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3
땅에서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는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토룡과 그 놈이 이끄는 다른 마물들이었다.
소울 아카데미에서는 이게 튜토리얼의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에 토룡과 싸울 순 없었다.
레벨 1짜리 캐릭터로 싸울 수 없단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시스템 적으로 개입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두었던 것이다.
그 대신에 다른 잡졸들을 상대하면서 게임의 플레이 방법을 익혀야했지.
그 동안에 게임 속 여러 주요 캐릭터들이 힘을 합쳐서 토룡을 쓰러트렸고.
튜토리얼을 반복하면서 저 토룡 한 번 때려잡아보고 싶단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는데 그걸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이렇게 주어질 줄이야.
그것도 튜토리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뛰어난 스펙으로.
내가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순수히 기뻐했을 텐데.
혼란에 빠져 도망치는 이들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가던 중 넘어져서는 어찌할 줄을 모르는 학생 하나와 그를 공격하려는 흙으로 된 골렘이 보였다.
저대로 내버려둬도 다치진 않을 거다.
지금 움직이고 있는 몬스터들은 모두 다 아카데미 측에서 조종하고 있으니까.
그치만 내가 여기서 무기를 든 이유는 내 평판을 위해서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낫겠지.
평판을 개선하지 못해서 학교를 다니는 내내 바퀴벌레같은 취급을 당해버리면 유리멘탈인 나는 죽어버린다고!
속도를 높여 학생의 앞에 선 후 신성으로 만들어 낸 방패로 정령의 주먹을 막아냈다.
가벼웠다.
평소 나와 대련을 하던 칼의 검격에 비하면 이 정도는 고양이의 냥냥펀치나 마찬가지였다.
힘을 실어 주먹을 걷어낸 후에 골렘의 머리를 메이스로 내리 찍어 주었다.
머리가 부서져 동력원을 잃어버린 골렘이 무너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망쳐요.’
“약골. 두 발로 달리는 것도 못하면 기어서라도 도망치지 그래?”
내 말을 들은 학생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다른 학생들과 같이 도주했다.
구해줬으니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할 법도 한데.
내 말투가 그렇게 험악했던 걸까.
그래도 저 애가 그렇게까지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도와줬단 사실에 감사함을 품고 뒤에서 좋은 이야길 해주겠지?
나는 그리 생각을 하며 다시 토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토룡의 주변에는 이미 몇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용감한 이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실력은 그들의 용기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 토룡이 아무리 성체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용족이다.
그 기본 스펙은 어지간한 몬스터와 격을 달리한다.
이제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저 토룡이 눈치를 보며 적당히 공격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만일 처음부터 진심으로 나왔더라면 저들은 오래 전에 쓰러졌을 것이다.
난 자신이 쓰러질 각오를 하고서 토룡이 들어 올린 앞발의 앞에 선 이의 앞을 가로 막았다.
토룡이 앞발을 내리 찍는 순간 철벽이 고했다.
막아내라고.
나는 거기에 방패를 움직임으로써 답했다.
콰앙. 토룡의 앞발이 방패에 부딪힌 순간 내 발이 살짝 뒤로 밀려났다.
이건 좀 위력이 괜찮네.
포셀이 가볍게 내지른 주먹 정도는 되겠는데?
그렇지만 말야.
내가 여태까지 포셀하고 몇 번이나 대련을 해봤다고 생각해?
봐준다는 개념이 없는 그 인간을 상대하느라 몇 번이나 바닥을 굴렀는지 알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여아야. 공격할 생각은 하지 마라. 토룡은.>
‘할아버지. 제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인 내가 이 놈의 특성을 모르겠습니까?
날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네.
앞발을 밀어내고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토룡은 여러 종류의 용 중에서도 방어력이 높기로 유명한 녀석이다.
내가 마음을 먹고 공격한다면 데미지를 줄 순 있겠지만 그럼 방어에 소홀해진다.
여기에서 싸울 수 있는 게 나 혼자라면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메이스를 휘둘렀겠지만 지금은 딜을 해줄 딜러들이 넘쳐나니 그럴 필요가 없다.
토룡이 다시금 앞발을 들이 올리려던 순간에 토룡의 머리에 화염이 착탄한다.
이야. 저번에 봤던 것보다 위력이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알른 영애. 버텨요!”
입학시험을 치고 나서 많이 성장했나봐. 조이?
화염구에 타격을 입은 토룡이 조이 쪽을 노려보는 순간 저 멀리서 달려 온 신형이 토룡의 꼬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차기 검성. 프레이가 휘두른 검은 토룡의 비늘을 파고들어 그 살갗을 베었지만 일도에 양단을 하진 못했다.
토룡이 비명을 지르며 꼬리를 움직이자 프레이가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단단하네.”
흥분한 토룡이 마구잡이로 공격을 휘두르려고 한다.
안 되지. 그럼 곤란해.
네 앞에 적이 있는데 나한테서 눈을 돌리면 어떡하자는 거야?
어쩔 수 없네. 집중력이 떨어지는 꼬마같으니.
내가 적한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거기 꼬맹이 도마뱀♡”
내가 소리를 내자마자 토룡이 시선이 나를 향한다.
“땅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 벌레마냥 뇌가 퇴화한 거야?♡ 멍청한 건 알겠지만 주제파악은 해줬으면 좋겠는데?♡ 너 따위가 나한테서 시선을 떼다니 건방져♡”
날 봐. 이 허접 도마뱀아.
도발이 먹혀들어간 걸까.
몸 안에 차오르는 고양감과 함께 토룡이 포효를 내뱉으면서 나를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채찍마냥 떨어지는 거대한 질량의 습격에도 난 당황하지 않았다.
저 정도로 내가 무너지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신의 종자는 악의 공세 앞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을 지어니.’
견고한 신성.
방어를 할 때에 한해 신체능력을 상승시켜 주는 버프 마법이자 성기사 전용기.
기도문이 끝나 내 몸에 축복이 깃듬과 동시에 꼬리가 내리쳐진다.
쿠웅!
방패에 꼬리가 닿은 순간 나도 모르게 이를 악 다물었다.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너무 사정이 없는 거 아냐?
내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3D에서 2D로 변해버렸을 걸?!
두 팔을 덧대어 나를 짓누르던 질량에 저항하던 중 갑작스레 힘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메스가키 스킬의 버프효과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 소울 아카데미 학생 중에서 이런 제대로 된 버프를 줄 수 있는 건 한 명밖에 없지.
적절한 타이밍이야. 성녀님.
버프에 힘입어 토룡의 꼬리를 밀어내자 중심을 잃은 토룡이 휘청거린다.
“괜찮으세요? 알른 영애님?”
내 옆으로 다가온 페이비가 회복을 걸어주려는 걸 사양했다.
‘전 멀쩡하니 다른 사람을 신경 써주세요.’
“허접 성녀님. 자신의 눈부터 회복시키는 게 어떠신가요? 전 도움이 필요 없으니 다른 데 가보시지 그래요?”
페이비의 미소가 살짝 굳는 게 보였다.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에는 성녀님도 어쩔 수 없는 건가?!
“알른 영애님…”
– 쿠오오오오!
‘성녀님은 뒤에서 버프에 전념해 주세요!’
“허접 성녀께선 뒤에서 보조나 해주시죠!”
더 이상 대화를 했다간 성녀님의 웃음이 무너지는 걸 보게 될 것 같아 다급히 토룡에게 달려들었다.
나 이러다가 페이비한테 최초로 미움을 산 인간이 되는 거 아냐?!
*
조이는 루시가 토룡의 꼬리를 밀어내 넘어트리는 걸 보고서 안도를 함과 동시에 감탄을 했다.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 걸까?
아무리 페이비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 축복은 어디까지나 본래 가진 힘을 증폭시켜주는 것.
루시가 원래 지니고 있던 힘이 굉장하지 않았다면 저런 결과를 낼 순 없었을 것이다.
지난번 그 지옥 같았던 던전에서 전력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저 사람 어떻게 저렇게까지 강해진 걸까.
일 년 전까지만 해도 계단조차 제대로 못 오르던 사람이.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영웅을 수도 없이 배출된 알른 가문의 영애라는 건가.
토룡이 중심을 잃고 무너지자마자 버로우 공작 가문의 영식이 토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창을 들고서 토룡의 머리에 달라붙어 공격을 하는 그의 모습에선 어떻게든 공을 세우고 말겠단 의지가 느껴졌다.
버로우 영식의 의도가 어쨌건 그의 돌격은 조이의 입장에선 민폐였다.
자신이 준비하던 마법에 영식이 휘말릴까 다급히 마법을 거두어야 했으니까.
알른 영애와 함께 싸울 적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조이가 새로이 마법을 구상하던 때에 그 옆에서 느긋이 왕국의 제 3왕자인 아서 솔라딘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 실력이 많이 좋아졌군. 조이.”
“왕자님. 지금이 느긋이 품평을 하실 때인가요?”
조이가 다그치듯 이야기를 하자 아서가 웃음을 흘렸다.
어릴 적부터 친분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이다.
아서는 엄하게 다그치는 것처럼 보이는 조이가 사실 불평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되묻고 싶군. 조이. 급할 이유가 있나?”
“토룡과 그 부하들이 학생들을 공격하고 있잖아요.”
“조이. 그러니까 네가 얼빵 영애란 소리를 듣는 거다.”
아서의 농담에 조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그 모습은 상대에게 복수를 결의한 것처럼 독기로 가득했지만 아서는 전혀 겁을 먹지 않고 대꾸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얼빵 영애님. 갑작스레 사고가 났음에도 부상자는 아무도 없군요.”
“왜 왕자님까지 절 얼빵 영애라고… 어?”
조이는 그제서야 부상을 입어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다.
이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아카데미의 입학생들이 어느 정도 실력을 지닌 이들이라 해도 상대는 토룡이다.
응당 수많은 부상자가 나와 난장판이 되어야 할 터인데 상황이 너무도 평온했다.
“얼빵영애님. 이상한 점은 그 뿐이 아닙니다. 주변을 보시죠. 토룡의 부하 마물들이 멀뚱히 싸움을 구경하고 있잖습니까.”
그랬다. 처음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학생들을 습격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부하 마물들이 가만 서서 싸우는 걸 구경할 뿐이었다.
어째서 저들은 자신들의 두목이 싸우는 걸 구경하고 있는 거지?
“뭣보다. 교수님들 중에서 아무도 전투에 끼어들고 있지 않습니다.”
조이는 아서의 말을 듣고 교수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카데미 입학식에서 사고가 났으니 누구보다 다급히 전투에 끼어들어야 할 교수들이 전투를 관망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도주를 하는 학생들을 도우며 질서를 유지할 뿐.
충분히 개입할 수 있는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개입하지 않았다.
“왜?”
“답은 뻔하죠. 얼빵영애님도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아서의 말대로였다. 침착을 가지고 생각을 해보면 너무나도 쉽게 답이 나왔다.
“이 습격의 주도자가 아카데미 측이니까.”
“아카데미의 의도는?”
“입학생들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정확해. 조이. 역시 침착할 때의 넌 괜찮다니까.”
“…침착하지 않을 땐 이상하단 소리처럼 들립니다만?”
“맞다. 그럴 때의 넌 얼빵 영애니까.”
조이가 대놓고 기분 나쁘단 티를 내자 아서가 참다 못해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럴수록 조이의 표정은 점점 안 좋아졌지만 아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 소심한 영애가 무슨 짓을 저지를 리가 없으니까.
아서는 시무룩해진 조이를 지나쳐 토룡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는 루시를 살폈다.
알른 가문의 영애라 그런가 확실히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군.
움직임이 좋은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순간순간의 판단력도 무척이나 좋다.
흠을 잡고 싶어도 흠을 잡을 곳이 없어.
“하기야. 저런 실력을 지녔으니 입학시험에서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거겠지.”
“…엑?!”
아서가 중얼거리듯 흘린 말에 조이가 공작영애답지 않은 소리를 냈다.
“조이. 무슨 일인가?”
“왕자님. 방금 하신 말이 사실인가요?”
부들부들 떨리는 조이의 목소리에 고갤 갸웃거리면서도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른 영애가 입학시험에서 1위를 했단 이야기말인가? 사실이라네.”
“말도 안 돼. 거짓말. 거짓말이죠? 왕자님.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요.”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군.”
그랬다면 본인이 모욕당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서가 단호히 답을 하자 조이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을 본 아서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알른 영애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별명을 짓는 실력은 괜찮군.
얼빵 영애라니. 너무도 잘 어울리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