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3
소울 아카데미가 몇 달 간 닫힌다는 이야기에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하나 둘 집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누군가는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성화에 이기지 못해서.
또 다른 누군가는 다음 학기의 학비를 벌어야한단 현실적인 이유에서.
누군가는 그 동안 고생했으니 조금이라도 더 놀아야겠다는 철없는 이유에서.
이외에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서 짐을 준비했다.
그 때문에 날이 밝으면 밝을수록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점차 소란스러워져갔지만 조이는 그 이야기 속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마법진의 이 부분이 이런 의미였군요.”
“확실히 이렇게 보니까 맞춰지는 부분이 있네요. 특히 이 부분은 회복계열의 신성마법이라 보면 더 맞아 떨어져요.”
“에르기누스님의 발상이 확실히 놀랍긴 합니다.”
“이거 기존에 있던 마법에 적용시킬 수 있을까요?”
“충분히 가능하죠. 당장 저희 아카데미 훈련장에도 사용할 수…”
수많은 갈래로 나누어진 마법학과의 교수들 앞에서 마법진의 해석을 시연하던 조이는 학생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어버린 그들의 대화를 멍하니 듣다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처음 마법학과의 학장에게 마법진의 해석을 부탁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조이는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지닌 열정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여태까지 배움을 받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어찌 교수들의 열정을 모르겠는가.
조이가 처음에 일을 쉽게 생각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녀가 아는 게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에르기누스에게 직접 마법진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은 조이는 붕괴된 마법진을 복구하는 것으로 자신이 마법진을 체화했다는 걸 증빙했다.
실제로 몇 번이고 같은 일을 할 자신이 있기에 학장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마법진에 담긴 모든 지식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준에 도달했느냐고 묻는다면 조이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에르기누스라는 대마법사의 정수를 담은 마법진을 겨우 한 달 남짓한 시간 만에 이해하는 게 가능할 리 없잖은가.
마법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담긴 원리와 발상까지 받아들인 것은 아닌 조이는 학장에게 마법진을 그려준 후 각 그림의 기능까지 설명해주고 물러설 생각이었다.
‘잠시만요. 이게 정화의 기능을 담은 마법이라고요?’
‘네.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이게 그럴 수가 있나?’
문제는 학장의 의문에서 시작됐다. 현재 주류로 여겨지는 마법체계와 전혀 다른 모양새를 한 마법진은 학장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저도 그냥 된다고만 배워서.’
조이라고 해서 그녀의 의문에 대답해 줄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철저한 주입식 교육으로 마법진을 익힌 조이는 왜 저렇게 마법진이 그려진 건지 알지 못했다.
‘…파트란 영애.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고민을 아무리 해도 나오지 않는 답에 학장이 한 가지 부탁을 내밀었다.
발설금지와 악용금지. 이외에도 수많은 제약을 걸게 만들 테니 다른 아카데미 교수를 데려와도 되냐고 말이다.
학장의 진지한 눈빛 앞에 조이는 선선히 고갤 끄덕였다. 딱히 이 마법진과 관계된 지식을 독점할 생각이 없기도 했고. 에르기누스가 기밀을 유지하라고 이야기하지도 않았으니까.
‘고대의 마법체계…처럼 보이긴 하는데.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자료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맞습니다. 과거 실전되었던 마법의 일부가 이 마법진과 일치해요.’
학장이 데리고 온 교수는 수많은 자료를 뒤적인 끝에 의문을 해소해주었지만.
그 다음에 생겨난 의문마저 해소하진 못했다.
‘콘타 교수를 불러와야 할 것 같습니다. 학장님. 고대 공격 마법을 연구하는 그라면 분명.’
‘파트란 영애. 괜찮을까요?’
‘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다른 교수가 연구에 참가하고.
의문이 해소된 후에 또 다시 의문이 생겨나고.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교수가 찾아오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학장의 제안을 거부하는 교수는 존재치 않았다. 학장이 내건 제약이 상당히 무거운 편이었음에도 말이다.
답을 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무작정 고갤 끄덕이는 교수들의 모습에 의문을 지닌 조이가 슬그머니 물음을 던지자 한 교수가 웃으며 아이 같은 해맑은 웃음과 함께 대답을 해주었다.
‘저희들이 에르기누스님의 마법진을 해석하기 어려워했던 가장 큰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마법진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헌데 지금 영애께서 그 장벽을 무너트려주셨지요.’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께서 남긴 지혜를 마주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어찌 이 기회를 거절하겠습니까!’
‘이를 거절하는 녀석이 있다면 소울 아카데미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봐야죠.’
‘이토록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트란 영애. 후일 부탁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해주십시오.’
물론 조이에게 빠져나갈 틈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간에 다른 영애들이나 페이비를 비롯한 그녀의 친구들, 여기에 더해 그녀의 오라버니까지 그녀를 찾아와 안부를 물었으니까.
그 때마다 조이는 이만 떠나가 보겠다 말을 꺼내려 했지만 다른 교수들의 열정 어린 눈동자에 짓눌려 입술을 여는데 실패했다.
여러 학자들이 대학원생을 굴리며 얻어낸 여러 노하우 앞에서 한낱 여학생인 조이는 무력했던 것이다.
그렇게 반 강제로 교수들의 열띤 논의에 참가하게 된 조이는 달이 떠올랐다가 저무는 광경을 영혼 없는 눈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각자의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온 이들의 대화는 학술적으로 무척 유용한 것이었다.
당장 조이도 저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많은 배움을 얻었단 걸 부정하진 못했다.
근데 거기에도 정도라는 게 있지!
어제 그 지옥에서 죽어라 고생했는데 쉬지도 못한 채 밤새 연구를 하는 게 말이 돼?!
나 진짜 너무 피곤해! 이러다 진짜 과로로 쓰러질 것 같아!
“파트란 영애?”
“…아. 네. 예. 듣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결계의 근간이 되는 부분이죠?”
조이는 속으로 불평을 하는 와중에도 성실히 교수의 물음에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내외부를 구분하는 역할을 겸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그런가요.”
“…역시?”
“아하하. 다른 곳에서 봤던 것과 비슷해서요.”
결계학과 고고학 양 쪽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교수는 흐린 한경 너머로 눈을 빛냈다.
“에르기누스님께서 봉인시킨 요정의 숲에 대해 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악신의 기운이 인근을 침범하고 있어 접근이 금지된 곳으로 알고 있는데요.”
“예전에 기회가 생겨 주신 교회의 사제분들과 함께 그 곳에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와 비슷한 마법을 발견했죠.”
“파트란 영애?”
교수의 이야기가 막 재밌어지려는 틈을 노린 것처럼 절묘한 시점에 바깥에서 조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알른 가문의 영애께서 찾고 계십니다.”
루시? 어제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멀쩡한가봐.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조이는 여느 때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을 느꼈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그 시선들을 외면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몰라! 나가야 해! 반드시!
“가보시죠. 후에 찾아오시면 나머지를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교수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연구실 바깥으로 나온 조이는 구름 한 점 없이 밝은 헛웃음을 흘렸다.
피곤해. 진짜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
몸은 그렇다치고 정신은 알른 가문에서 훈련을 할 때보다 더 지쳤어.
으으으. 마음 같아선 당장 기숙사로 돌아가서 자고 싶긴 한데 그러면 안 되겠지…
일단은 여러 영애분들에게 안부인사를 건네고 친구들 얼굴도 확인하고 가문에 연락도 넣어야 하고. 그리고 또.
“얼빵아.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기라도 했어? 왜 얼굴이 그래?”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조이는 명랑한 목소리를 듣고서 옆으로 고갤 돌렸다.
와아. 루시다. 엄청 귀여운 옷 입고 있네.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는 반바지에 끝을 바지 안으로 넣은 품 넓은 하얀 셔츠. 그 위에 걸쳐진 손등을 가릴 만큼 기다란 윗옷.
평소에는 날카로운 공주님 같은 루시인데 지금은 좀 더 활달한 여자아이 같은 느낌이네. 엄청 촐랑촐랑 거릴 것 같아.
아쉽다. 여기가 바깥만 아니었어도 꾸욱 안는 걸로 정신력을 회복했을 텐데. 그리고 그런 루시의 뒤에 서 있는 건.
“…베네딕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파트란 영애.”
거한의 살벌한 미소에 퍼뜩 정신을 차린 조이는 다급히 부채를 꺼내 피로로 찌든 얼굴을 가렸다.
*
조이 진짜 피곤해 보이네.
내가 죽어라고 굴린 탓에 어지간한 걸로 지칠 애가 아닌데 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설마 여태까지 마법학과 교수들 사이에서 구른 건가?
마법학장한테 붙잡혀 갔단 이야기는 들었었는데 여태까지 한숨 못자고 그 인간들이랑 같이 구른 거야?
마음에 안 드네. 지들이 뭐라고 우리 귀여운 조이를 굴려?
안 그래도 힘든 일 많이 겪어서 피곤할 애를 쉬게 해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식으로 따지면 누구보다 이 아이를 많이 굴린 건 너지 않으냐? 지금도 무언가 일을 부탁하러 온 거면서.>
‘그건 제가 굴린 거잖아요!’
<…너는 굴려도 괜찮다?>
‘네!’
굴려도 내가 굴리지 다른 사람이 조이를 괴롭히는 꼴은 못 봐!
살 날도 얼마 안 남은 늙은이들주제에 감히! 다리를 젓가락마냥 부러트려서 평생 자기들이 좋아하는 연구밖에 못하게 만들어줄 테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일어난 일에 열을 올리고 있던 중 갑자기 조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네?! 아카데미가 휴학을 한다고요?”
“모르셨습니까? 그 때문에 다들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만.”
“…전혀 몰랐습니다. 여태 다른 교수님들과 마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마법이요?”
“예. 에르기누스님께서 남겨 두신 마법진에 관한 것입니다만… 저. 자세한 설명은 좀 많이 길어서.”
“아.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설명을 줄여도 된단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순간 목소리를 높였던 조이는 이내 양 볼을 살짝 붉히면서 화제를 바꿨다.
“그. 그래서. 무슨 용무로 저를 찾으신 건가요?”
“얼빵아. 너 도서관에 있는 마법학 관련 서적들 거의 다 알지?”
“네. 필요하다 싶은 것들은 모두 다 읽었으니까요.”
“내가 말하는 책 좀 찾아줘. 그러니까…”
요정의 숲과 관계된 내용이 적혔던 서적들을 나열하자 조이가 고개를 주억거리다 이내 고갤 갸웃한다.
“그 책들 다 한 교수님께서 저술하신 거네요.”
“…진짜?”
“네. 지금 연구실 안에 계세요. 불러드릴까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