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9
“슬슬 마무리가 되어 가는 듯 하군요.”
베네딕의 책상 위를 가득 채우던 서류들이 많이 줄어든 것을 확인한 집사장이 웃으며 말을 꺼내지만 베니딕의 표정은 풀릴 기색이 없다.
한창 전장을 돌아다닐 적보다도 굳어 있는 베네딕의 입가를 본 집사장은 그가 무얼 걱정하고 있는지 눈치 챘다.
“아가씨께서 걱정되십니까?”
“…그래.”
얼마 전 알른 가문에 찾아온 카리아의 부하가 전해 준 정보. 공허의 추종자들에 의한 소울 아카데미 습격.
그 전말을 듣게 된 베네딕은 하려던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서 아카데미로 달려가려다가 모든 일이 끝났다는 말을 뒤늦게 듣고서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 앉았다.
“저희에게 이야기를 전해 준 분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가씨께서 건강하신 것은 물론이고 아카데미에 아무런 희생자도 없다고. 검성님과 성녀님께서도 모든 일을 다 해결하셨다고.”
“안다. 그 카리아가 수하로 부리고 있는 녀석이 전해 준 소식이니 틀릴 리 없음을.”
과거 카리아라는 인물이 자신의 분야에서 얼마나 악독한 인간인지를 몸소 체감해보았던 베네딕은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분명 그녀의 부하가 전해 준 소식대로 루시는 건강하겠지.
“그렇지만 성녀님과 검성님이 모든 걸 해결했다는 이야기까지 옳을 것 같진 않군.”
그 날로부터 근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베네딕은 루시가 기적을 펼치던 풍경을 기억했다.
그녀의 자그마한 몸 안에 주신의 신성이 깃들고. 그녀가 든 메이스의 위에 태양이 떠오르더니. 동굴 아래에 자리했던 모든 어둠이 뒤로 물러나고. 불의 악신마저도 버티지 못하고 봉인 속에 갇혀버리던 그 때의 정경은 단순한 모험담에 나올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신화였으며, 영웅담이었고, 성경 속의 한 자리를 차지할 기적이었다.
주신께서 친히 그만한 일을 대리시켰던 것이 루시다. 헌데 이번 일에 루시가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분명 이번 일에는 루시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전에 불의 악신과 싸울 무렵 성녀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지난 번 루시가 나를 데리고 갔듯 이번 일 또한 루시가 주도했을 가능성도 높아.
“헌데 우리 귀엽고 연약하고 착하고 예쁘고 보석 같은 우리 딸은 이 아비를 찾지도 않았다!”
“….예?”
“집사장.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어찌하여 루시가 내게 논의조차 하지 않았을까. 내가 무언가 루시에게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이 있나?”
만약 공허의 추종자와 싸우는 모든 걸 주도한 것이 루시라면 검성님을 끌어들인 것도 우리 딸이란 소리.
그렇다는 건 우리 귀여운 루시는 나보다 검성님께서 더 강하고 믿음직스럽다 여기고 있는 건가!?
내가 단련을 게을리 한 기간이 꽤 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한들 작금의 검성님께 패할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 이러한 모습이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과연. 너무 딸에 대한 사랑을 비치는 것도 문제인가. 허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우리 루시를 보고 있으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입가가 녹아내리는 데 어찌 딸바보가 되지 않을 수 있냔 말이다!”
“농담 삼아 꺼낸 말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 주십시오. 아가씨께선 이미 가주님의 이러한 모습에 체념한 지 오래십니다.”
“…그게 더 심각한 거 아닌가?”
집사장이 담담히 내뱉는 말에 상처를 받은 베네딕이 어깨를 늘어트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집사장은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그보다는 최근 가주님께서 워낙에 바쁜 삶을 보내고 계시기에 차마 도움을 청할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내가 바빠서?”
“예. 연초부터 가주님께서는 저택에 머무는 시간이 더 적을 만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이번 년도가 시작되고 나서 베네딕은 알른 가문 내의 문제 때문에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가 가문의 의견을 무시한 채 혼약을 하며 생겨났던 가문의 균열을 봉합하는 과정은 그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여전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장로를 회유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힘으로 찍어 누르고.
관리에서 벗어난 탓에 여러 비리가 판을 치는 영지의 장부를 다시금 새로 고치고.
규율을 만들어내고.
가문 사이의 연결책을 구상하고.
이 와중에 루시와 결혼을 하는 것으로 가문의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자는 정신 나간 놈들의 머리를 물리적으로 박살내고.
이외에도 수십 년 간 단절 되어 있던 가문을 다시금 본래대로 되돌려 놓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던 베네딕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 한 달에 한 시간 잘까 말까하는 수준의 강행군을 여태까지 이어왔다.
오죽 했으면 매일 루시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러던 베네딕이 일주일에 한 번 짬을 내서 루시한테 연락하는 게 한계였겠는가.
“평소의 가주님을 아는 아가씨이니 지금 가주님이 얼마나 고된 시간을 보내는지 아셨겠죠. 그러니 가주님을 배려하여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으신 걸테고요.”
“우리 기특한 딸이 날 걱정했다고?”
“최근의 아가씨라면 말은 안 해도 신경을 쓰셨을 겁니다.”
루시가 정말 공허의 추종자들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전제라면 이렇게 설명하는 게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집사장은 생각했다. 왜 이런 전제가 깔린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루시가. 우리 착한 딸이. 이 못난 아비를 걱정해서!”
과로라는 말로도 모자란 고행을 일삼은 탓에 감정의 선이 낮아진 건지. 베네딕은 눈물을 뚝뚝 흘리다 이내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오늘 일이 끝나기는 글렀단 걸 깨달은 집사장은 한숨과 함께 문 바깥 쪽으로 나가 집무실로 다가오는 이를 맞이했다.
“아. 집사장님!”
“무슨 일이지?”
“가주님께 드려야 할 서신이 있습니다.”
“지금 가주님께서는 이를 확인할 여유가 없으시다. 일단은… 잠시. 이건 왕가의 인장인가?”
“예. 그렇습니다.”
한껏 감수성이 풍부해진 가주님 덕에 일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데 여기에 왕가에서 일거리를 추가해주실 줄이야.
정말이지 감사한 분들이군.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충성을 보이고 싶을 지경이다.
베네딕의 강행군을 함께 하느라 날이 서 있던 집사장은 미간을 찌푸린 채 서신을 받아서는 다시금 집무실 안으로 돌아왔다.
펑펑 울고서 약간 진정이 된 듯 자신의 손가락보다 작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던 베네딕은 집사장의 손에 들린 서신을 보고서 헛기침을 했다.
“그건 뭐지?”
“왕가에서 가주님께 보낸 서신입니다. 확인해주시지요.”
“왕가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서신을 받은 베네딕은 퉁퉁 부은 눈으로 그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왕궁 특유의 고풍스러운 언어로 적힌 서신은 여러 미사여구를 제외한다면 무척 단촐한 내용만이 남았다.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루시 알른에 대한 감사한다.
이에 대해서는 왕궁에서 추후 보상을 하겠으니 바라는 바가 있다면 알려달다.
다만 이번 일을 주도한 범인의 신병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과 별개다. 이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으니 가능한 일자를 알려주면 감사하겠다.
“흐음.”
루시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전해 듣지 못한 베네딕이지만 그는 당황스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입술을 끌어 올렸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습니까?”
“아무래도 우리 루시가 1왕비님께 실례를 끼쳐드린 모양이야.”
“…예?”
서신 안에는 공손한 말만 적혀 있지만 평소 루시가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태도를 생각해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분명하다.
당장 얼마 전에 사과를 들을 겸 대화를 나누었던 2왕비도 자길 처음 보았을 때 노괴 왕비라 불렀다 하지 않았던가.
분명 루시는 이에 비견되거나 그보다 더한 무례를 저질렀을 터.
“당장은 세운 공이 있어 무어라 하시진 못하는 듯 하지만 분명 좋지 않게 보고 계시겠지.”
루시가 어릴 때 왕과 1왕비를 상대로 폭언을 내뱉어서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던 경험을 떠올린 베네딕은 호쾌한 웃음을 흘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장.”
“예. 가주님.”
“내 생각에 급한 일은 대부분 다 처리했다고 생각을 한다만.”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남은 것들은 천천히 해결해도 문제없는 것들이죠.”
“이제 본가에 일을 하러 올 방계들이 해야 할 일마저 내가 다 처리해서야 곤란하니. 이 서류는 이대로 남겨두자고.”
“짬처리를 하시겠단 거군요.”
“훌륭한 계획 아닌가?”
“변경을 지키는 백작 다운 호쾌한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과로 속에서 뇌를 반쯤 빼놓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을 흘렸다.
“소울 아카데미로 가지.”
“저도 함께 갑니까?”
“그래. 남은 것들은 포셀 그 놈이 알아서 하라고 해. 기사단장이랍시고 서류 일에서 손 떼고 점잖빼는 거 정말 꼴 뵈기 싫었거든.”
“포셀 경께서 서류 작업을 안 하신 건 아니지만 저도 동의하긴 합니다. 어쨌든 제 일은 아니니까요.”
과거 전장에서 함께 날뛰던 때처럼 살벌한 웃음을 짓던 두 사람의 계획은 시녀장의 등장에 의해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다만 시녀장의 억센 손에 붙잡혀 일터로 끌려간 것은 집사장 뿐이었다.
베네딕은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이 놀 궁리를 하는 게 말이 되냐는 시녀장의 잔소리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저택에서 탈출해 소울 아카데미를 찾았다.
루시와 함께 의논한다는 핑계로 루시와 대화하며 그 동안의 고생을 치유받고, 그와 동시에 기특한 딸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칭찬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아카데미 거리에 도착한 베네딕은 아비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만나자마자 달려드는 것만큼은 자제하자며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그의 자기암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바보 파파?”
카리아의 아지트에서 새로운 일상복을 입은 루시를 마주한 순간. 베네딕의 거구가 행복으로 물든 얼굴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말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