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0
루시가 시계탑에서 일을 마무리하던 그 때.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온 아서는 시련의 세계에서와 달리 멀쩡한 다리를 움직여 아카데미 거리를 내달렸다.
조이나 성녀님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른 이들은 그렇다 쳐도 루시 알른이 그 두 사람을 위험한 사지로 내몰았을 리 있나.
허나 형님은 아니다. 루시 알른이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해할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여 자신과 악연을 쌓은 이조차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 선인도 아닐 터이니.
지난 번 대화 이후로 2왕자와 어느 정도 연을 쌓은 아서는 혹여나 그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다급히 발을 움직였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보다시피 멀쩡하다. 아우야.”
여러 사람들 사이에 둘러 쌓여있던 2왕자 세실 솔라딘은 아서의 목소리에 웃으며 대답을 건네주었다.
“솔직히 말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체감도 없구나. 꿈 속에서 죽어라 고생하다 일어나 보니 모든 일이 끝나 있다니 말야.”
세실이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길 하자 그의 세력에 포함된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두들 비슷한 감상을 품고 있는 듯 했다. 그걸 가만 보던 아서는 미묘한 감정을 감추며 겉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잠들어 있던 이들에게 아카데미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은 그저 어둠과 함께 걷혀버릴 자그마한 소란에 불과했던 것인가.
누군가가 울부짖는 것보다야 이 편이 낫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만 마음으로는 납득하기가 어렵군.
“보아하니. 아서 넌 그렇지 않은가 보구나.”
“…예? 형님. 그게 무슨.”
“자. 다들 할 일을 하러 가라. 나는 동생과 따로 할 말이 있으니.”
“허나 2왕자님.”
“뭐냐. 오랜만에 나와 몸을 움직여볼 테냐?”
“아닙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람을 흩어버린 세실은 저들이 확실히 떠나간 걸 확인하고서 아서에게 눈짓을 건넸다.
“켄트 영애는 떠나보내지 않아도 괜찮으냐?”
도망치는 이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던 프레이는 세실이 자신을 부르자 왜 그러냐는 듯 고갤 갸웃했다.
예의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태도였지만 예전부터 프레이가 어떤 인간인지 느껴왔던 그는 무어라 하는 대신 웃어준 후 아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 꿈 바깥을 함께한 동료인지라.”
“그래?”
“그리고 이 망나니 같은 녀석을 내버려두면 무슨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습니다.”
당장 여기까지 오는 길에도 외부의 기사를 보고서 싸워보고 싶다 달려들려던 프레이다. 그녀를 내버려뒀다간 또 다른 소란을 일으킬지 모른다.
“내 평가가 너무해.”
“평가를 너무하게 만든 것은 너다.”
투덜거리는 프레이와 단호하게 말을 끊는 아서의 모습에 피식 소리를 낸 세실은 아서의 손가락 쪽에 눈짓을 했다.
그것만으로 의미를 파악한 아서는 주변과 소리를 차단하는 결계를 쳤다.
“배운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안다만 깔끔하구나. 형님이 결계를 펼치던 것과 비슷해보여.”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아직 큰형님께 비견되려면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 겸손할 필요 없다 생각한다만. 뭐. 이건 대충 넘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꾸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세실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아서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 이야기하기로 결정 내렸다.
만일 루시 알른이 자기가 눈에 띄는 걸 바랐다면 이런 귀찮은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을 리 없다.
그 녀석은 자신의 이름이 널리 퍼지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 나도 그 녀석의 의사를 배려하는 것이 옳다.
“짧게 요약을 하자면…”
아서의 설명은 간단했다.
이번 방학 때 생겨난 혼란 속에 공허의 추종자들이 아카데미에 침입했고, 중간고사 때를 노려 일을 벌였지만 마침 아카데미에 방문했던 검성이 성녀와 함께 공허의 추종자를 격퇴했노라고.
“그 검격의 주인이 검성님이셨나. 하긴. 그 분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일검으로 용의 목을 떨어트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세실은 아서의 이야기를 듣고서 너무나도 간단히 납득을 해버렸다. 검성이 지닌 압도적인 실력과 성녀라는 존재의 특이성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대단하신 분이야. 성녀님도. 검성님도.”
세실이 진심으로 고갤 주억거리는 걸 본 프레이는 참지 못하고 세실에게 무어라 하려 했다.
허나 그녀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보다 아서가 그녀 몰래 준비한 마법이 입을 가로막는 것이 더 빨랐다.
입이 막힌 프레이는 성난 눈으로 아서에게 불만을 표시했지만 아서는 되래 그 눈동자를 노려봤다.
누구는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줄 아느냐.
나도 거슬린다.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어가며 싸우던 루시 알른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리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망나니로만 평가받을 그 녀석을 생각하면 열불이 난단 말이다!
근데 이 또한 루시 알른 그 녀석이 선택한 길이지 않나!
그럼 존중해야지!
그 녀석이 직접 무어라 하는 게 아니라면 꾹 참아야 해!
이러지 않으면 루시 알른에게 민폐가 될 테니까!
아서의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느낀 걸까. 눈을 끔뻑이던 프레이는 얌전히 뒤로 물러섰다.
“아우야. 결계를 풀거라.”
“…예?”
“1왕비님께서 이 곳에 자리하셨구나.”
세실의 말을 들은 아서는 깜짝 놀라 뒤 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저 멀리에서 솔라딘 왕국의 1왕비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부드러우나 차가운 미소와 함께.
*
으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호감도가 오른 거면 좋은 일이니까 넘기자.
아서랑 앞으로도 계속 함께해야 할 텐데 걔가 날 좋게 생각해주면 좋지. 뭐.
아서의 호감도에 대한 문구를 내리자 아르마디와 아그라 간의 치열한 신경전이 담긴 문구가 잔뜩 나왔다.
이미 다 지난 일이라 생각하며 그것들을 스팸문자마냥 휙휙 넘기고 나서야 내가 찾아 헤매던 문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퀘스트 클리어!]
[당신은 아카데미 교수 루카가 만들려 했던 시련을 시련이 아닌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공허의 악신이 부활하려는 것을 막는 데 성공했습니다!]
[악신 아그라의 개입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화적인 업적!]
자! 아르마디님! 빨리 저에게 당신이 준비한 걸 보여주세요!
이미 제 머릿 속에는 당신을 칭찬하기 위한 백가지 방법이 준비되어 있다고요!
참고로 당신을 비꼬기 위한 백가지 방법도 준비되어 있으니 처신 잘 하도록 하세요!
아. 이 말은 하지 말 걸. 변태 마조인 저 인간이 내가 어떤 식으로 조롱할지 두고 볼 것 같잖아.
[당신의 분투를 본 무예의 신이 마음을 풉니다!]
잔뜩 기대를 하고서 본 다음 메시지는 내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어. 음. 갑자기요?
아니. 절 싫어하던 마음을 푸셨다니 감사하긴 한데 제가 뭐 했나요?
그냥 게임에서 하던 것처럼 했을 뿐인데?
[무예의 신이 당신에게 조언을 건넵니다!]
[부드러움과 강함은 정반대에 있지 아니하니.]
어어어. 조언까지 해준 걸 보면 내 뭔가가 마음에 들긴 한 것 같은데.
진짜 모르겠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건지. 그리고 또 저 조언은 무슨 소리인지.
이런 거 볼 때마다 그냥 알아듣게 말해주면 안 되나 싶어.
왜 굳이 의미심장한 어투로 이야기를 하는 거람?
그냥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시면 더 좋을 거에요. 라고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할아버지라면 알지도 모른단 생각에 무예의 신이 해 준 조언을 전해줬더니 할아버지가 탄성을 내질렀다.
<…과연! 그런가! 그런 건가!>
‘저거 무슨 뜻이에요?’
<잠시 말 걸지 마라. 머릿 속에 떠오른 깨달음을 정리하느라 바쁘니. 나중에 정리가 끝나면 이야기를 해주마.>
여전히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할아버지가 잔뜩 신이 난 걸 보면 중요한 말이긴 했나봐.
나중에 할아버지가 해주는 설명을 들으면 나도 저게 무슨 의미인 지 알 수 있으려나.
[루카의 시련을 깨부숨으로 인해 여러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힘이 소폭 상승합니다.]
[민첩이 소폭 상승합니다.]
[신성이…]
다음에 나온 문구는 내 여러 능력치들이 상승했다는 것이었다. 루카가 내어 준 시련을 극복할 때마다 지겹도록 보았던 문구들이네.
안 봐도 뻔하지 뭐. 신체 능력만 잔뜩 오르고 지능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을 걸?
루카와 관련된 시련을 극복할 때마다 항상.
[지능이 상승합니다.]
“에엑?!”
결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문구를 마주한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고용주님.”
“아냐. 신경 쓰지 마. 괜히 노처녀 아줌마의 흰머리를 늘리고 싶지 않은 걸.”
“…으음. 일단은 알겠어.”
덩달아 놀란 카리아를 대충 수습한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고서 눈 앞의 문구를 다시 확인했다.
[지능이 상승합니다.]
이거 진짜지? 내 지능이 올라간 거지!? 그것도 소폭이 아니라 그냥 상승한 거잖아!
와아아! 진짜 대박이다! 이러면 지금 내 지능이 70을 넘겼을지도 모르겠는데!?
드디어 나 빡대가리에서 탈출할 수 있는 거야!? 그런 거야!?
아르마디님! 믿고 있었습니다! 역시 당신은 당신의 사도가 가장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아는 분이군요!
평소에도 이렇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면 진지하게 당신을 믿었을 텐데!
아니지! 제 헛소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부터라도 깊은 믿음을 지니고 당신을 찬양하도록 할 테니!
아아아! 믿쑵니다! 아르멘!
지능이 올랐단 사실에 신이 나서 그 어느 때보다 열성적인 기도를 하고 있으려니 띠링하는 알림음이 내 귓가를 스쳤다.
아직인가요!? 아직 더 많은 게 남아 있는 거군요! 아르마디님!
[당신이 벌인 위대한 업적에 주신 아르마디가 감탄합니다.]
[주신의 축복이 당신의 안에 서립니다.]
[정화의 기적을 펼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