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5
모든 일을 주도한 루시가 잠에 빠져들었음에도 아카데미의 시간은 멀쩡히 흘러갔다.
우선 아카데미 내부에 생겨난 소란은 빠른 속도로 진정이 됐다.
일단 가장 큰 요소는 주신 교회의 성녀라는 얼굴이었다.
예전부터 악신과의 투쟁에서 선두를 지켰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사건을 해결한 당사자로 여겨지는 것이 페이비다.
그런 그녀가 서서히 복구되어 가는 결계 한 가운데에서 대개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주신 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잔존한 다른 문제도 해결하겠다 선언하는데 누가 걱정을 더하겠는가.
검성이 용의 목을 날리는 것을 보았던 아카데미 내부의 사람들은 성녀의 선언과 옆에서 성녀를 적극 지원하겠다 말하는 1왕비의 선언을 믿고 후일의 발표를 기다리기로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과 교수진이 결계 내부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던 것도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쿨쿨 잠을 자다 깨어난 이들에게 있어 오늘의 사건은 그저 밤중에 일어난 작은 소란에 불과하니.
악몽 속에서 간신히 눈을 뜬 이들에게 네가 죽을 뻔 했노라 이야기를 한들 피부로 느끼기 어렵지 않겠는가.
덕분에 사제들에게 여러 검사를 받고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과 아카데미 내부에서 일하는 교수진들의 분위기는 극명하게 갈렸다.
학생들의 분위기는 대부분 태연했다.
철없는 이들은 시험이 뒤로 밀렸다면서 환호하거나 어쩌면 휴학을 할지도 모른다고 좋아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소울 아카데미의 평판이 떨어질 것을 걱정했고.
상재가 넘치는 어떤 사람은 몇몇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모아 조악한 장신구를 팔아 넘겼고.
성적을 중요히 여기는 이들은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서로 모여 책을 펼쳤고.
어느 권력욕이 있는 자들은 왕국의 기사들이나 사제들을 도와 일을 했으며.
개 중에는 권력자들의 눈에 들기를 바라며 열심히 뛰어다니는 자들도 많았다.
학생들의 분위기는 이토록 나긋했다. 불안하다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괜찮을 것이란 확신을 마음에 품었다.
허나 교수진들은 달랐다.
그들은 현 상황을 무척이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아카데미의 운영을 할 수 없습니다.”
아카데미의 학장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내뱉은 말에 여러 학과장들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저희 아카데미는 악신의 추종자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아카데미의 역사가 교육의 역사임과 동시에 투쟁의 역사라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죠.”
소울 아카데미가 악신의 추종자들에게 공격당하는 일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벌어졌던 일이다. 그 때마다 아카데미는 에르기누스가 남긴 결계를 기반으로 그들을 물리쳐왔다.
“그러니만큼 어지간한 상황이라면 저희는 투쟁을 이어가려 했습니다만 최근의 상황은 심상치가 않습니다.”
우선 악신의 추종자들이 아카데미를 공격하는 빈도가 달라졌다.
기껏해야 연에 한 두 번 정도 올까말까 했던 이들이 최근에는 학기마다 사건을 일으키는 중이지.
그렇다 하여 규모가 작아졌는가? 전혀. 오히려 아카데미를 습격하는 이들의 규모는 이전보다도 더 커졌다.
당장 오늘만 해도 공허의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모든 걸 마칠 기세로 이 곳을 습격하지 않았나.
“헌데 저희들은 어떻습니까. 작년과 비교해 보았을 때 더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아뇨. 전혀요. 오히려 더 난장판이 되고 말았죠.”
학장이 대놓고 아카데미 내부에서 벌어지는 파벌 싸움을 지적하자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장은 자신의 날 선 어투를 숨기지 않았다.
“오늘 아카데미에서 아무런 희생자가 나오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주신께서 성녀의 육신을 빌려 저희를 보살펴 주셨기에 피가 흐르지 않은 거란 말입니다! 만약 성녀님께서 없으셨다면! 검성님께서 근처에 계시지 않았다면! 저희의 머리가 멀쩡히 목에 붙어있을 성 싶습니까!?”
평소의 유약한 학장이라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태도에 헛기침 소리가 자연스레 사그라든다.
학장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명분이 존재하기에 불편하더라도 따지고 들 수 없는 것이다.
“솔라딘의 위대하신 1왕비님.”
“예. 학장님. 말씀하시죠.”
“소울 아카데미를 몇 년이나 이끌어 온 학장으로써 간언 드리겠습니다. 우선 아카데미에서 일어나는 파벌 싸움을 멈춰주십시오. 무얼 바라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로 인해 솔라딘의 미래가 죽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해합니다. 제 파벌의 사람을 물리는 것은 물론이고 교수직을 떠난 분들께도 제가 직접 사죄의 뜻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2왕비님과도 협의를 진행하죠.”
“이외에도 몇 가지 말씀 드릴 것이…”
창 바깥에서 저들이 나누는 회의를 엿 듣던 카리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책상 아래에 감추면서도 필사적으로 목소릴 높이는 학장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저 아저씨도 말년을 참 시끄럽게 보내시네. 내가 정보원으로 활동할 시절부터 말년에는 조용히 살다 사라질 거라 그러시던 분인데 말야.
그러게 왜 목줄을 잡혀도 하필 우리 고용주님한테 붙잡혔대.
우리 고용주님 자기 아래 사람 굴리는 거는 진짜 험하게 굴리는데.
나만 해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부탁을 턱턱 내밀면서 해내라고 하는 바람에 죽어나는 중이라고.
그건 좀 힘들 것 같단 말을 몇 번이나 꾹 삼켰는지 몰라.
약간 망설이는 티를 낼 때마다 이런 것도 못하는 개허접 아줌마라거나. 늙었으니 어쩔 수 없다거나. 연골이 다 닳아서 움직이기 힘든 걸 이해한다거나 하는 말을 지껄여대지만 않았어도 거부할 건 거부했을 텐데!
젠장!
카리아는 학장의 애처로운 뒷모습에 동질감을 느끼면서 발을 움직였다.
그래도 예전에는 한 가닥 하던 영감님이라 저 쪽 일 자체는 문제없이 처리할 것 같고.
방금 전에 고용주님이 또 뭔갈 저지른 덕에 아카데미 내부의 오염도 거의 완전하게 해결된 것처럼 보이고.
희생자가 없는 것도 확인됐고. 결계도 완벽하게 복구가 됐으니 아카데미 내에서 할 일은 다 끝난 셈인가.
이제는 아카데미 바깥에서 처리해야 할 것들을.
…으아아. 진짜. 일이 안 끝나아아아.
이러다가 고용주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먼저 내가 과로사 하겠어어어어!
머리를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온 카리아는 긴 한숨과 함께 뒷골목 쪽으로 발을 움직였다.
제발 우리 유능한 제자가 아무 문제없이 일을 다 해결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녀석까지 일을 늘리면 진짜 주름이 더 늘어나버릴 것 같단 말야.
“저어. 스승님.”
복귀한 이후로 공을 들여 꾸민 아지트에 도착한 카리아는 입을 우물거리는 제자 알새틴을 보고서 눈에 힘을 더했다.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예?”
“뭐가 잘못된 거길래 내 눈치를 보는 건데! 순간이동의 마법을 방해하는 걸 걸렸어? 아님 의도적으로 지연을 시킨 데서 문제가 생긴 거야!?”
“아뇨! 아뇨! 그럴리가요! 거기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제가 멀쩡히 이 곳에 있을 리 없잖습니까.”
“…아냐?”
“예. 알른 영애께서 부탁하신 부분은 모두 다 말끔하게 처리했습니다.”
카리아는 가만 제자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거짓말의 흔적은 존재치 않았다. 알새틴은 모두 사실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 왜 내 눈치를 보는데.”
그게 아니고서야 눈치를 볼 필요가 없지 않나? 짐작 가는 부분이 없어 고갤 갸웃거리던 카리아는 아지트 한 쪽에 대기하고 있는 두 노인을 발견하고 눈썹을 좁혔다.
한 쪽은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계시는 제봉사 할머님이네. 과거가 꽤 화려하신 분이라 기억하고 있어.
다른 한 쪽은.
“…대장장이 이누키?”
“오. 나를 알고 있나? 초야에 묻힌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날 기억하는 이도 얼마 되지 않을 텐데?”
“당신께서 남긴 무구들이 그만큼 대단하니까요. 여전히 당신을 찾고 있는 분들이 많죠.”
이누키가 만들어낸 여러 무구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비싼 값에 팔린다.
기나긴 세월이 지나가도 녹이 슬기는커녕 자신의 예리함을 보이는 이누키의 무구에는 그만한 값어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좋은 무구를 구하는 이들 중에는 이누키의 존재를 찾는 이들이 많다.
과거 젊은 시절에도 이만한 무구를 만들어낸 것이 그인데 수십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량을 갈고 닦으면 어떤 것이 나올까 궁금하다면서.
“흐음. 앞으로도 이름을 숨기는 데 공을 들여야겠구만.”
“자기 정체가 들키는 걸 바라지 않는 분께서 어찌 이 곳에?”
“무구를 만들어주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말이야. 이 할망구를 귀찮게 해서 연을 붙잡으러 왔지.”
“이 노친네한테 끌려왔어요. 할 일도 많은데 얼마나 민폐인지 원.”
“뭐래는 거야. 저 젊은 녀석 얼굴을 보자마자 살벌한 눈으로 다가가선 여기까지 걸어온 게 누군데.”
“어머나. 제가 그랬던가요?”
제봉사의 뻔뻔한 웃음을 본 카리아는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우리 제자는 모든 일을 다 끝내고 합류하러 오는 과정에서 이 두 사람한테 붙잡힌 거구나.
온갖 일을 다 겪은 두 분의 압박을 제자는 떨치지 못했고 그래서 불청객을 데려왔다 생각해서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거야.
뭐야. 별 일 아니잖아. 난 또 일이 늘어난 줄 알고 기겁했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카리아는 제자에게 할 일 하러 가라 이야기한 후 노인 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이누키님. 세르비님. 저는 여러 정보원들을 이끄는 나린이라고 합니다.”
자연스레 수많은 가명 중 하나를 입에 담은 그녀는 두 사람의 표정을 확인했다.
두 분 다 무척이나 다급해 보이시네. 누구를 찾는 건지는 몰라도 중요한 사람인 모양이야.
누가 이 두 분의 눈에 든 건지는 몰라도 운이 좋네.
“어떤 사람을 찾으러 온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방금 떠난 저 남성 분과 가까운 분입니다. 나린 님과도 친하실 거에요.”
“그렇다니 더 궁금해지네요. 두 분의 관심을 받은 운 좋은 분은 누구인가요?”
“알른 가문의 영애랍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