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4
아서가 아는 루시 알른이라는 영애는 무슨 말에건 억지로 무례를 덧붙이는 사람이었다.
멀쩡하게 할 수 있는 말조차도 굳이굳이 비꼬아가며 상대의 신경을 거스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
그것이 하인이건 친구이건 윗사람이건 신이건 간에. 오랜 시간 루시와 함께 했던 아서조차도 그녀가 멀쩡히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은 단 한 번 뿐이었다.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죄를 하던 그 때 한 번 말이다.
그래서일까. 두 손을 끌어 모은 채 담담한 목소리로 주신께 기도를 바치는 루시의 모습은 아서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둠조차도 짓누를 수 없는 새하얀 피부. 인간의 타고난 외모가 저럴 수 있나 싶을 만큼 말끔한 선. 몸 이곳저곳에 묻어나오는 고됨 탓에 더 고결해 보이는 외견. 평소와 달리 바닥에 가라앉아있는 목소리.
굳이 따지자면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이거늘 아서의 눈동자에 비친 루시의 모습은 평소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신성했으며 고결했고 경건한데다가 간절해보였다.
이렇게 보니 평소 루시 알른의 건방짐이 얼마나 저 녀석의 외견을 흐리게 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구나.
어쩌면 루시 알른에게 주어진 강제성은 그녀의 외견에 질투한 신께서 부여한 족쇄일지도 모르겠어.
루시의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신성에 저도 모르게 아서가 웃음을 짓던 그 때 루시의 양갈래 머리를 만들어주던 끈이 끊어지고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린다.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던 신성이 형체를 갖추고 어둡던 지하의 정경에 빛을 더하니 아서는 빛의 한 가운데에 선 루시를 보며 신화시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신의 뜻을 대행하여 싸우던 갑옷 입은 천사들에 대한 설화를 말이다.
하하. 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만 예술 교단의 사도께서 왜 그리 루시를 찬양하지 못해 안달 난 것인지 알 것 같구나.
모남을 제외한 루시의 모습이 이토록 경이로우니 예술을 찬양하는 입장에서 어찌 감탄하지 않을 소냐.
…나중에 이 모습을 사도께 말씀드린다면 그녀의 모습을 간직한 장신구를 만들어주실까.
경외 속에 아서가 사사로운 감정을 담던 그 때 주신의 신성 속에서 환히 빛나던 루시 알른이 눈을 떴다.
보석보다도 선명한 붉은 눈동자로 세상을 둘러보던 그녀는 아서의 멍한 눈동자를 마주하고서는 여느 때와 같은 웃음을 지었다.
“눈 좀 치워주실 수 없을까요? 성욕으로 가득한 눈을 하고 절 바라보시면 좀 많이 징그러운데요.”
“누. 누가 성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누구긴 누구에요. 제 할 일도 하지 않고 멍하니 관음만 하는 무능 왕자님이죠.”
루시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내려가자 아서가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뒤로 물러선다.
“루시 말이 진짜에요? 왕자님?”
옆에서 쏘아지는 프레이의 순진무구한 눈을 애써 무시한 아서는 헛기침과 함께 옆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서와 마찬가지로 멍하니 루시를 구경하던 시조의 조각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잠시 기다려봐라. 확인을… 해 볼 필요도 없겠군. 악신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방금 그 한 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단 말인가?”
‘네 놈.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질 못한 거냐? 저 아이가 펼친 것은 단순히 한 번이라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의 기적이란 말이다!’
기적이라는 단어에 놀라 루시 쪽으로 시선을 돌린 아서는 하품을 내쉬는 루시를 보고 눈을 끔뻑였다.
“외톨이 왕자님의 상상친구가 뭐래요? 찌질이가 처발리고서 질질 짜러 갔대요?”
“일단은 그렇다는 군.”
“그래요? 그럼 저 잘테니까 나머지는 왕자님이 알아서 하세요. 무능하고 멍청하신 왕자님이라도 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을 테니까.”
“…잔다고? 갑자기 그게 무슨.”
아서의 당혹이 끝나기도 전에 루시의 눈꺼풀이 감기며 그녀의 몸이 무너져내린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널부러지는 모습에 아서가 당황하며 손을 내밀려던 그 순간 그보다 먼저 프레이가 루시를 받아냈다.
체격이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거늘 가뿐하게 루시를 받아낸 프레이는 자신의 두 팔로 루시를 끌어안았다.
“성욕에 가득 찬 왕자님한테 루시를 넘길 순 없어.”
“…너 말이다. 성욕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이야기냐?”
“아니? 모르는데?”
내가 그걸 알 리가 있냐는 듯 뻔뻔한 프레이의 반응에 아서가 한숨을 내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프레이는 고갤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왕자님은 알아?”
“내가 너 같은 바보처럼 보이나?”
“그럼 설명해줘. 성욕이 뭐야?”
“…”
프레이 이 녀석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그냥 모르는 체 하면서 날 놀릴 생각인 것 같은데?
아닌가? 프레이 켄트에게 그런 지성이 있을 리가 없나?
아니. 뭐. 그래. 다른 건 다 그렇다 성 치더라도 말이다. 성욕이란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루시 알른이 날 놀리기 위해 했던 말들이 어떤 의미를 지닌 건지 어떻게 설명을.
“왜 설명을 못 해?”
“…생각해보니 나도 모르는 것 같군.”
“그렇구나? 왕자님도 나랑 마찬가지인 바보였던거구나?”
바보 동료라면서 해맑게 웃는 프레이의 모습에 아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옆에서 장난스레 웃는 시조의 조각이 아서에게 짜증을 돋구었다.
*
마법학과의 학장이 루시에게 말을 전하러 가겠다 이야기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 지하에서 주신의 신성이 터져나왔다.
한 겨울의 모닥불보다도 더 따스한 그 신성을 마주한 순간 조이는 그것이 루시의 것이라는 걸 자연스레 이해했다.
영애께서 또 다시 문제를 해결해 주신건가.
어쩌면 이 또한 영애의 계획 속에 들어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네. 가볍게 웃음을 지은 조이는 얼마 전 학장이 그리고 간 마법진을 다시금 발현시켰다.
“페이비. 저랑 같이 이거 확인…”
“흑.”
“…페이비?”
“흐으윽. 흑.”
울음소리를 듣고서 고갤 돌린 조이는 바닥에 주저 앉아 오열하고 있는 페이비의 모습에 표정을 굳혔다.
“왜. 왜 그러세요!? 페이비?! 무슨 일 있어요?!”
“방금. 방금 기적이. 흐윽. 끅. 흑. 영애님께서. 흑!”
페이비의 말은 중간중간 둑뚝 끊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방금 전에 루시가 기적에 가까운 무언가를 일으켰고 그걸 느낀 페이비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건가.
조이는 유난스럽단 생각을 하면서도 평소 루시를 아끼는 페이비를 알았기에 무어라고 하진 않았다.
페이비가 기적이라고까지 설명할 정도라면 다시 마법진에 악신의 기운이 서릴 일은 없겠지.
그리 생각하며 조이가 마법진을 동력과 이은 순간 마법진이 순결한 하얀 색으로 빛난다.
좋아. 마법진은 정상적으로 작동을 하고 있어. 이제 아카데미의 결계가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것만 확인하면 돼.
제발 모든 것이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가길 바라며 창 밖으로 고갤 내민 조이는 저 먼 곳부터 서서히 결계가 솟아오르는 것을 확인하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휴우우. 다행이다. 이번에 또 문제가 생겼다면 진짜 답이 없었을 텐데.
“과연. 파트란 가문의 피를 이으신 분 답네요.”
뒤편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린 조이는 심호흡과 함께 순식간에 표정을 꾸몄다.
“에르기누스님께서 남겨두신 마법진을 보란 듯 해석해 보이시다니.”
조이의 예상대로 그녀의 뒤 편에 자리잡은 것은 현 왕국의 1왕비 카바티 솔라딘이었다.
“성녀님께서 이루신 기적에 손을 더했을 뿐이랍니다.”
마법학과의 학장과 함께 이 곳을 찾은 그녀는 조이와 페이비를 번갈아보다가 이내 고개를 주억였다.
*
“알른 가문의 영애분? 그 분은 왜 물어보는 건가요?”
“너라면 그 분에 대해 알 것 아니냐.”
대장장이 이누키가 찾은 곳은 아카데미 한 쪽에 있는 옷가게였다.
그 곳에서 옷의 수선을 하고 있던 노파는 자신의 얼굴 주름을 두 배로 늘려 이누키와 대화하고 싶지 않단 의사를 보였다.
“그런다고 내가 물러설 성 싶으냐? 빨리 대답이나 해라.”
“그래요. 근데 당신이 왜 그 분을 찾죠? 당신의 까탈스러운 성미에 아직 무르익지 않은 전사가 눈에 들어올 리 없을 텐데?”
노파는 오래 전부터 이누키와 인연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괴팍한 성미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자신이 인정한 전사가 아니라면 일국의 왕이 찾아와도 무시하는 이 정신나간 인간을 말이다.
“봐야 알겠지만 예외가 생길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서 말야.”
“…당신. 그런 취향이었습니까? 영애께서 아름다우시긴 하지만.”
“뭔 미친 소리야! 이 노망난 할망구가!”
이누키가 버럭대는 것을 본 노파는 눈썹을 살짝 치떴다.
이 인간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영애께 그만한 재능이 있음을 인정했다고?
아무리 영애의 아비가 베니딕 경이라고 해도. 또한 영애의 재능이 뛰어나단 사실이 공언되었다 해도. 아직 이 성질 더러운 노파의 인정을 받기에는 아직 모자랄 터인데.
“아무튼 빨리 말해! 알른 영애랑 알아 몰라?!”
“압니다. 저번에 제가 그 분의 옷을 수선해 드리기도 했으니 모를 수 없죠.”
“호오! 그렇다는 소리는 연이 있다는 것이겠군!”
“예. 그렇습니다.”
이 노친네의 성격이 더러운 것과는 별개로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 하나만큼은 일품이야.
지금은 뒷골목에 처박혀서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망치를 휘두르는 퇴물이지만 한 때는 손님으로 도시 하나를 가득 채울만큼 대단한 인간이니까.
이런 녀석이 직접 영애의 갑옷을 만들어 주겠노라 이야기를 한다면 내가 중간에 막을 이유는 없겠지.
“자. 너무 젠체하지 말고 연을 만들어 주게나. 나와 그대의 연이 가볍지 않은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잖나.”
“알겠습니다만.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봐.”
“그 갑옷을 만들어 줄 때에 저도 옆에 끼어 옷 한 벌을 만들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영애께 꼭 입히고 싶은 옷이 있는지라.”
“흐흐흐. 그 정도야 별 거 아니지. 좋아. 가자고. 그 연이라는 곳에 말을 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