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1
이누키의 물음을 들은 나는 일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요정의 걸음에 대해서 어떻게 아냐니? 그러는 너는 어떻게 아는데?
요정이라는 존재가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된 게 벌써 수백 년 전의 일인데 넌 대체 왜 내 걸음걸이가 요정을 닮았단 걸 아는 거야?
“먼저 답해라. 그럼 내가 아는 것도 이야기해주지.”
“성격 더러운 개차반 할배의 뭘 믿고?”
“망치에 걸고 맹세하마.”
이누키가 지닌 장인으로써의 신념을 아는 난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목소리를 냈다.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사회부적응자의 시련 속에서 봤어.”
“…뭐?”
“그으러니까 친구 하나 없어서 책이랑 노는 것밖에 못하는 외톨이의 시련에서 봤다고.”
이누키의 벽색 눈동자 속에서 당혹이 느껴졌지만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 진짜 메스가키 스킬의 번역 때문에 제대로 설명하는 게 너무 힘들어.
역사의 신하고 관련된 사건을 안다면 카리아가 눈치껏 번역을 해줄 텐데 내가 말을 해 둔 게 아무것도 없다 보니 해석이 될 리도 없고.
미간을 찌푸린 채 어찌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중 내 귓가에 청량한 알림음이 울렸다.
[역사의 신이 전언합니다.]
[손을 펼쳐라.]
…뭐야. 이 변태 꼬맹이. 나 스토킹하고 있었어?
아무 말도 안 하고 하늘 위에서 몰래 구경하는 꼴이라니. 적을 만드는 법밖에 모르는 사회성 박살의 히키코모리다운 음습함이네.
뭐어. 어쨌건 손을 펼쳐 보라고? 이렇게?
이누키의 앞에 손바닥을 내민 순간 내 손 위에 문장이 떠오른다. 갈색의 둥그란 원 안에 그려진 석판.
음? 이거 역사의 사도에게 주어지는 문장이잖아. 이게 왜 나한테 있어?
“흠. 역사의 신께서 그대를 지켜보고 계신건가.”
오랜 세월 방랑하며 지식을 쌓아 온 이누키는 문장을 보자마자 고갤 주억였다.
“맞아.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는 걸로만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음습한 변태 꼬맹이 때문에 얼마나 귀찮은지.”
“헌데 기이하군. 내가 보기에 그대는 주신의 관심도 받고 있는 듯 한데.”
“내가 너무 예쁘고 귀여운 게 잘못이지 뭐. 개차반 할배 같은 페도 변태들이 제발 매도해 달라면서 헥헥대는 꼴이 얼마나 징그러운지. 이러다 덮쳐질까 싶어서 무서울 지경… 아얏!”
손에 그려진 문장에서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으으. 진짜 이 악물고 매도한 것도 아닌데 성질내기는.
신이란 작자가 이렇게 속이 좁아서야 신도가 생기기나 하겠어? 이러니까 신들 사이에서 왕따나 당하는 거 아냐.
“방금 같은 불경을 그 정도로 넘기는 건가. 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존재인 모양이군.”
“그걸 이제야 알았어? 개차반 할배는 인성도 보는 눈도 허접하네.”
이누키는 순간 발끈해서 목에 힘을 줬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뒷목을 붙잡았다.
“짜증은 나지만 그래도 말한 건 지켜야겠지. 내가 요정에 대해 아는 이유는 그대와 비슷하다. 저 드높으신 존재께서 친히 보여주셨거든.”
그는 자신이 일종의 계시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꿈속에서 마주했던 요정의 춤. 그리고 축제의 한 가운데에서 함께 웃고 있던 영웅들과 요정 여왕의 모습. 갑작스레 검게 물드는 하늘.
하나 둘 잠에 빠져가는 요정들. 슬픔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영웅들. 그 와중에 듣게 된 한 마디의 중얼거림.
“마법사는 말했지. 준비가 부족했다고.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이런 지옥 같은 풍경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라고.”
꿈에서 깨어난 이누키는 무언가에 홀린 듯 여행을 준비했다.
직접 두드리던 무구가 있었음에도 그걸 내려놓고서 계시를 따랐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직감이 이누키의 온 몸을 지배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존재가 그걸 나에게 보여준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이제 확실해졌군. 그 존재가 내게 그 정경을 보여준 건 지금을 위해서였을 것이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그는 품 안을 뒤적여서는 테이블 위에 한 물건을 꺼냈다.
잔뜩 분위기를 잡고서 물건을 꺼내기에 무언가 대단한 것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기대한 나였지만 나의 기대감은 금새 박살이 나 버렸다.
그것은 병 안에 담긴 흙이었다. 마력이 담긴 것도 아니고. 신성이 담긴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지지도 않는 평범한 흙 말이다.
이 인간이 지금 장난치는 건가? 내가 잔뜩 매도를 해왔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되갚아 주려고 하는 거야?
진짜 치졸한 어른이네. 짜게 식은 눈으로 이누키를 노려봤더니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뭔지 모르나?”
“할배 치매왔어? 흙이잖아. 아무것도 아닌 개허접흙. 사람들한테 밟히는 것밖에 못하는 마조흙.”
“뭔… 아니. 이 흙은 과거 주신과 악신이 맞붙었던 곳에서 채취한 것이다. 긴 세월 동안 퇴적된 것을 파내느라 꽤나 고생했지.”
응? 으으응? 이게 그런 상징적인 물건이라고? 고갤 갸웃거리던 나는 다시금 감정을 통해 흙을 확인했다.
[숙련도가 부족하여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내 앞에 떠오른 문구를 확인한 순간 나는 이 흙이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감정 스킬의 숙련도는 어지간한 성물조차 감정할 수 있을 정도로 드높다.
헌데 그런 내 감정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물건이라면 이 안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단 거겠지.
‘할아버지. 뭐 느껴져요?’
<…미안하구나. 나도 네 감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근데 말야. 이 흙이 범상치 않은 물건이면 뭐 해? 내가 이 흙을 쓰는 방법을 모르는데?
“그래서 개차반 할배. 변태들의 숨결이 담긴 이 마조흙으로 뭘 할 건데.”
“그건 나도 모르지. 난 그저 계시에 따라 이 흙을 구해왔을 뿐이다.”
당당한 할배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매도가 마려워졌지만 일단 억눌렀다.
잘은 몰라도 저 흙이 내가 퀘스트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 건 분명하니까. 저 지하에 처박혀 있을 해골한테 가져다주면 뭔가 다른 답이 나오려나.
“보아 하니 대충 생각하는 구석이 있는 듯 하군.”
“동정을 수백년간 지켜 온 대가로 마법을 얻은 찐따가 하나 있어서. 걔한테 보여주려고.”
“…음.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한 호칭이다만 일단 가져가라. 내가 들고 있는 것보다야 나을테니. 그리고.”
설명을 끝마친 그는 무어라고 말을 이으려다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암과 철이라는 대장간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일이 다 끝나면 들려라. 네가 바라는 대로 갑옷을 만들어 줄 테니까.”
이누키의 목소리는 처음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은 아니었다.
사나운 짐승으로 도망치는 것처럼 재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가는 그의 모습에선 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 후 나는 위기감지가 알려주는 경종을 따라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대려 했지만 그보다 변태 사도가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 더 빨랐다.
“영애. 어딜 가시려 하십니까. 영애께서 입어주셔야 할 옷이 한 둘이 아닙니다.”
변태 사도의 말에는 한치의 과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를 연 순간 그 안에서 수많은 옷가지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가볍게 걸칠 수 있을 것 같은 일상복부터 시작해서 어디를 가더라도 시선을 끌어모을 수 있을 듯 아름다운 드레스까지.
수십 개에 달하는 의상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을 본 나는 그 옷들에서 변태사도의 광기를 느꼈다.
“니키스님. 옷의 수선을 도와주십시오. 영애의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 조금 더 짙어졌으니 그에 맞추어야해서요.”
“기꺼이 그러도록 하죠.”
두 사람은 새롭게 치수를 재지도 않고 즉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은 이것부터 입어 보시겠습니까?”
채 5분이 지나기 전에 수선이 끝난 첫 옷은 평상시에 입을 수 있을 법한 가벼운 옷이었다.
판타지의 세상보다는 내가 알던 현대의 의상에 더 가까울 세련된 옷을 반강제적으로 받아들게 된 나는 저 모든 옷을 입기 전엔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단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왜 딱 맞는 거야? 대체 내 몸을 얼마나 구석구석 살펴봤으면. 으으. 쓸데없이 세심한 게 진짜 역겨워.”
카리아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은 나는 내 몸에 착 달라붙는 의복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대충 본 것만으로 이만큼 정밀하게 옷을 맞출 수 있다니.
진짜 괴물들이야.
어지간한 사람은 치수를 하나하나 재서 공을 들여도 이렇게는 못 할 걸.
으음. 옷이 괜찮기는 하네.
활동적인 느낌이 나서 귀여워.
누가 커뮤니티에 이런 커마를 올렸다면 어떻게 따라하면 되냐고 댓글로 도배하지 않았을까.
감탄과 동시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다시 변태사도와 니키스가 있는 방에 돌아갔더니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 날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도님. 소매가 좀 더 짧아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 편이 더 매력적일 듯 한데.”
“아무리 니키스님이라 하여도 그 말을 받아들일 순 없군요. 오히려 팔이 가려져 있기에 흩날리는 소매 사이로 보이는 피부가 매력적인 것이거늘!”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인간 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질린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다른 옷을 집어 들었다.
그 후로도 나는 계속해서 옷을 입었다 벗기를 반복했다.
으으으. 왜 옷을 입어도 입어도 줄어들지가 않는 거지?
변태 사도가 즉석에서 옷을 만들어내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무슨 최면에라도 걸려 있는 건가? 그런 건가!?
차라리 알른 가문에서 훈련을 받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던 나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변태 사도의 말에 환호를 내뱉었다.
진짜지? 이것만 입으면 끝이지?
어디 보자. 검은 색의 드레스인가. 역시 디자인은 좋네. 문외한인 나도 절로 감탄이 새 나올 지경이니 패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보면 혼절하지 않으려나.
이 지옥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옷을 갈아입은 나는 애써 어깨에 힘을 불어 넣으며 두 사람의 앞에 섰다.
그러자 방 안의 시간이 멈췄다. 뭐. 뭔데.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데.
이상해?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아냐? 나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 상당히 만족했었는데?
“사도님. 아무래도 제 눈이 객관적이지 않은 듯 합니다. 개선점을 찾아내야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군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니키스님. 영애의 아름다움에 모든 것이 묻혀 고쳐야 할 부분이 어딘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 눈은 이토록 아름다움에 무력했군요.”
…아니네. 그냥 너무 놀라서 감정을 표현할 방도도 잃어버렸을 뿐이구나. 주르륵 흘러내리는 코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는 변태 사도의 모습에 역겹단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려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보 파파?”
어라? 베네딕이 왜 여기에 있어? 아직 일 마무리하려면 꽤 남은 거 아니었나?
우와아. 저 트롤 같은 인간의 얼굴이 피로로 찌든 거 봐. 대체 얼마나 고생을 한 거야.
피로라는 단어와 연이 없을 듯한 베네딕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늘어진 걸 보고 놀란 나는.
콰앙!
날 가만 바라보던 베네딕이 쓰러지며 낸 굉음에 어깨를 움츠렸다.
…
뭐야?
뭐야?!
뭐 큰일 난 거야!?
기습이야!?
싸울 준비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