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30
두 번째 시도. 그리고 세 번째 시도가 모두 무산으로 돌아간 후에도 멀쩡한 바닥을 본 나는 바닥에 늘어놓았던 여러 폭탄들을 내버려 둔 채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뭔가 실수를 한 거 아니냐?”
“죄송한데요. 개허접 무능 왕자님. 저를 당신 옆에 있는 얼빵이 취급하지 말아주시겠어요? 뭐든 애매하기만 한 당신께 그런 소리를 들으면 좀 기분이 나빠져서요.”
“제가 뭐 어때서요!”
“뭐든 애매하기만 하다니! 그게 무슨 모욕이냐!”
내 언행에 휘말린 조이와 아서가 목소리를 드높였지만 나는 그들에게 대꾸하는 대신 곰곰이 방금 전에 내가 했던 것들을 되새겨보았다.
잘못된 부분은 없어. 폭탄과 마법진의 배합은 분명 완벽해. 그러니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천장이 박살나야 할 텐데.
‘그새 역파훼에 성공한 걸까요.’
<높은 확률로 그런 거겠지.>
에르기누스의 기억을 지닌 해골에게 주어진 시간은 채 한 달조차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근데 겨우 그 시간 만에 이 버그를 파훼해냈다고?
그게 말이 돼? 자기자신조차도 이해하질 못해서 대체 뭐냐고 소리 지르던 걸 그새 파훼해낸다니! 이상하잖아!
“…누가 찐따 새끼 아니랄까봐 집요해선.”
“저어. 영애님.”
투덜거리면서 바닥에 늘어놓은 것을 회수하고 있으려니 슬며시 페이비가 목소리를 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뭐야. 허접 성녀. 저 두 사람만 매도 들어서 서운했어? 너도 해줄까?”
“네? 아. 아뇨!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둘 마냥 내가 실수한 거 아니냔 이야기 하려는 거 아니었어? 그럼 뭔데?
“천장 위에서 이만한 소란이 일어났는데 바로 아래에 있는 에르기누스님께서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게 이상해서요.”
…
어?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지금 이게 게임이었다면 에르기누스가 반응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던전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던전 내의 NPC가 움직일 리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건 현실이고. 지금 에르기누스는 이 아래에서 멀쩡히 움직이고 있다.
헌데 위에서 이만한 소란을 일으켰는데 아무런 반응도 안 한다고?
심지어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을 텐데?
“혹여 에르기누스님께서 잘못되신 것은.”
“그럴 일은 없어. 여자한테 말 하나 제대로 못 붙이는 찐따 동정이라도 실력은 진짜니까.”
그 해골을 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일이다.
에르기누스 본인이 지닌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 이전에 이 아래에 존재하는 던전이 더럽게 음험하거든.
자신의 기억을 지닌 해골이 지키는 곳이라 그런가 다른 던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던전은 어지간한 이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끔찍한 곳이다.
당장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와 준 용병단을 투입시켜도 몰살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수준이지.
더 악질적인 부분은 해골이 던전 제작자인 에르기누스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탓에 던전 내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던전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엿 같은 함정과 적들을 상대방이 제일 좆같아 할 때에 배치할 수 있는 에르기누스는 저 던전 내부에서 승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상대다.
당장 모니터 너머에 있을 적에 던전을 공략하는 것도 에르기누스가 허락해줬기에 가능했다는 묘사가 있을 지경이라고.
그런 던전 속에 있는 해골을 쓰러트리려면 베네딕은 못 되어도 라샤급의 괴물이 강림해야 할 걸?
“그럼 에르기누스님은 왜 아무런 반응도.”
“뭐긴 뭐겠어. 지하에 처박혀 있느라 사회성이 망가져버린 개허접찐따님께서 지난 번 일이 무척 거슬렸다고 항의하는 거지.”
지난번에는 상황이 상황이라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던전을 공략하고서 대화를 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라.
하. 진짜 웃기네. 누가 보면 이번에도 우리의 필요에 따라 찾아온 줄 알겠다?
이번에 우리가 여기에 다시 온 이유는 에르기누스 네가 불러서잖아! 그런데 이런 식으로 투정을 부리면 어쩌자는 거냐!
이 따위로 사회성이 망가져 있으니까 아직도 동정이지!
그리고 앞으로도 동정일 거다!
좆도 없는데 성격도 더럽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찐따 해골이랑 어울려 줄 여자는 세상천지 어디를 둘러봐도 없을테니까!
“던전을 공략하란 건가. 별 어려운 일은 아니군.”
“저기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무능 왕자님. 이 아래에 있는 던전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만.”
“네에. 당연히 모르시겠죠. 기대도 안 했어요. 무대를 만들어줘도 제 할 일을 못해서 다른 사람을 위험하게 만드는 무능 왕자님이 여기에 대해 어떻게 알겠어요.”
“그건. 그게. 그.”
이틀 전에 있었던 일을 지적했더니 아서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흐으응. 이 부분에서 자기가 무능했다는 건 차마 부정하질 못하나보네.
“아님 혹시 제가 더 위험하길 바라고 시간을 질질 끄신 건가요? 그렇게나 제가 다친 모습을 보고 싶으셨던 거군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난 결코!”
“그러고 보면 변태 왕자님께선 잔뜩 다친 저를 보고 그대로 굳어버리셨죠? 그 때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어.”
“정말 음험한 마음이 없으셨다면 솔직히 대답하실 수 있겠죠? 그쵸오?”
아서가 목에 핏줄을 세우길 기대하며 쿡쿡대는 소리를 낸 나였지만 그의 반응은 내 상상과는 달랐다.
노을 아래에서 물든 것처럼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그는 바보 같은 목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걸 본 나는 자연스레 눈가를 좁히게 됐다.
반쯤 농담 삼아서 꺼낸 말이었는데 설마 진짜일 줄은.
개탄스럽구나. 아서아서야.
너만큼은 멀쩡한 인간이기를 바랐는데 결국 얼빠여우의 걸을 걷는 것이냐.
“왕자님.”
“아. 아니다! 분명 그 때 고귀하단 생각을 한 건 사실이지만 결코 음험함따위는 없었다!”
내 옆에 있던 조이가 추궁을 하기 무섭게 아서가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괜찮습니다. 3왕자님. 신께 함께 속죄합시다.”
“정말 아닙니다! 성녀님! 애초에 그 때 고결하다 생각한 것도 시련 속에서 저 녀석의. 그. 그으으.”
필사적으로 변명을 이어나가던 아서는 결국 자신의 양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갤 숙였다.
흐으응. 언제는 꼬맹이라 그러더니 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아니지. 생각해보면 저건 내 키가 좀 더 커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성장을 하면서 어른스러움이 더해지는 바람에 반전을 느낀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확 풀리네.
하긴. 잘 생각해보면 루시 외모 하나는 천사니까. 사춘기의 남자아이 입장에선 어쩔 수 없겠다.
고갤 주억거리면서 아서의 곁으로 다가간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죄송해요. 발정난 사춘기 꼬맹이는 생리적으로 무리라. 방구석에서 제 사진이나 보면서 알아서 해결해주시겠어요? 용기 없는 동정 왕자님?”
…어라? 저기 메스가키 스킬아. 이번에 왜곡이 너무 심하지 않니?
난 그냥 그럴 수 있다는 말을 해주려고 했는데 왜 이 꼴이 난 거야!?
“차라리 죽여다오. 아니다. 그냥 내가 죽겠다. 여기서 땅에 머리를 박고 죽을 거란 말이다!”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치욕스러움에 발광하는 아서를 반 강제로 비웃게 된 난 마음으로라도 아서를 외면해줬다.
한바탕 난리가 나는 바람에 이야기가 딴 대로 샜지만 아서가 처음에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알고 있다.
아마 아서는 내가 있으니 저 아래의 던전 따위 얼마든 공략할 수 있지 않냐 이야기한 걸 테지.
그 말대로다. 나는 에르기누스의 던전을 공략할 방법을 몇 가지나 알고 있다.
심지어 에르기누스가 어떻게든 던전이 공략되는 걸 막으려 한다 해도 그걸 뛰어넘을 자신도 있지.
그렇지만 말야. 순순히 던전에 들어가서야 에르기누스의 장난에 어울려주는 꼴밖에 안 되잖아.
내가 지금 그렇게 급한 것도 아니고 일정 상의 여유가 있는데 굳이 해골한테 당해줘야 해?
지가 부탁해서 여기에 왔는데도 문전박대를 당했는데 그 녀석의 던전을 공략해줘야 하냐고.
지금이라도 에르기누스가 기어 올라와서 고귀하신 루시 알른님! 제발 제 허접하고 음험한 던전을 공략해주세요! 라고 빈다면 재고를 해보겠지만 이렇게 소란을 피웠는데도 안 튀어나오는 걸 보면 그럴 마음은 없는 듯 하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
“괜찮습니다. 3왕자님. 영애님의 아름다움은 예술 교단의 사도님마저도 무너트릴 정도인 걸요. 3왕자님께서 잘못된 게 아닙니다.”
“마. 맞아요. 왕자님. 사실 루시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왕자님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걸요.”
“비교대상이 그분들이 된 순간부터 무엇인가 잘못된 듯 하다만.”
타다 못해 하얀 재가 되어버린 아서의 옆에서 페이비와 조이가 그를 위로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아서의 어깨는 점점 더 작아져만 갔다.
저기에 나까지 끼어들면 아서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걸 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상황이 정리될 때까진 입을 다물고 있자.
<그래서 어찌할 게냐.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던전에 들어갈 생각은 아닌 듯 한데.>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생각을 읽으신 거에요!? 할아버지 변!…’
<하. 네가 너와 붙어있었던 세월이 벌써 2년이 되어가려 한다. 그 동안 봐왔던 넌 던전을 공략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바로 뛰쳐들어갈 녀석이야. 지금처럼 팔꿈치를 툭툭 두드리고 있는 게 아니라.>
‘치사해요. 그렇게 논리적으로 말씀하시면 장난을 못 치잖아요.’
너무 사실이라서 도저히 뭐라고 말을 못하겠네.
<허허. 투정 부리기는. 어떡할까. 지금이라도 모른 체를 해줄까?>
‘됐어요. 그보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셨죠?’
<그래.>
‘기싸움 좀 하려고요. 대충 상황 돌아가는 게 하루 이틀 같이 있을 게 아닌 것 같은데 미리 찍어눌러놔야 나중에 편하잖아요.’
지금 급한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걸 알게 해줘야지. 그래야 내가 좀 불합리한 걸 시켜도 알아서 따를 거 아냐.
‘그 대단하신 에르기누스님께서 자기가 잘못했다고. 제발 이야기 좀 나누자고 비는 꼴.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이야기만 들었는데 군침이 흐르는구나.>
‘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