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1
사람들이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나며 아카데미 전체가 시끄러워 지던 그 때. 마법학과의 학장은 무너져내린 결계를 보자마자 다급히 결계의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마지막까지 깨어있던 이들이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아카데미의 결계가 검게 물들면서 일이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내포하는 바는 공허의 추종자들이 아카데미의 결계를 장악했다는 것!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가 남긴 마법진은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신용이 있는 자들만이 아는 곳입니다.
그런 장소가 발설되었다는 것은 내부자가 악신의 추종자들에게 협력했다는 이야기일 테죠.
아마 높은 확률로 현재의 마법진이 지닌 약점 또한 간파되었겠네요.
에르기누스라는 대마법사가 지닌 재능이 너무도 뛰어났기에 생긴 문제점.
그가 마법진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기에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마법진의 완벽한 해석을 해내지 못했단 것.
그 때문에 마법진을 제대로 건드리질 못해 서서히 마법진이 노후화 되어간 탓에 생긴 여러 빈틈.
만약 이를 악신의 추종자들이 알아차리고 파고 들었다면 지금 마법진은 상당히 망가졌을 겁니다.
어쩌면 기존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태일지도 몰라요!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죽어라고 내달린 학장은 결계의 마법진이 있는 곳에서 머리를 쥐어싸매고 있는 두 여학생을 발견했다.
어느 쪽이건 평범한 학생들은 아니었다.
한 쪽은 파트란 공작 가문의 영애.
파트란 가문의 피를 이은 사람답게 경이로운 마법적 재능을 지닌 이. 첫째 영애만 아니었더라면 마법학과의 학장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뒀을 인재.
그리고 다른 한 쪽은 주신 교회의 성녀이며 대륙에서 가장 드높은 존경을 사는 사람 중 하나.
학장마저도 그녀의 인격에는 존경을 표하는 사람이며 자신이 다루는 신성 마법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 헤매는 열정을 지닌 분.
어느 쪽이건 현재 소울 아카데미가 품고 있는 최고의 재능이라 불러도 될 두 사람을 마주한 학장은 두 사람과 시선을 마주하고서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파트란 영애. 여기는…”
“학장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학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예?”
“지금 저희가 마법진의 복구를 진행 중인데요. 문제가 몇 가지 생겨서 학장님께.”
“자. 잠시만요. 파트란 영애. 뭐라고요? 마법진의 복구를 하고 계시다고요? 어떻게?”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가 남기고 만 마법진은 여전히 여러 마법사들의 연구 대상이다.
긴 세월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해석이 되긴 했지만 마법진을 완벽히 해석한 자는 존재하지 않지.
헌데 이 마법진의 일부를 알아차린 것도 아니고 복구를 하고 있다니?
당혹 속에서 방 한 가운데에 자리한 마법진을 발견한 학장은 경이로움에 눈을 크게 떴다.
저 마법진은 본래 여기에 자리하던 마법진과는 달라.
분명해. 내가 저 마법진을 연구하느라 얼마나 많은 세월을 바쳤는데 그걸 모를까.
헌데 저 마법진에 생겨난 변화는 기존의 마법진과 달리 조금의 괴리도 일으키지 않고 있어.
“아직 배울 것이 더 많을 영애께서 이걸 어떻게.”
“그건 나중에 설명 드릴게요! 지금은 이거부터!”
조이가 이야기한 마법진의 문제는 마법진이 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제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몇 번이나 확인을 해도 마법진에 문제는 없었어요.”
“저도 조이와 함께 확인을 해보았지만 문제를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학장님. 당신의 고견이 필요합니다.”
“…잠시만요.”
학장은 얼굴을 쓸어내리고 나서 마법진에 시선을 집중했다.
파트란 영애의 말대로 마법진에 이상은 존재하지 않아.
이론적으로 생각을 해봤을 때 이 마법진은 정상적으로 발현이 되는 게 정상이야.
그런데 왜 마법진이 발현되지 않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마법진이 왜 작동하지 않는 거지? 어디에 문제가.
“동력. 동력이 없잖아요.”
“동…력이요?”
“그래요. 본래 에르기누스님께서 남기고 간 마법진은 아카데미 토지에 머무는 막대한 마력을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결계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카데미 내부에 여러 이로운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었죠. 바꾸어 말하자면 에르기누스님의 마법은 막대한 마력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단 이야기입니다.”
문제 하나 없는 마법진이 발현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서 기반한다.
에르기누스의 마법진은 막대한 마력과 연결되어 있을 것을 가정하고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마법사 하나 둘의 마력으로는 발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어떡하면 좋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제가 해결해드릴 수 있을 듯 하니.”
마법학과의 학장이 소울 아카데미에 여태까지 머무른 이유가 바로 이 마법진을 해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구원으로 교수에게 노예처럼 굴려질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마법진을 연구해왔던 그녀는 에르기누스의 마법진이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기원과 어떻게 하면 맞닿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정확하게는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하리라. 과거 거하게 사고를 친 나머지 마법진과 동력의 연결이 끊기게 만든 학장은 그걸 복구하지 못하면 물리적으로 목이 날아갈 처지였으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옛 기억을 되살려가며 마법진에 한 획을 더한 학장이 마법진과 지하의 동력을 연결한 순간 마법진에 마력이 스며든다.
“이런.”
허나 그 색은 본래 마법진이 지녔던 색과는 달리 검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등골을 싸늘하게 만드는 검정을 본 순간 페이비는 즉각적으로 자신의 신성을 마법진 주변에 펼쳤다.
“학장님! 연결을!”
“지금 바로 끊겠습니다!”
학장이 다시금 획을 지워버림에 따라 마법진이 색을 잃는다.
“성녀님. 이건.”
“악신의 기운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주신의 대척에 존재하는 자인 듯 하군요.”
“악신의 기운이 어째서 여기에?”
“동력이 오염되었다는 것이겠지요.”
*
정화의 기적? 내 앞에 떠오른 문구에 눈을 끔뻑이던 나는 이내 팔짱을 끼고서 옛날의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소울 아카데미라는 게임의 세계관에서 기적이라는 단어는 쉬이 남발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인지에서 한참은 벗어난 것.
초월적인 누군가의 뜻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무언가.
아주 자그마한 확률을 뚫고서 일어나는 천재에 가까운 일.
게임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한 캐릭터가 극한에 이르렀을 때 배울 수 있는 최종 기술.
그것이 기적이란 존재다.
예시를 들자면 내가 흉내내고 있는 할아버지의 방패가 있다.
악신 아그라가 내리친 공격을 인간의 능력만으로 막아낸 이 방패술은 인간이 벌인 기적 중 하나로 전승되며. 실제로도 기적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인 성능을 지니고 있다.
악신의 무리를 단신으로 물러서게 했다는 기적도 마찬가지다.
불완전하다고는 하나 분명 부활했던 불의 악신을 물리칠만큼 대단한 힘을 발휘했던 신성 마법은 기적이라 불리기 위해선 얼마나 대단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만약 게임 속에 이런 기적이 있었다면 썩은물인 내가 모를 리 없어.
클라이언트에서 뜯어낸 정보까지 확인하던 나인 걸. 정화의 기적이라는 게 존재했다면 모를 리가 있나.
그러니까 이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기적이야. 완전히 새로운 스킬이라고!
내가 알지 못하는 컨텐츠에 흥분한 나는 즉시 감정 스킬을 사용해 정화의 기적이 무엇인지 확인하려 했다.
[숙련도가 부족해 감정할 수 없습니다.]
…숙련도가 부족하다고?
이것도 진짜 오랜만에 보네.
최근 들어서 감정을 할 수 없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은데.
기적은 기적이라는 건가.
그렇단 소리는 정화의 기적이 뭔지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한 번 사용을 해봐야 한단 소리네.
흐음. 일단 이건 넘기고 다음 보상을 확인해보자.
내가 이번에 고생한 게 얼만데 아르마디님께서 겨우 이걸로 끝을 내겠어?
[새로운 퀘스트가 지급됩니다!]
응?
어라?
뭐야.
뭐야?!
이걸로 끝이야?!
진짜 이걸로 끝이라고!?
왜?!
아니 이상하잖아!
물론 얻은 게 없는 건 아냐!
무예의 신한테 조언을 받기도 했고. 내 지능이 올라가기도 한데다가. 기적을 받기까지 했으니 나름 보상을 얻었다 볼 수 있지.
근데 평소에 비해 너무 짜지 않습니까? 개허접 짠돌이 주신님?
대체 정화의 기적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이것만 주고 끝내는 겁니까?
뭐 설마 이번에 찐따 아그라랑 싸우느라 너무 힘들어서 이것밖에 못 주겠다는 건 아니죠?
누구는 자기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꼴랑 그거 했다고 힘들어 죽겠다 그러는 거면 저 진짜 화낼 거에요.
당신의 호칭을 한없이 격하시킬거라고요!
딱 대. 지금 바로 방으로 가서 테스트 해 볼 테니까.
별 거 아니기만 해봐라.
당신은 평생 허접으로 살아야 할 걸?!
퀘스트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방 쪽으로 걸어가던 그 때. 내 앞에 갑작스레 마법학과의 학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른 영애.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공간마법을 이용한 듯 홀연히 등장한 그녀는 사용인으로 변장한 카리아에게 눈짓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영애. 이만 가보겠습니다.”
순식간에 목소리를 바꾼 카리아는 정갈한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이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고 제 귀한 시간을 빼앗으려 하시는 건 곤란한데요. 노파 학장님.”
“성녀님께서 당신이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이야기하셨습니다.”
학장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마법진의 동력이 되는 곳이 오염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동력과 연결하는 순간 악신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다고.
그녀의 설명을 다 들은 나는 눈썹을 살짝 들었다가 이내 히죽 웃음을 지었다.
흐으응. 아직도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찌질이가 발악을 하고 있구나?
추하다. 추해.
쳐발렸으면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야지.
자꾸 정신승리를 하려고 그러면 점점 더 추잡해질 뿐이라고?
아닌가? 추잡하고 치졸한 게 악신다운 거니까 컨셉을 잘 잡았다고 해야 하나?
아님 처발리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는 마조 새끼인 건가?
뭐. 아무래도 좋아.
제발 괴롭혀 달라고 비는데 괴롭혀 줘야지.
이번에 내가 얻은 정화의 기적으로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