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4
내가 아는 1왕비라는 인간은 자신의 모든 사고를 왕국의 이익에서부터 시작하는 자다.
조금 바꾸어서 이야기를 하자면 왕국에 손해가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걸 못 견뎌한단 것이기도 하다.
물론 1왕비는 대의라는 것을 아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손해를 감수하지만 그 손해를 감수할 때까지 그녀는 모든 것을 동원해 그 손해를 줄이려 할 거다.
이를 아는 나는 1왕비를 만나러 가기 전에 요정의 숲에 대한 정보를 다시 한 번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니터 너머에 있을 적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게 좀 애매하거든.
요정의 숲은 게임 속에서 어디까지나 배경으로만 존재하던 곳.
이런저런 설정들이 게임 속에 퍼져 있기는 했지만 정작 그 중에서 게임에 영향을 끼치는 게 하나도 없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잊혀졌지.
그나마 내가 기억을 하는 것도 DLC가 나올 거라는 기대 속에서 여러 떡밥을 굴리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 때 게시판에서 호들갑을 떨던 게 아니었다면 흐릿한 기억도 없었을 걸.
이런 상태에서 1왕비를 만나러 갔다가는 명분이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가 뜯겨버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정보를 정리하자.
아카데미 내에 남아있는 자료들과 내 머릿속에 남은 기억들을 조합하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해서 협상할 준비를 하는 거야.
이렇게 마음을 먹은 나는 쓰러진 변태 사도가 일어나면 연락을 해달라 이야기하고 나서 다시금 아카데미를 찾았다.
근데 설마 요정의 숲에 직접 조사를 나갔던 이와 대화 나눌 기회가 생길 줄이야.
이건 진짜 예상 못했어.
그도 그럴 게 게임 속에서 책 내용을 확인할 때는 있어도 저자까지 확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
그게 본편과는 하등 관계 없는 설정상의 존재라면 더더욱.
“제가 살아서 알른 경과 대화를 나눌 날이 생길 줄이야!”
조이의 안내를 따라 만난 교수는 베네딕을 보자마자 눈을 빛내며 달려왔다.
예전부터 동경을 했다느니. 용의 목을 날리는 모습을 볼 때 전율이 온 몸을 휘감았다느니. 허락해주신다면 당신을 주인공으로한 책을 쓰고 싶다느니.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동경을 드러내는 교수의 앞에선 베네딕은 지극히 태연했다.
“다 예전 일이지요.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아저씨입니다.”
“그럴리가요! 지금도 경을 대륙 최강이라 꼽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전성기 시절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단호히 최고라 말하긴 어렵지요. 워낙에 쟁쟁하신 분들이 여럿인지라.”
상대의 동경을 웃으며 받아내는 베네딕의 모습에선 노련함이 느껴졌다. 예전부터 이런 일을 겪어 본 게 한 두 번이 아닌 거겠지.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아. 뭔가 대접을 해드려야 하는데.”
“다과를 준비할까요. 교수님?”
“당연히 그래야지요! 아니.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후일을 위해 아껴둔 것을…”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교수를 보고 있자니 베네딕을 데려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저 상태라면 진짜 있는 거 없는 거 다 말해줄 것 같은 걸.
솔직히 말해 데려오고 싶어서 데려온 건 아니고 유기견 같은 눈을 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같이 온 거긴 한데.
아무튼 결과가 좋으니까 오케이인 걸로.
“흐흠. 크흐흠.”
교수가 연구원과 함께 자리를 뜨자 베네딕이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폈다. 입은 안 열었지만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훤히 보인다.
자기가 이토록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해달라고 그러는 거겠지.
“한심한 어른인 지금과는 달리 예전엔 대단했나봐. 바보바보 파파?”
“별 것 아니다. 혈기가 넘치는 시절의 잔재일 뿐.”
베네딕은 애써 겸손한 체를 했지만 녹아내리는 미소를 감추지는 못했다. 정말 솔직한 사람이라니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교수는 척 보기에도 비싼 과자와 차를 우리 앞에 내밀었다.
베네딕이 그걸 먹고 맛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니 교수에게서 방금 전 베네딕처럼 솔직한 웃음이 새나왔다.
“생각해보니까 제일 중요한 것을 못 묻고 있었네요. 여기에는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저희 딸이 교수님께 여쭤볼게 있다 하여서.”
“따님께서?”
베네딕에게서 내 쪽으로 시선이 옮겨진 순간 교수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렸다.
나 예전에 이 사람한테 뭔가 했었나?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왜 이 사람이 날 무서워하는 거지? 그냥 평소의 소문을 듣고 지레 겁먹은 거려나?
뭐가 됐든 내가 신경 쓸 건 아니긴 한데.
“당신 같은 겁쟁이랑 같은 공기 마시는 거 상당히 불쾌하거든?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 재깍재깍 대답해. 식은땀 줄줄 흘리면서 목소리 떨면 밟아버릴 거야.”
“예. 예에!”
“푸핳. 잔뜩 쫀 것 좀 봐. 어른이란 사람이 이렇게 한심해도 되는 거야?”
허벅지를 바라보며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교수는 훌륭한 장난감처럼 보였다. 이런 사람이라면 정보를 캐내는 것도 쉽겠네.
“내가 물어보려고 하는 건 닭장 여왕의 숲에 대한 거야.”
“…닭장 여왕은 처음 들어보는 단어입니다만.”
“요정의 숲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교수.”
요정의 숲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제서야 교수가 고개를 주억인다.
“요정의 숲이라면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야죠.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다.”
“제가 아는 걸 다 말씀드려도 되는 겁니까!?”
교수는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가 이내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다시 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지라.”
“괜찮아. 겁쟁이 교수. 당신 같은 한심한 인간이 뭘 제대로 말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했으니까.”
요정의 숲에 대한 연구 모두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게 가능했다면 내가 1왕비한테 숲에 관한 걸 물어볼 생각도 하질 않았을 테니까.
“…그. 그렇지만! 제가 말할 수 있는 선에서는 모두 다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내 어투가 거슬렸던 걸까. 교수는 목소리를 벌벌 떨면서도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런저런 서류들과 함께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우선 요정의 숲이 지닌 역사에 대해서!…”
“아. 그건 됐어. 찌질하게 생긴 교수의 외견마냥 지루할 것 같은 걸.”
예전 일이라면 할아버지한테 물어보는 걸로 충분해.
“…그럼 대체 어떤 설명을 바라시는 건지요.”
“당연한 거 아냐? 예전 일이 아니면 지금 밖에 없잖아.”
내 말을 들은 교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술을 우물거렸지만.
“죄송합니다만 제 얼굴을 봐서라도 우리 딸아이의 투정에 어울려주시지요.”
“경께서 그를 바라신다면 기꺼이!”
베네딕이 한 마디를 꺼내기 무섭게 헤실거리며 표정을 풀었다.
“현재 요정의 숲은 교회에 의해 접근 금지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대략 이십년 전부터 악신의 기운이 결계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거든요.”
카리아가 주었던 것보다 간략화된 지도를 꺼낸 교수는 요정의 숲 반경 얼마 정도가 불모지나 다름없는 상태라 설명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를 확인한 왕국은 교회 측에 연락을 함과 동시에 결계의 점검을 위한 인원을 구했죠. 결계에 문제가 생겼다면 크나 큰 문제니까요.”
그 때 조사대열에 함께했던 교수는 여러 이름 있는 마법사들과 함께 결계를 확인했고 그 끝에 결계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단 결론에 도달했다.
“네? 그치만 그 결계도 저희 아카데미의 결계처럼 수백년이나 된 것이지 않나요? 어떻게 문제가 없을 수 있죠?”
이 부분이 의아했던 듯 조이가 의문을 던지자 교수가 이해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파트란 영애의 말씀대로 정상적인 결계라면 이미 쇠해서 무너졌어야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 결계는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불리는 마법사의 마법에 반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여겨지는 성기사의 축복이 더해진 물건이었죠.”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가 자신의 모든 걸 바쳐가며 만들어낸 마법진은 기나긴 세월 속에서도 쇠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럼 왜 악신의 기운이 새어 나온 거죠?”
맞아. 교수의 말대로 결계가 멀쩡했다면 악신의 기운이 새어나올 리가 없어야 해. 에르기누스가 그런 걸 허락할 리가 없잖아.
“…죄송합니다. 이 부분은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교수는 기밀로 지정된 부분이라 이해해주길 바란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걸 본 내가 메스가키 스킬을 이용해 긁어댔음에도 차마 입을 못 여는 걸 보면 무언가 계약이 되어있는 거겠지.
결국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교수였지만 내 도발에 당해 열불이 오른 그는 자신의 지식을 증빙하기 위해 여러 자잘한 것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덕분에 난 내 기억이 꽤나 정확했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소득은 없었다.
이외에 교수가 입 밖으로 낸 것들은 흘러나온 악신의 기운이 전해주는 악영향이라거나. 거기에 대응하기 위한 방책이라거나. 들어봐야 쓸데 없는 여러 자잘한 것들 뿐이었으니까.
슬슬 이야기를 듣는 것조차 귀찮아졌던 나는 괜히 기대해서 시간낭비했다는 말과 함께 교수실에서 빠져나왔다.
“제 딸아이가 저리 말은 해도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아아! 제가 경께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베네딕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교수를 보다 헛웃음과 함께 팩 고갤 돌린 나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조이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할아버지. 뭐 추측가는 거 있어요?’
<악신의 기운이 어찌하여 흘러나왔는지에 대한 것 말이냐?>
‘네.’
<머릿 속에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은 있다만. 나중에 에르기누스와 만나면 그 때 이야기를 해주마. 지금 단정짓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해.>
으음. 결국은 그 해골을 다시 만나러 가야 하나.
<그리고 루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는 그냥 듣기만 하고 따로 반응을 보이진 말거라.>
‘…네? 그게 무슨.’
<널 감시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도 꽤 실력 있는 녀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