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8
“그겁니다! 영애! 좀 더 새침하게! 흐아아악! 영감이 샘솟는다아아아!”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붓을 멈추지 않는 변태 사도는 그림이 완성되는 게 빠를지 아니면 저 변태 새끼가 빈혈로 뒤질지를 가지고서 내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으으으. 이래서 변태사도한테 붙잡히기 싫었던 건데. 이 꼴이 날 게 너무 뻔했단 말야.
거기에 더해서 지금은 예전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졌어.
저번에 변태 사도한테 그림을 허락했을 때는 관객이 얼빠여우뿐이었는데 지금은 아카데미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관객이 되고 있단 말야!
흐아앙.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방학 시작했으니까 빨리 집에 돌아가라고!
왜 너네 시종까지 불러와서 짐을 챙기게 해놓고는 뭔가에 홀린 듯 사람으로 된 장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데에에에!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을 해봐라. 너 같으면 호기심이 안 생길 것 같으냐?>
‘그냥 좀 귀여울 뿐인 여자애가 예쁜 옷 입고 자세 잡고 있는 게 뭐 그렇게 신기해요!? 이 세상 사람들은 다 페도 변태인가요?!’
<그냥 좀이라기에는…>
‘뭔가요! 설마 할아버지 얼빠여우보다 더 음흉한 마음을 숨기고 계셨나요!? 극혐이에요! 이제 장갑끼고 메이스 들 거에요!’
내가 여태까지 믿고 함께 싸워왔던 할아버지가 얼빠여우보다 더 한 인간이었다니!
젠장! 허접 주신의 총애를 받는 사람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너무 모욕적인 발언 아니더냐?!>
‘그치만!’
<그리고 말이다! 네가 아니라도 지금 네 주변에 있는 것들을 봐라! 눈에 안 뛸 수가 있을 듯 싶으냐!>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서 슬그머니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둘러 본다. 우선 내 앞에 있는 변태 사도가 눈에 띈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다.
“…저거 예술 교단의 사도님 맞지?”
“저런 미남이 어디 흔할 것 같니?”
“그건 그런데. 신사답기로 유명한 사도님께서 저딴 표정을 지을 리가 없잖아.”
현대였다면 전 세계의 우상이 되었을 법한 미남이 코피가 줄줄 흘러 입가를 적시고 있는데도 히죽거리며 붓을 움직이는 모습은 미쳐버린 예술가를 묘사하는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실제로 변태 사도를 보며 기겁하는 여성들 중에서는 양 손으로도 입가에 맺힌 희열을 가리지 못하는 이들이 여럿이었으니 말 다했지.
“성녀님은 이리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단아하시군.”
“예술 교단의 사도 옆에 계시니 한층 더 고결해 보이셔.”
“저런 분이 주신 교회의 성녀라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그런 변태 사도의 한 걸음 뒤에는 페이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를 중심으로한 그림을 그린다고 하자마자 눈을 번뜩인 그녀는 당연하다듯 우리를 따라와 변태사도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그녀는 구경을 할 뿐 따로 무언가를 하진 않았지만 페이비라는 존재 자체가 워낙에 눈에 띄는 지라.
아니. 자세히 보면 뭔가 움찔움찔 대고 있네. 뭔가 이성으로 본능을 억누르는 듯한 느낌이야. 변태 사도가 그린 그림이 그렇게 대단한가?
…어라? 페이비 손에서 흘러나오는 신성 뭐야?
왜 쟤 신성이 변태 사도한테.
아아악! 어쩐지 변태 사도가 안 쓰러진다 싶었어! 페이비가 바로 옆에서 회복을 시켜주고 있었구나!
페이비! 너마저 나를 배신하다니이이이!
“허어. 이거 참. 장신구에 담긴 그림과는 격이 다르군. 그림 속에서 루시가 살아 움직이는 듯 해.”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베네딕은 그림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내고 있었다.
젠장! 그림의 원본을 주겠다는 말에 매수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저 변태 새끼가 이상한 짓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면 막아야 할 거 아냐!
당신이 그러고도 아버지야?! 딸을 지키란 말야아아아!
현 상황이 너무도 당혹스러워서 온갖 사람들한테 비난을 쏟아내던 중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서 섬짓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깨를 움찔한 난 위기감을 따라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 건물의 지붕 위에서 굴뚝을 붙잡고 짐승이란 말조차 아까운 표정을 하고 있는 얼빠여우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 오늘따라 저 개과 동물이 조용하다 싶었어.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온 혐오를 그대로 눈에 담았더니 얼빠여우가 일순 굳었다가 녹아내릴 듯한 웃음과 함께 뒤로 넘어갔다.
힘을 잃은 얼빠여우의 몸이 지붕을 타고서 굴러가다가 바닥에 처박힌다.
이 과정에서 난 소리는 꽤나 시끄러웠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이 쪽에서 떨어져나갈 줄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은 잘못 됐어.
주신이라는 작자가 개허접 페도 변태 새끼일 때부터 슬금슬금 의심이 차올랐지만 설마 평범한 사람들마저도 이 꼴이라니.
사실 찌질한 병신 아그라는 이 잘못된 세상을 뒤엎으려던 다크나이트였던 걸까?
…아니. 정신 나가서 헛소리로 지껄여 봤지만 이건 너무 역겹네.
신이라는 칭호에 비해 존나게 속좁고 치졸했던 그 병신을 올려치기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무슨 소란인가 했는데 루시 알른이었나.”
“와아아. 루시 엄청 예뻐.”
“저 녀석은 원래 입 다물고 있으면 괜찮았다. 입을 안 다물어서 문제지.”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고갤 돌린 나는 아서와 프레이가 나란히 서서 재잘거리는 걸 보고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흐아아앙!
도대체 그림 그리는 거 언제 끝나는데!
나 언제까지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냐고!
저 변태 새끼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는 데 왜 그림은 완성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 거야아아아!
솔직히 말해봐! 너 사실 그저 헛손질 하는 거지!?
그냥 내가 이러고 있는 꼴을 보고 음험하게 웃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그치!
*
“참 할 일들도 없군. 그림을 그리는 게 뭐 그리 진기한 구경이라고 이렇게 모여 있는 건지.”
꼰대의 표본이라 할만한 이누키가 거대한 벽이 된 사람들을 보며 툴툴거리자 그 옆에 있던 제자가 웃음을 흘렸다.
“평범한 분들이 아니잖습니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예술 교단의 사도 분이시고. 그림의 모델이 된 것은 최근 예술 교단의 장신구로 한층 더 명성을 높인 알른 가문의 영애죠.”
루시 알른의 미모가 경이롭다는 것은 예전부터 유명한 설화였다.
한창 그녀가 망나니처럼 행동하던 무렵에도 그녀가 귀엽고 아름답단 사실에 토를 다는 사람들은 존재치 않았으니까.
허나 루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떠드는 것은 그녀를 눈에 담았던 왕국의 귀족들 뿐. 거기에서 한 걸음 물러섰던 이들은 루시의 미모가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다른 이가 초상화를 그려 가져다줘도 이런 사람이 어디있느냐며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지.
헌데 최근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왕국 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인정받는 예술가인 사도 프레테가 매일 같이 루시의 미모에 대해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여신의 간택을 받은 그가 여신이 현신한 것 같은 아름다움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것은 여러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루시의 그림이 그려진 장신구에 대한 일화가 빠르게 퍼져나간 것에는 이러한 사유도 영향을 끼쳤다.
소문에 민감한 호사가들이 교단의 그림을 보기 위해 장신구를 사들였고, 장신구의 효능을 본 후에는 앞에 나서 간증하듯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으니 교단의 장신구가 품귀현상을 빚게 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최근 왕국의 사교계에서 루시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이들마저도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 장신구를 구매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예술 교단의 사도가 루시를 데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인파가 몰리지 않는 게 비정상이었다.
아니. 따지고 보자면 작금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광기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주신 교회의 성녀. 예술 교단의 사도. 그리고 베네딕 알른이라는 괴물.
이 셋이 자리한 탓에 자연스레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에 어찌 광기가 스며들 수 있을까.
“좀 더 난장판이었다면 끼어 들 방법을 모색했을 터인데 이래서야 파고 들 방법도 없겠군.”
“그렇습니까…”
실망스러워하는 제자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뜬 이누키는 인파에서 눈을 떼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 속에 벽을 타고 올라가는 한 여성의 모습이 들어왔다.
흠? 척 보기에도 평범한 존재는 아닌 듯 한데 저런 분께서 어찌 골목에서 벽을 타고 계시는 거지?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비범함이 예사롭지 않단 걸 눈치 챈 이누키는 눈으로 그 뒤를 쫓았다. 지붕으로 올라가셨군.
그리고는.
아아. 저런 분도 알른 영애를 보러 온 건가.
놀랍군. 영애의 미가 상당하다 생각하긴 했다만 저런 신묘한 존재…
“허?”
그러다 여성이 녹아내릴 듯한 웃음을 지으며 굴뚝을 꽉 끌어안는 것을 본 이누키는 눈을 끔뻑이다가 다급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정 알른 영애의 미모가 저런 존재마저도 녹일 정도라는 말인가?
뭣 모르는 것은 이 곳에 모인 이들이 아니라 나란 말인가?
진지하게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된 이누키는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 내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제자야. 입 꽉 다물어라.”
“예? 스승님. 갑. 흐아아악?!”
제자의 목덜미를 쥔 이누키는 디딤발도 없이 위로 훌쩍 뛰어서는 지붕 위에 착지했다.
그리고는 혼이 빠진 듯 얼떨떨해 하는 제자를 내버려 두고서 수많은 이들에게 둘러쌓인 루시 쪽으로 고갤 돌렸다.
“…과연.”
몇 초 동안 할 말을 잃어버렸던 그는 다른 이들의 열광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물이 지나가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서 장난스런 웃음을 짓고 있는 루시는 매력적이었다.
대략 일 년 전 쯤. 이누키가 꿈에서 보았던 요정여왕의 춤사위를 떠올리게 할 만큼.
“말을 좀 바꿔야겠군.”
알른 영애의 취향에 맞추어 갑옷을 만들어주겠단 계획은 취소다.
지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영감을 무시해서야 어디 대장장이라고 지껄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