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32
루시와 루엘이 에르기누스를 엿먹을 방안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 아서, 조이, 프레이. 이 세 사람은 루시에게서 떨어져 던전에 대한 논의를 나누고 있었다.
“프레이가 없는 게 은근히 거슬리는 군.”
“켄트 영애의 무력은 대체 불가능한 수준이니까요. 어쩔 수 없죠.”
루시 알른이 또 다시 그들에게 내기를 내민 것이다. 루시를 신앙하다시피하는 페이비는 당연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지난 번 섬에서의 내기 때문에 치욕을 겪었던 조이와 아서 또한 설욕을 위해 루시의 내기를 받아들여 던전 안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처참하게 패배했다.
“젠장.”
지금까지의 전적은 3전 3패. 만약 끝까지 던전을 공략하는 데 실패한다면 세 사람은 세 번이나 루시가 내리는 벌칙을 감수해야 했다.
“아예 다음 번에는 마물과의 싸움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볼까.”
“루시가 그러는 것처럼요?”
“가능할까요? 그건 영애님의 지식이 아니고서야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억지를 부리면 흉내정도는 낼 수 있다.”
“무슨 비책이 있으신가요?”
조이의 물음을 들은 아서는 슬그머니 자신의 옆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어깨 옆에 떠올라 있는 자그마한 어린 아이의 신형 쪽으로. 한가하게 하품을 내쉬던 어린 아이, 초대 솔라딘의 조각은 아서의 시선을 받고 고갤 갸웃했다.
– 뭐냐.
며칠 전 공허의 추종자들의 습격이 지나간 후. 아서는 다시금 지하에 방문했다.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적이 그침에 따라 다시 돌아온 사령이 그를 안내해 주었으니까.
기적의 잔향이 남아 따끔따끔 거린다면서도 끝까지 그를 안내해 준 사령은 비시라는 여자아이에게 잘해달란 부탁을 하곤 그를 부서진 벽 너머로 보내줬지.
그렇게 다시금 마법진에 도달한 아서는 이 조각과 마주하게 됐다.
– 곤란하게 됐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허락받지 못한 자에게 자격을 줘버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란 게 곤란하단 거다. 제약 때문에 내가 설명해줄 수도 없고. 아아악. 진짜. 그 꼬맹이.
한참을 투덜거리던 조각은 마구잡이로 머리를 휘젓다가 결국 아서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 결국 네가 허락받게 만들기만 하면 다 해결되는 거잖아! 그럼 내 과실도 없어지는 거다!
‘…초대 솔라딘은 이토록 막무가내인 사내였나?’
– 당연한 거 아닌가? 제정신인 인간이 그 혼란의 시대에 나라 같은 걸 세울 생각 할 리 없잖아.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 뒤로 초대 솔라딘의 조각은 아서의 옆을 따라다니며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 내가 뭔데 도움을 주냐고? 하. 이래뵈도 신화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자의 조각이다. 너 같은 꼬맹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
– 검과 마법 양쪽을 다 사용한다고? 왜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지? 이해는 안 된다만 일단 휘둘러봐라.
– …과연. 이건 양 쪽 다 버리긴 아깝군. 둘 다 제대로 된 기본이 잡혀 있어. 이걸 제대로 융화시킬 수만 있다면.
처음에 기세등등한 조각을 봤던 아서는 그가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했다.
신화의 시대에서 생존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위업이고. 그와 동시에 초대 솔라딘이 남긴 여러 영웅담 중 일부만 사실이라 해도 충분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 아. 네게 적합한 마법이 있었는데!
– 음. 으으음. 젠장.
– 일단 네가 하던 수련을 계속해라. 나중에 기억이 나면 알려주마.
허나 그 기대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아서가 수련하는 것을 보며 이런 방법도 있다면서 놀라기나 하고.
가르쳐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가 다른 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때면 옆에서 같이 비웃고.
심지어 루시를 상대로 얼굴이 벌개졌을 때는 청춘이라면서 흐뭇해하기나 하는 이 녀석은 그저 거슬리는 존재일 뿐이었다.
다만 던전에 한해서는 달랐다.
– 오른쪽이 맞다.
– 자주 상대했던 얼굴이군. 먼저 다리를 노려라. 중심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아닌 녀석이다.
– 거 봐라. 내가 한 말이 맞지 않았나.
과거 악신의 힘을 지닌 무리가 가장 날 뛸 때에 싸워 온 조각의 경험은 현재의 던전에서도 유의미하게 작용했다.
그는 아서가 판단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정답에 도달했으며 적이 나오는 걸 보자마자 공략방법을 입 밖으로 내놓았다.
루시 알른처럼 말도 안 되는 기행 수준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루시 알른이 너무 규격 외일뿐이다. 이 꼬맹이도 어지간한 이들은 말로 못 붙일 만한 노련함을 품고 있어.
그러니 다소 치사한 방법이지만 이 녀석의 도움을 최대로 받아낸다면 분명 루시 알른이 내놓은 조건을 달성하는 것도 가능할 터.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보다도 앞으로 겪을 치욕에 대한 두려움이 더 거대했던 아서는 입술을 꾹 깨물고 양심을 팔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때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저기에 있다!”
“저 놈을 보내지마!”
“젠장! 저기는!”
천막의 문이 갑작스럽게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허리춤까지 닿을 만큼 기다란 검은 색의 장발을 지닌 남자는 안에 앉아있는 세 사람을 발견하곤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다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누구시죠?”
“그대는 누구지?”
“벌써 잊어버렸. 아. 참. 그래. 그 땐 해골의 모습이었지.”
남자는 세 사람의 경계에도 여유로히 고갤 주억거리며 자연스레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이걸 보면 알겠지?”
그리고 그가 자신의 얼굴에 새겨진 마법을 풀자 해골이 모습을 드러낸다.
“에르기누스님?”
“그래. 나다.”
지난 번. 던전에 방문했을 때 지겹도록 해골을 마주했던 조이가 퍼뜩 목소리를 내자 해골이 고갤 주억거리고는 다시금 얼굴에 마법을 펼쳤다.
“본래는 던전 안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만. 주신의 사…”
“에르기누스님. 그는 아직 숨겨진 사실입니다.”
“허. 그런가? 왜지? 주신의 총애를 받는 그대의 말이니 믿긴 하겠다만 이해가 잘 안 되는 군. 그 영광스러운 칭호를 숨겨야 할 이유가 어디 있지?”
“…그것이.”
말을 쉬이 떼지 못하는 페이비의 모습을 본 에르기누스는 고갤 갸웃하며 재차 물음을 던지려다 그 옆에 있던 아서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허어어? 아니. 아무런 자격도 없는 당신께서 어떻게 시련을 돌파한 겁니까?”
“…대체 그 자격이라는 게 뭡니까?”
“시련을 겪을 자격! 초대 솔라딘에게 내가 주었던 증표! 그게 없다면 시련은 그대를 허하지 않을 텐데요!?”
에르기누스의 말을 듣고서 다시금 옆으로 고갤 돌린 아서였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슨한 모습을 보이던 조각이 일순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흐음. 아무래도 이 꼬맹이가 유난을 떨었던 건 에르기누스님께 부여받은 역할과 관계된 문제인가 보구나.
지금 당장 모든 걸 사실대로 고한다면 재미있는 꼴을 볼 수 있을 테지만, 그것보단 말을 남겨둔 채 협박의 수단으로 쓰는 편이 더 이롭겠지.
“…그것이.”
판단을 끝마친 아서는 조각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고서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정말 저 아이는 겉과 속이 달라도 너무 다르군요.”
루시 알른 한 사람의 기행으로 정리되는 정황에 에르기누스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다 이내 아서 쪽으로 얼굴을 들이 밀었다.
“됐습니다. 저 아이가 자격이 있다 판단내렸다면 그것이 옳겠죠. 오래 전의 존재인 내가 왈가왈부할 내용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니 조각에게도 무어라 할 생각 없다 전해주십시오. 아니. 지금도 듣고 있을 테니 상관 없나.”
– 아.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만든 것인데 어찌 눈치를 못 채겠느냐.”
그제서야 삐질삐질거리며 조각이 모습을 드러내자 에르기누스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신경쓰지 마라.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지 않았나.”
–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 아. 저. 그리고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검기 그 자체를 마법으로 구성한 적이 있잖습니까.
“아아. 그것 말이냐.”
에르기누스와 초대의 조각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각을 볼 수 없는 조이와 페이비는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의 당혹을 보며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던 아서는 짜증 어린 표정과 함께 나타난 루시를 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저기요. 비린내나는 동정찐따마법사님. 바깥에 난리난 걸 보고도 그냥 무작정 들어가면 어쩌잔 거에요? 뭐. 이제는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한테도 말 걸기 힘들어졌어요?”
“하하. 그대가 잘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거든.”
“뭔.”
“실제로도 소란을 잘 다스리지 않았나. 내 판단이 옳은 게지.”
“하아아. 이렇게 사회성이 떨어지니 뒈질 때까지 혼자서 죽으신 거겠죠. 참 당신 답네요.”
“예전부터 눈치 없단 이야기는 자주 들었는데. 이게 영 바뀌질 않더라고.”
인격을 내려깎는 루시의 매도에도 불구하고 에르기누스는 조금도 분노를 표시하지 않았다.
지난 번 건방진 꼬맹이라 부르며 투덜거릴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덕분에 아서를 포함한 세 사람은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루시가 또 무슨 일을 했나하는 의구심을 품었다.
정작 루시 본인도 이 인간이 왜 이러는 것일까 경악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
“이렇게 다 모였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지난 번 그대들이 떠나갈 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노라 이야기한 걸 기억할 테지?”
“그래. 가겠단 사람을 붙잡는 당신의 찌질한 목소리가 너무 한심해서 잊기가 힘들더라. 역겹게 말야.”
“내가 그대들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나, 정확히는 날 남겨둔 영웅 에르기누스의 과오와 관계된 일이네.”
그리 이야기를 하고서 길게 숨을 내쉰 에르기누스는 자신의 품 안에서 한 꽃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무슨 마법적인 처리를 한 것인진 몰라도 뿌리가 꺾였음에도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꽃은 누구라도 아름답단 감탄사를 낼만큼 경외로운 모습을 지녔다.
“그대들은 요정의 숲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