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36
왕궁의 응접실은 다소 병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끔했다.
어디를 둘러보더라도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데다가, 방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새하얀 물건들엔 자그마한 흠결조차 보이지 않았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마저도 계산을 해 둔 것인지 따스한 햇살 너머에 존재하는 초록의 정경은 왕궁의 정원사가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을지 상상케 했다.
참 신기한 것은 깔끔하다는 것이 아름답다는 말로 넘어가진 않는단 점이었다. 응접실을 너무나도 건조해서 미적감각이 반응조차 하지 않을 만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이런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인지라 신기해서 마냥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슬그머니 내 귓가에 말을 속삭였다.
“여왕님께서 곧 들어오실 겁니다.”
“이제서야? 하.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단 망상에 걸려서 그런가 정말 바쁘게 사시네.”
내 한 마디에 응접실에서 대기하던 몇몇 신하들의 표정에 금이 간다. 곤란하네. 이 정도면 도발이라 할 수도 없는 수준인데 벌써 거슬려하다니.
진짜로 막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고성이 일 것 같아.
내 옆에 베네딕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큰 문제로 번지진 않겠지만.
“후후. 언제부턴가 버릇이 되어서요. 모든 걸 처리할 수 없단 걸 알면서도 일을 놓기가 힘드네요.”
속으로 푹 한숨을 내쉬고 있던 중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문 너머에 서 있는 1왕비와 그녀를 보조하는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 언제 온 거야!? 아무런 기척도 못 느꼈는데!?
아니. 나는 그렇다 쳐도 베네딕이나 할아버지마저도 아무것도 못 느낀 건 이상하지 않아?!
대체 1왕비한테 무슨 변수가 생겼길래.
“왕국의 지엄하신 왕비를 뵙습니다.”
““왕국의 지엄하신 왕비를 뵙습니다!””
베네딕이 고개 숙인 것을 시작으로 방 안에 대기하던 이들이 1왕비에게 인사를 바쳤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알른 영애.”
그걸 본 왕비 뒤편의 노인이 눈치를 줬지만 그런다 해서 꼿꼿이 펴진 내 무릎이 굽어지는 건 불가능했다.
어떡하라고!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데! 메스가키 스킬이 무릎 꿇는 걸 허락해주질 않는단 말야!
“영애!”
“자기 혼자 다 하려다 바보짓을 잔뜩한 누구누구님 덕에 죽을 뻔 했는데 내가 그런 무능한 사람한테 인사를 해야 하나?”
“무엄합니다!”
“예의를 차리십시오!”
“명줄도 얼마 안 남은 할배들이 왜 이리 시끄럽담? 성기로 기지개도 못 피는 고자들 주제에 왜 팔팔한 척 하는지 원.”
“무. 무슨. 망발을.”
“아무리 영웅의 딸이라 해도.”
“거기까지 하세요. 영애께서 저의 무능을 대신 수습해주신 건 사실이니까.”
얼굴이 시뻘개져서 메스가키의 매도를 듣다 고혈압으로 죽지 않을까 싶던 할배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억지로 억누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알른 영애. 이전보다 살짝 키가 자라신 것 같네요.”
“날 얼마 봤다고 그런 거까지 알아차리는 거야? 좀 징그럽네. 소름 돋아.”
“영애께서는 왕국의 미래를 이끌 인재시니까요. 세세한 변화를 못 알아차려선 안 되죠.”
으아아. 1왕비한테 찍힌 건 확정이네. 가치 없다 생각하는 사람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는 인간이 저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다니.
제발 안 좋은 쪽이 아니면 좋을 텐데 지난번에 내가 지껄인 걸 생각해보면 좋기는 어렵겠지.
마음 속에서 잔뜩 한탄을 내뱉는 날 굽은 눈으로 바라보던 1왕비는 살짝 숨을 들이쉬고는 고갤 들어 주변의 신하들을 살폈다.
“으음. 다른 분들이 옆에 있어서야 대화에 방해가 되겠죠? 모두들 잠시 자리를 비워주세요.”
“허나 왕비님.”
“베네딕 알른 백께서 옆에 계십니다.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과거 전장에서 날뛰던 베네딕을 아는 노인들은 그의 거대한 어깨를 바라보다가 이내 말없이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응접실에는 나와 베네딕, 그리고 1왕비만이 남게 됐다.
“알른 백. 당신께선.”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엔 어디까지나 딸아이의 호위로 따라 온 거니까요.”
“대륙 최강의 기사가 호위인가요. 후후. 정말 사치스럽네요.”
가벼운 웃음과 함께 내 맞은 편에 자리한 1왕비가 날 보며 눈웃음을 짓는다.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호의가 가득한 표정이지만 난 어째선지 저 표정 속에서 얼음장 같은 차가움을 느꼈다.
아마 눈매는 웃고 있어도 눈동자는 전혀 미동하지 않고 있단 사실이 내게 꺼림칙함을 선사하는 것이리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많습니다만 안 그래도 저 때문에 영애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으니 한 가지만 짚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어? 진짜? 나 오늘 잡담 나누다가 잔뜩 책이 잡혀서 단두대에 올라가는 상상까지 하고 왔는데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 준다면 너무 고맙!…
“왜 저를 그리도 경계하십니까?”
…넹?
“제가 영애께 무어라고 한 적은 없었습니다. 과거의 무례 때도 웃으며 넘어갔죠. 헌데 영애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적을 대하듯 하시는 걸까요.”
드. 들켰다?!
대놓고 경계하고 있다는 게 걸렸어!
티가 너무 났나?!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라도 안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건가!?
<신기하군. 겉으로 볼 땐 그저 오만방자한 꼬맹이일 뿐인데 말야.>
‘할아버지!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요! 대처법! 대처법!’
<대처법을 말해준다고 실현시킬 순 있느냐?>
‘…어. 그래도 모르는 것보단.’
<그냥 상대의 이야기에 어울려주기나 해라. 적대할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왜 그리 경계하는 게냐.>
그야 전 이 인간이 왕국을 위대하기 만들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아니까요!
왕국이 다시 예전의 위대함을 찾기 위해선 이 수밖에 없다면서 자기 아들을 신으로 만들려는 이 미친년을 경계 안 하면 누굴 경계해야 합니까!
어차피 말해도 안 믿을테니 굳이 언급하진 않겠지만 전 이 인간이 저지른 것도 저지를 것도 다 알고 있어서 도저히 친해질 수 없다고요!
“저희 루시가 1왕비님을 경계한다니. 무언가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아뇨. 알른 백. 지금도 저를 경계하고 계신걸요.”
뭐야. 이 인간 왜 카리아마냥 내 표정으로 생각을 읽으려 들어!?
“딱히 무어라 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이해가 안 될 뿐이라서요.”
지금 내 눈 앞에서 언급한 순간 무어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요?
당신이 당신 직위를 모를 인간도 아니고 알면서 압박하는 거잖아!
어디서 순진한 체야! 겉만 멀쩡하고 속은 썩어 문드러진 마녀주제에!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1왕비의 차디 찬 눈을 마주한 나는 자기가 납득하기 전까진 절대 날 놓아주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핑계를 대야하지? 내 속내를 들킨 상황에서 무슨 핑계를 대는 게 좋지?
<뭘 고민하느냐. 여느 때처럼 뻔뻔하게 나가면 되지.>
으으으. 역시 그러는 수밖에 없나.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다리를 꼰 후 1왕비에게 턱짓했다.
“뭐 잘 하는 것도 없으면서 망상에 빠진 정신병자를 싫어하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개인적인 선호 때문인가요? 그거라면 다행이네요. 전 카리아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들은 줄 알았답니다.”
…카리아가 여기에서 왜 나와?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이름에 입술을 곱씹고 있으려니 옆에서 베네딕이 입을 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당장 카리아 본인도 딱히 숨길 생각은 없지 않았습니까? 대놓고 자신의 본명을 드러내며 활동하는데 제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그럼.”
“아. 걱정하지 마세요. 카리아가 알른 영애를 위해 일하는 이상 제가 그녀를 배제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정신이 오락가락하신가요? 노처녀 아줌마 하나를 묻으려 해놓고 이제와서 친한 체 한다 그러면 믿을 것 같아요?”
1왕비가 카리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라면 모를까.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면 가만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
이제와서 카리아가 1왕비에 의해 배제당하면.
좀.
속이 많이 쓰릴 것 같거든.
“푸하핳. 헛소리. 차라리 자기처럼 추해진 꼴이 처량해서 동정이 간다 그러는 게 더 믿음이 가겠네요.”
최악의 경우 요정의 숲에 향하는 것보다 먼저 여길 뒤엎어버릴 생각으로 1왕비를 노려봤지만 1왕비의 얼굴에는 조그마한 요동도 없었다.
“제가 예전에 카리아를 배제하고자 했던 건 그녀의 왕국의 품에서 벗어났을 때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1왕비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그렇지만 알른 영애의 아래에 있는 한 카리아가 왕국을 위협할 일은 없잖아요?”
“흐으응.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요. 자신의 친구들을 소중히 여기는 영애께서 왕국에 해를 가할 리 없잖아요. 전 아주 잘 알고 있답니다.”
왕국을 위해서라면, 아니 왕국을 위해서라도 믿는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미치광이의 입가에 확신이 서린다.
“그러니 전 카리아도 영애도 적대할 생각이 없답니다. 제가 왜 그러겠어요. 당신을 건드려서 얻을 해가 너무도 많은데.”
“망상병 왕비님께선 이런 꼬맹이가 두려우신거군요?”
“네. 두렵답니다. 만약 당신이 왕국을 벗어나면 어떻게 될지.”
당연하단 듯 고갤 주억인 1왕비는 두 손을 다리 위에 포갠 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왕국에 속한 이상 전 당신을 해할 생각이 없답니다.”
일단. 당장은 건드릴 생각이 없다고 봐도 되려나.
다행이네. 이 미친 년이 훗날 벌일 일을 생각해보면 언젠간 적대하게 되겠지만 그건 나중일 이니까.
“흐응. 뭐. 망상병 왕비님께서 이토록 간절히 매달리시니 그 꼴이 처량해서라도 고갤 끄덕여드려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알른 영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영애께서 바라는 보상에 대해서요.”
후우우. 이제 시작인가.
좋아. 준비한대로만 하자.
이 왕국주의자의 구미에 당기는 말만 하는 거야.
그럼 내 어투가 다소 불손해도 어느 정도는 넘어갈 수 있을 터!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망상병 왕비님의 도움이야. 왕비님은 너어무 무능해서 나 같은 어린애를 위험에 빠트리는 바보지만 그래도 권력은 있잖아?”
“도움이라면 어떤?”
“왕비님의 가슴보다 자그마한 허접 왕국의 영토를 늘리기 위한 도움이요.”
내 말을 들은 1왕비의 눈가에 한 순간 희열이 스쳐 지나가는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