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2
악신의 봉인을 옮기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순조로웠다.
에르기누스가 이야기하길 봉인되었을 때 이상으로 약화가 된 상태라서 자신에게 발악조차 할 수 없었다는 모양이다.
“우리의 계획에 꼭 필요하지 않았다면 존재를 지워버렸을 터인데.”
에르기누스는 아쉽다는 듯 봉인을 바라봤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진 않았다.
“알른 영애. 여신의 사도님. 봉인에 기운을 담아 주시지요.”
“그딴 식으로 말하면 어떻게 알아듣나요? 찐따마법사님은 설명도 제대로 못 하는 거에요?”
“신성을 불어넣어주기만 하면 된다.”
아. 뭐야. 그런 거였어? 그럼 진작에 이야기하지. 그랬으면 이상한 매도가 튀어나갈 일도 없었잖아.
그가 시키는 대로 봉인에 신성을 담자 그 안에서 꿈틀대는 무언가가 느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 있는 존재는 무력화됐다. 악신의 기운의 극상인 주신의 기운이 저를 짓누른 걸 테지.
이쯤하면 됐다 싶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더니 변태사도가 하악거리는 소리를 내며 봉인에 손을 가져다댔다.
“나가 뒤져. 아니 시체로 남는 것조차 불쾌하니까 저 봉인 안에 대가리 박고 사라져. 세상에서 지워져버려. 제발.”
그 표정을 본 나는 진심 어린 경멸을 드러냈지만 변태사도는 영감을 주어서 감사하다 그럴 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으으! 진짜 싫어! 저 새끼는 대체 왜 나한테만 저러는 거야! 변태일거면 다른 녀석들한테도 공평하게 변태노릇을 하란 말야!
“알른 영애의 말이 옳았군. 악신의 기운이 흐트러졌을 뿐 던전에 이상은 존재치 않아.”
내가 변태사도에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동안 무언가 파악한 건지 에르기누스가 고갤 주억거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하나의 독립된 환경이 된 것인가.”
으음.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 문제없다는 거지?
하아아. 다행이다. 던전에 무슨 이상이 생겼으면 심장이 덜컹거렸을 거야.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한 우리는 혼란이 끝나지 않은 던전도시를 빠져 나와 다시금 예술 교단으로 돌아왔다.
당분간 악신의 봉인을 보관하기에 여기만큼이나 좋은 환경이 없단 에르기누스의 판단 하에서였다.
“루시. 나빠.”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금 프레이와 만난 나는 내가 그녀의 스승을 빼앗아갔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아. 참. 프레이 얘 검성한테 뭔가 배우기로 했다 그랬지?
켄트 가주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진짜 단단히 준비했네.
“미안. 바보검사가 너어무 허접이라 뭐라 그랬는지도 잊어버렸지 뭐야. 다시 가져가. 다 늙어빠진 변태 여자는 이제 필요 없거든.”
“…알른 영애. 발언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맞아. 루시 진짜 나빠.”
“어쩌라고. 내가 틀린 말 했어?”
프레이와 검성의 불평을 받아내며 어깨를 피고 있으려니 옆에서 얼굴을 창백히 물들이던 켄트 가주의 프레이의 양 팔을 붙잡았다.
“프. 프레이. 검성님께서 용무가 있으신 듯 하니 우린 조금 뒤에.”
“루시가 다 썼다 그랬잖아.”
“그렇지만 말이다.”
켄트 가주는 미묘한 표정의 검성을 보고 발버둥치는 프레이를 반강제로 안아들었다. 표정을 보아 하니 검성이 베네딕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 잘 아는 모양이다.
흐으음.
“바보 파파.”
“응? 왜 그러니 루시?”
“바보 검사랑 옆에 있는 아저씨 성애자랑 같이 놀아줘. 허접들이 투덜대는 꼴이 너무 같잖아서 입을 막아야 할 것 같거든.”
어쨌든 간에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같은 파티원인 프레이가 좀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도 잠시 베네딕을 던져 넣는 편이 좋을 것 같네.
봐. 내 말을 듣자마자 유덴의 얼굴에 환희가 감돌잖아. 유부남을 노리는 역겨운 여자 같으니.
“…응?”
“뭐야? 귀여운 딸의 부탁을 들어주기 싫단 거야? 만날 루시 좋아라고 했으면서 그거 다 빈말이었구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됐어. 아니. 됐어요. 바보 아버님. 마음가는대로 하세요. 제가 어디 짐승 같은 바보 아버님께 무어라 강요할 수 있겠어요? 그 큰 입에 잡아먹힐지도 모르는데?”
“안 하겠다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잖으냐! 하겠다! 우리 귀여운 딸의 주변 사람들을 위해 내가 무얼 못하겠느냐!”
호칭이 달라지자마자 기겁하며 말을 바꾼 베네딕을 가만 바라보던 나는 그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보고서 히죽 웃음을 지었다.
“정말 바보바보파파라니까♡ 꼭 내가 길게 말을 해야겠어?♡”
“미안하구나! 루시! 다음부턴 조심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베네딕을 저들 사이에 내던진 나는 한시 빨리 변태들로 가득한 예술 교단에서 탈출하기 위해 순간이동의 마법진에 발을 디뎠다.
‘저기. 할아버지. 수련하니까 생각난 건데 지난 번에 무예의 신께 조언을 듣고서 깨달음을 얻으셨다 하지 않았어요?’
<안 그래도 언제 말을 꺼내야 하나 생각하는 중이었다. 여태 할 일이 너무 많지 않았느냐.>
‘뭔가 성과가 있었어요?’
<있었지. 기대하거라. 네가 익히고자 하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무술이니까.>
오오오. 신화시대의 영웅인 할아버지가 대단하다 단언할 정도의 무술이라니!
그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시면 저 기대해버려요?!
잔뜩 기대해서 기대치에 못 미치면 엄청 실망한 티를 낼 거에요!?
<그치만 일단 할 일을 먼저 끝내야지. 아직도 준비할 것이 잔뜩이잖으냐.>
‘…여기에서 바로 현실을 들이밀지 말아주세요.’
확 끌어올랐다가 그대로 가라앉아버린 나는 한숨과 함께 다시금 아카데미 거리로 복귀했다. 아직 해야만 하는 일들이 여럿 있었다.
*
버로우 영지의 주인인 버로우 공작은 나름대로 온갖 일을 겪어보았노라고 자부했다.
공작의 자리를 쥐고서 벌어진 권력투쟁부터 시작해서 타 국가와의 전쟁, S급 던전 공략을 위한 싸움, 결혼, 사랑하던 아들의 장례, 폐인처럼 지내던 나날,
여기에 더해 얼마 전 어둠의 악신에게 육신마저도 빼앗겨 보았던 그는 자신보다 더 다채로운 삶을 살아본 이는 없으리라 여겼지.
그렇기에 공작은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세상에 다시금 주신께서 내려오신다 하더라도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허나 그것은 공작의 착각이었다.
자신이 어느새 폭풍의 한 가운데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몰랐던, 폭풍의 눈에 자리한 평온을 보고서 자신도 괜찮으리라 생각해버린 공작의 바보 같은 망상이었다.
“그래. 내가 지난 번에 얻은 은혜가 있으니 알른 영애께서 무얼 하더라도 협조하겠다 다짐한 건 사실이다.”
버로우 공작이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에게 진 빚은 단순히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는 버로우 가문이 역사의 죄악으로 남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의 잘못으로 인해 비틀렸던 아들이 지옥에서 구원해주었다.
버로우 가문의 영지에 자리한 사람들이 악신의 제물로 바쳐질 뻔한 것을 가로막았다.
어둠으로 물들어 다시는 회복될 수 없었던 버로우 영지에 본래의 말끔함을 선사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만한 구원을 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가 그 어떤 보답을 바라지 않았단 점이었다.
자신의 아래에 인생을 바치라 해도 능히 고개를 끄덕여야할 상황이었는데 루시는 자신의 공을 자랑하긴커녕 오히려 자신을 숨기려 했다.
자신의 부하를 보내 스스로의 존재를 수면 아래에 내버려두려 했다.
루시 알른은 알까? 그런 행동이 오히려 주변의 평가를 더 공고하게 만든단 사실을.
그 날. 죽은 줄 알았던 카리아가 그를 찾아와 아무 말 하지 말라 웃으며 이야기하고 갔던 날. 그 때부터 버로우 공작은 루시가 무얼 하더라도 협조하겠노라 다짐했다.
설령 자신의 가문을 걸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그녀의 뜻을 따르겠노라 결심했다.
단순히 은혜를 갚기 위함이 아니라. 루시 알른이란 이름의 구원자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도록, 자신의 아들이 그러했듯 어둠에 빠진 이들을 다시 빛 아래로 돌려놓을 수 있도록 돕겠노라고 말이다.
헌데.
“내 목이 아니라 위장을 아프게 만들 줄은 몰랐군.”
자신의 앞에 놓은 종이 쪽으로 시선을 돌린 공작은 저도 모르게 푹 한숨을 내뱉었다.
그 곳에는 오늘 버로우 공작가에서 있을 회의 참가자들의 면면이 적혀 있었다.
우선 가장 위에 있는 것은 왕국의 두 왕비님이었다.
왕가에 들어가지 않았어도 고귀한 혈통이라 불렸을 터인데 왕비라는 직함까지 얻게 된 두 사람은 이 나라에서 버로우 공작이 고개 숙여야 하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적힌 것은 온갖 기괴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파트란의 공작이었다.
특유의 험상궃은 외모 탓에 뒷세계의 지배자로 오해 받는 파트란 공작이 사실 평범한 사람임을 버로우 공작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봐야 공작은 공작이다.
편한 마음 가짐을 하고서 만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적혀 있는 것은 솔라딘의 송곳니이자 영웅인 베네딕 알른과 해상 무역을 통해 거금을 손에 넣은 거부이며 솔라딘 왕국 내 유통의 사분지 일을 지배하고 있는 아르테아 백작이었다.
작위 상으로는 버로우 공작보다 한 계단 아래지만 저들의 지닌 권위와 명성은 버로우 공작이 함부로 할 수 없을만큼 드높다.
손님으로 초대하게 된다면 필히 격식을 차려야 한단 상대란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버로우 공작의 위장을 아프게 하는 면면이지만 오늘 찾아 올 손님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주신 교회의 성녀이자 현 대륙에서 가장 드높은 명성을 지닌 여성인 페이비.
현 대륙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검사인 검성.
주신 교회조차도 감히 대할 수 없는 거대 종교 집단인 예술 교단의 사도.
전설로 전해지는 존재인 가장 날카로운 송곳니와 또 다른 숲의 주인.
거기에 더해 과거 버로우 공작의 심장을 몇 번이나 쫄깃하게 만들었던 카리아까지.
“…이 모두를 한 자리에서 상대해야 한다고?”
기다란 회의장을 가득 채울 면면을 상상한 공작은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래서 못하겠나요?”
그렇다 하여 이 제안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카리아. 자네라면 내 생각을 읽고 있을 터. 어디 내가 거부할 듯 싶나?”
“아뇨. 전혀.”
“그러면서 왜 물어보는 건가.”
버로우 공작은 반드시 자신의 다짐을 지킬 생각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