 배려하는 체하며 그를 모욕한 인간이라는 것.
그 뿐이었다.
“그 낯짝을 볼 날을 기대해야겠군.”
어떤 인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모욕을 되갚아 주고 말겠다.
반드시.
*
신입생 대표라는 자리를 걷어찬 이후로 난 항상 마음이 편안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잡음이 있었지만 입학시험에서 겪었던 사고를 들먹이니까 넘어가 주더라고.
진짜 다행이야.
최악의 경우에는 입학식 날에 노쇼하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는데 일이 쉽게 풀렸으니까.
그 뒤로 나는 소울 아카데미의 입학식이 열리는 날만을 기다리며 평소처럼 수련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달리고, 점심엔 대련을 하고, 저녁엔 신성 마법의 연습을 하는 나날.
너무도 평안해서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활이었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을 맞이했다.
이제는 영지를 떠나 아카데미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