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6
오랜만에 루시를 만나자마자 볼품 없는 모습을 보였던 베네딕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애써 태연한 체했지만 속으로는 계속해서 자신을 욕하고 있었다.
이 멍청한 놈. 몇 달 만에 루시를 만났는데 아비다운 멋진 모습은 보여주지 못할망정 루시를 보자마자 기절을 하다니!
제 아무리 루시가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검정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들 그게 말이 되는 짓이더냐!
물론 오늘따라 루시가 평소보다도 귀여워 보이긴 했다!
얼핏 제 어미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까지 있었지!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기절을 하는 게 말이 되느냐!
스스로를 향한 혐오에 빠진 나머지 또 과한 짓거리를 하다 루시에게 욕지거리를 들었던 베네딕은 루시와 함께 소울 아카데미에 도착할 때까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그랬던 그가 날카로움을 되찾은 건 자신, 정확하게는 루시를 향한 누군가의 시선을 감지한 순간이었다. 누군가 우리의 뒤를 따라 오고 있다.
하나. 둘. 셋.
…수가 많은데 실력도 괜찮아. 이건 개인의 음험함이 아니다.
조직된 곳에서 찾아온 악의지. 베네딕은 힘이 들어간 주먹을 등 뒤에 숨기며 총총 걸어가는 루시의 뒤를 따랐다.
기이하군. 지금 우리 딸에게 감시가 붙을 이유가 있나?
알른 가문을 정리하기 전이었다면 방계에서 수작질을 부린다고 추측이라도 해보겠는데, 한 번 박살난 놈들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어.
그렇다고 다른 세력에서 루시를 노릴 이유도 마땅찮아.
현 상황에서 주목을 받는 것은 성녀님이나 검성님, 파트란 영애처럼 공허의 추종자와 정면에서 싸운 이들이다.
이면에서 싸운 것으로 추정되는 루시가 타 세력의 눈길을 끌 이유는 존재치 않을 터.
애초에 내가 바로 옆에 있는데 미행이 떨어지지 않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왕국의 세력이나 나와 맞붙어보았던 타국의 세력이라면 저런 정신 나간 짓거리는 하지 않아.
점점 더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느끼던 베네딕은 루시가 조이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기습적으로 미행하는 자 중 하나를 집어 살기로 짓눌렀다.
어지간한 이라면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그리고 그 자가 갑작스런 살의에 버티기 위해 자신의 힘을 내비친 순간 베네딕의 의문은 해소됐다.
신성.
미행을 하던 이가 겉으로 내비친 힘은 주신이 내린 기적이었던 것이다.
교회에서 루시가 지닌 특이성을 눈치 챈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여러 의문이 해소되는 군.
현 상황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루시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나란 인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도.
저들의 세력이 세밀하게 규합되어 있는 것도.
혼란스러운 소울 아카데미에 잠입했다가 생겨날 수 있는 정치적 문제를 무시한 것도.
모두 다 납득이 가.
공식적인 창구로 접근하지 않은 이유도 명확하다.
의심은 있으나 확신은 하지 못한 걸 테지.
과거 루시가 벌여놓은 일들이 있으니 쉬이 확신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면 루시가 주신께 사랑받고 있단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 아닌가.
베네딕은 루시를 따라 복도를 걸으면서도 계속해서 고민을 이어나갔다.
일단 당장 생각해야 할 것은 저들을 어떻게 떨쳐내느냐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루시는 자신의 정체가 교회에 들키는 걸 바라지 않을 거다.
이 아이가 진정 그를 바랐다면 성녀님께서 먼저 앞에 나섰을 터.
그러니 저들의 의심이 확신이 되기 전에 떨쳐야 한다.
문제는 괜히 내가 거센 반응을 보이면 저들의 의심에 확신을 더해줄지도 모른단 점이야.
주신 교회라는 세력이 거대한 것도 거슬린다.
자그마한 세력이었다면 그냥 세력 채로 지워버리는 것도 생각해보았을 텐데.
어렵군.
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하면.
점차 깊어져만 가는 베네딕의 고민을 해소해 준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루시였다.
그녀가 건물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미행을 하던 이 중 하나에게 다가가 시비를 건 것이다.
처음에는 진정 이 자가 루시에게 음험한 마음을 품었고 루시가 그를 눈치챘노라 여긴 베네딕이었지만 중간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아니구나.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루시도 미행을 눈치 챈 것이야.
그리고 나 또한 미행을 눈치 챘을 거라 생각하고 내게 명분을 만들어주고 있어.
자신이 지켜야만 한다 생각했던 아이가 어느새 자기보다 먼저 앞에 나서는 모습을 본 베네딕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억누르며 루시의 행동에 어울려주었다.
루시의 선명한 목소리와 심기 불편한 베네딕의 모습이 겹침에 따라 점차 커져나가던 소란은 결국 미행을 담당한 조직의 장이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기적이 일어났거든요.”
교회의 심문관이 내뱉은 말을 들은 순간 베네딕은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공허의 추종자들을 상대하며 루시가 무언가를 일으켰고 교회가 그를 포착한 것인가.
“성녀님께서는 기적의 당사자가 아니기에.”
루시를 바라보는 심문관의 시선 속에서 베네딕은 광증을 느꼈다.
역시 심문관 놈들 중에서 멀쩡한 것이 없군. 기적이라는 단어에 담긴 환희 때문에 제 감정조차 제대로 숨기지 못할 지경이라니.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렇다는 것은 우리 딸이 기적의 당사자라는 이야기요?”
팔짱을 끼고 있던 베네딕이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자 심문관이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영애는 주신께서 친히 루엘의 메이스를 선물한 분이니까요. 기적의 당사자라 하여도 이상할 것 없죠.”
결국 확신은 없단 건가.
증거도 뭣도 없으면서 가장 가능성이 높단 이유만으로 우리 귀여운 딸의 뒤를 추적했단 거냐.
네 녀석들이 그토록 아끼는 성녀님께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보게. 심문관.”
열이 너무 오른 나머지 오히려 침착해진 베네딕은 전장을 바라볼 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심문관을 노려봤다.
“교회가 기적이 일어났단 사실에 흥분했다는 건 알겠네. 당사자와 만나고 싶단 마음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절차라는 게 있지 않나.”
언제까지고 루시가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늘에 떠오른 태양은 구름이 걷힘에 따라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자네의 말대로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주신께 사랑을 받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건 루시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여야 한다.
“그런 이가 교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지 않겠나?”
이런 잡졸 나부랭이의 개짓거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베네딕은 썩어 들어가는 심문관의 목소리를 듣고서 팔짱을 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몰라? 헛소리. 다 알아 들었으면서 기분이 나쁘니 모르는 체 할 뿐인 주제에. “
주제넘게 헛짓거리를 하지 말란 걸세. 주신 교회가 지닌 권세는 분명 드높지만 그것이 자네의 권세는 아니니까.”
두 손으로 책상을 짚은 베네딕이 심문관을 노려보자 그의 미간에 힘이 더해진다. 그걸 본 베네딕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하하. 내가 뒤로 물러난 지가 오래 되기는 했나 보군.
예전 같았으면 이런 시건방짐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터인데.
“자네는 내가 전선을 돌아다닐 무렵에 걸음마를 떼고 있었을 테니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잘 모를 것이야.”
길게 숨을 내뱉은 베네딕은 평상시에 억누르고 있던 자신의 기세를 아낌없이 풀어내 심문관을 압박했다. 그러자 심문관의 웃음기가 사라지고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든다.
“그게 당연하지. 치기 어린 자에게 다른 이의 목소리가 새겨질 리 없으니.”
베네딕의 목소리 한 마디 한 마디가 내뱉어 질 때마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게를 더한다.
현역에서 물러난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륙 최강이라 논해지는 괴물의 기세가 방 안을 전장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니 몸소 느껴보도록 하게. 어찌하여 타국이 왕국을 두려워했는지. 이 베네딕 알른이 지키는 변경이 통곡의 벽이 되었는지. 우리 딸의 무례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규탄이 그리 거세지 않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전장 속에서 심문관의 어깨는 점차 작아져만 간다.
반항 따위는 생각할 수 없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광증으로 공포를 지우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인간의 이름을 지닌 괴물은 그 존재만으로 인간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본능을 위협했다.
“만약 다음 번에도 같은 무례를 반복한다면. 그 때는 이런 위협으로 끝나지 않을 걸세. 나의 검이. 그대의 목에 닿아. 그대를 주신의 품 안에 안기게 하고 나서야. 모든 일이 끝나겠지.”
빗줄기 속에 남겨진 작은 짐승마냥 애처롭게 떨리던 심문관의 몸은 베네딕이 기세를 거두고 나서도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우리 딸이 기적을 일으켰다 생각될 만큼 고귀해보였단 이야기만 기쁘게 받아들이고 이만 떠나겠네.”
베네딕은 심문관을 달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 가자꾸나.”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심문관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루시는 베네딕의 말을 듣고서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할아버지. 방금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에요?’
베네딕이 심기가 불편하단 티를 냈고.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달라짐과 동시에 정신 나간 것 같던 심문관이 벌벌 떨기 시작하다니!
<너도 대충 느끼지 않았느냐. 기세만으로 상대를 짓누른 거다.>
‘저 심문관도 딱히 약한 녀석은 아니었는데.’
<그만큼 네 아비가 괴물 같단 게지.>
자기도 살아있을 적엔 얼마든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이야기하던 할아버지는 이내 헛기침을 하더니 화제를 바꿨다.
<그보다 루시. 성녀를 데리고서 다시 카리아에게 가자꾸나.>
‘네? 왜요?’
<저 놈들 꼴을 보아하니. 지금 교회가 상당히 개판이 난 듯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