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3
버로우 영지의 사람들은 며칠 전부터 공작 가문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이 영지에 수많은 거물들이 오기로 했으니 그 날에는 되도록 외출을 자제하라고.
반드시 바깥에 나가야만 한다면 길을 지나다니는 모든 외지인에게 예를 갖추라고.
영지의 주민들은 이 이야기를 귀에 담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이 곳에 누가 오기에 공작 가문의 분께서 저리 경고를 하시는 걸까. 하고.
그리고 공작 가의 사람이 말한 당일이 찾아왔을 때 영지의 주민들은 집 안에서 창문 너머를 바라보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저희가 첫 손님입니까? 확실히 일찍 오긴 했군요.”
처음으로 영지에 방문한 것은 예술 교단의 사도였다. 이전에 버로우 영지에서 여러 선행을 했던 그는 영지 내의 사람들에게 큰 호감을 사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 곳에 혼자 온 것이었다면 도시의 사람들로 둘러싸이지 않았을까?
“제가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너무 이르다고.”
예술 교단의 사도를 보자마자 온 몸으로 반가움을 드러낸 이들이 차마 거기에 다가가지 못한 이유는 그가 홀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건 버로우의 평민들조차도 알만큼 유명한 얼굴이었다.
검성 유덴. 음유시인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영웅. 검 한 자루로 산을 베어 넘겼단 설화마저 존재하는 영웅.
“됐으니 가기나 하자꾸나. 현 대의 버로우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군.”
이외에도 한 미남자가 그들의 옆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영지의 주민들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럭저럭 잘생긴 무명의 마법사는 사도가 될만큼 잘생긴 남자와 야성적인 미를 뽐내는 검성에 비해 초라했으니까.
그 세 사람이 저택으로 떠나간 후 영지의 사람들은 가문의 이들이 괜히 호들갑을 떤 게 아님을 깨달았다.
방금 그 세 사람도 어마어마한 거물인데 저들이 첫 손님이라 말하지 않았나. 그렇다는 건 저 세 사람보다 대단한 이들이 온단 소리일 터!
“벌써 온 분들이 계시다고? 아. 프레테 그 새… 그 분 말입니까. 얼굴 구경이나 하러 가면 되겠네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델린다 백작가의 가주가 커다란 마차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열에 달하는 공간마법사를 이용해 마차 채로 공간을 뛰어 넘어 온 그녀는 짐의 검사를 맡은 후 저택으로 향했다.
“처음치고는 잘했다. 조이. 하마터면 바다 한 가운데에 떨어질 뻔 하긴 했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조이. 아버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니까.”
다음은 파트란 가문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험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공작과 까칠한 외모의 공작 영애.
그리고 묘하게 뒤가 구릴 것 같은 공작 영식의 조합에 영지의 주민들은 숨소리조차 참아가며 그들이 떠나가길 기다렸다.
잘못 얽히는 순간 그대로 인생이 끝날 것이란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꽤 이르게 왔다 생각했는데 다른 분들이 더 빨랐군요.”
“오히려 잘 된 일입니다. 2왕비님. 먼저 가서 인사를 드리도록 하죠.”
“그래야죠. 지난 번의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하니.”
허나 그 다음에도 영지의 주민들은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왕국의 2왕비가 모습을 드러냈기에.
목이 잘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예법을 차리던 영지의 주민들이 다시금 다리를 피려던 그 순간 또 다시 순간이동진이 발동되며 다른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후. 2왕비님도 참 급하시네요. 함께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 그러게나 말입니다.”
왕국의 존엄한 1왕비가 그 자리에 강림한 것이다.
1왕비를 지키는 기사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 벌벌 떨던 영지의 주민들은 그녀의 행차가 끝나고 나서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왜 공작 가문의 사람들이 단단히 주의를 주었는지 이해했다.
“대체 버로우 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1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존귀하신 분들이 다 같이 여기에 방문한 거지? 그 뒤로도 영지 주민들의 의문은 커져가기만 했다.
“자. 빨리 가자.”
“…자. 잠시 기다려다오. 프레이.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켄트 가문의 부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뉴먼 백작이 당장에라도 피를 토할 듯 창백한 얼굴로 걸음을 움직였다.
“움직입시다. 여러분들.”
“예. 성녀님.”
“부디 신께서 저흴 보우하시길.”
주신 교회의 성녀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저택으로 향했다.
그 후로도 순간이동의 마법진은 쉴 새 없이 영지에 손님을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주민들이 악신이 부활하기라도 하는 거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지니고 되었을 무렵. 순간이동진은 또 다시 사람을 보냈다.
“다들 부지런하시군요. 저희가 마지막일 줄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인과도 같은 덩치를 지닌 남성이었다.
구국의 영웅이자 대륙 제일의 기사 베네딕 알른. 긴 시간 초야에 묻혀있었음에도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동경이 되는 존재.
“죄송합니다. 제가 늦은 탓에.”
“맞아요. 뮤러님. 당신 잘못이에요.”
“…리나. 당신께서 장소를 잘못 알려 준 죄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것은 존재만으로 사람을 홀려버릴 듯 고혹적인 여성과 쉬이 다가가기 어려운 날카로운 분위기의 남성이었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베네딕 알른의 옆에 설 자격이 있다 증명하는 듯한 이들은 영지 주민들의 숨을 삼키게 만들었다.
“시끄러워. 허접들. 뭐 그리 호들갑이야? 다른 들러리들이 존귀한 날 기다리는 건 당연한 거잖아?”
이윽고 한 여자아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영지의 주민들은 자연스레 그 여자아이에게 집중하게 됐다.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있는 여자아이는 하나의 예술작품이었다.
보석보다도 찬란한 붉은 빛 눈동자도. 빛보다도 하얗고 밝은 피부도. 가녀리단 생각과 굳건하단 생각을 동시에 품게 하는 팔과 다리도. 밤하늘을 떼어 와 두른 듯한 검은 색의 드레스도.
“…천사님?”
당장에라도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갈 듯한 여자아이의 모습에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그 옆에 있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천사님.”
“천사님이다.”
“이 영지에 축복이 내리는 것인가.”
“기도를.”
“부디 이 곳에 아무 일 없기를.”
영지의 주민들은 어째서 저 여자아이를 보고서 이토록 경건한 마음이 새겨지는 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주민들은 그 마음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들의 마음에 몸을 맡겼다. 이 영지에 축복을 내려줄 천사를 향해 감사의 마음을 담았다.
“허어.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뭐래는 거야. 바보 파파. 나 업어주기나 해.”
“하하. 부끄러운 게냐?”
“호칭 바꿔?”
“알겠다. 빨리 가자꾸나.”
*
‘여기 사람들은 또 왜 이러는 거에요!?’
예술 교단에 있을 때야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까마귀 변태의 신도들이 어디 멀쩡한 인간들이겠어!?
그렇지만 왜 버로우 영지의 평범한 사람들이 나한테 기도를 올리는 건데!
내가 뭐라고 저러는 건데에에에!
물론 오늘 좀 힘을 써서 꾸미긴 했어!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하긴 했어! 근데 그렇다고 이럴 정도는 아니잖아!
너네들 페도야?! 응?!
<지난 번. 네가 이 영지에 내린 축복의 영향이겠지.>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저들의 혼이 구원자를 알아본단 게다.>
아니. 네? 그게 뭔.
…됐다. 생각하지 말자. 괜히 설명을 들어도 머리만 아플 것 같아.
한숨을 푹푹 내쉬며 버로우 가문의 저택에 도착한 나는 잔뜩 긴장해서 돌이 되어버리기 직전인 영지 내의 시종들을 보고서 동정심을 품었다.
빨리 악몽 같은 하루가 끝나길 빌고 있겠지.
미안합니다. 여러분들. 그치만 이걸 저희 영지에서 할 순 없잖아요.
이제 술자리에서 평생 쓸 수 있는 무용담을 얻으셨으니 그걸로 만족해주세요.
속으로 저들에게 사죄를 바치고 있으려니 어느새 회의장의 문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안 쪽에선 이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듯 소란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왕국주의자 왕비의 목소리가. 노괴 왕비의 목소리가. 찐따마법사의 목소리가. 허술공작의 목소리가. 페이비의 목소리가. 버로우 공작의 목소리가. 이외에도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가 흩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선이 집중되겠지?
으아아아. 위장에 구멍날 것 같아.
원래 이렇게 길게 끌 생각 없었는데에에에.
빌어먹을 얼빠여우! 왜 뮤러한테 장소를 잘못 전달해서 이 꼴을 만든 거야! 변태짓말고는 왜 제대로 하는 게 없냐고! 네가 그러고도 숲의 주인이야!?
“마음의 준비는 되었느냐. 루시?”
베네딕의 목소리를 듣고 한탄에서 빠져나온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얼굴을.
쓸어올리면 안 되지. 화장을 잔뜩 했으니까.
심호흡 하고. 얄미운 미소 짓고.
목 가다 듬고. 최대한 공손한 인사말 다시금 생각하고.
진짜 머리 아픈 건 베네딕한테 다 넘길 준비하고.
오케이. 좋아.
“내가 긴장할 것 같아? 바보 파파?”
“하하. 알겠다. 그럼 가자꾸나.”
베네딕이 커다란 문을 염과 동시에 안 쪽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일순 멈춘다.
문의 틈새 사이로 새로운 손님을 살피는 눈동자들이 보인다.
어느 하나 거물이라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들의 눈빛이 말이다.
괜찮아. 정해진대로만 말하면 돼.
사죄의 말 빼고.
최대한 뻔뻔한 느낌나게.
바빠서 좀 늦었습니다. 부디 이해해주세요.
이렇게만 말을 하면 메스가키 스킬이 아무리 왜곡을 해도 큰 문제가 생길 리는 없어.
“죄송합니다. 여러분들. 중간에 일이 있어 늦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 이제 내 차례다.
“와아. 다들 짐승 같은 눈으로 쳐다보시네요. 잔뜩 기다리느라 화가 나셨나요? 그래서 어쩌라고요? 저처럼 귀여운 여자애가 찾아와 주는 데 이 정도는 기다려야죠. 그런 인내심도 없는 어른들이라니. 개허접해.”
…
아니구나.
문제가 생길 수 있었네.
알고 싶지 않았어.
젠자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