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4
조이가 처음으로 버로우 저택의 회의장에 발을 디뎠을 때 그 곳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예술 교단의 사도. 검성. 아르테아 백작 등 사교계를 지나오며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과 얼마 전 그녀에게 마법을 알려주었던 에르기누스만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조이는 파트란 공작과 제프 파트란에게 그들을 소개시켜 줄 수 있었다.
이들과 그리 친하지 못했던 제프는 하나하나를 마주할 때마다 황송하단 듯 고개를 숙였지만 파트란 공작이 관심을 가진 것은 오롯이 한 사람 에르기누스뿐이었다.
“역사서에 남은 모습 그대로시군요.”
“좀 더 추레한 꼴이길 바라셨습니까?”
“아니요. 그럴리가요. 오히려 마법의 정점께서 이토록 정정하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빈 말 하나 없는 존경심이었지만 다른 이들이 걱정스러운 듯 파트란 공작을 바라봤다.
환희 어린 그의 표정은 꼭 눈 앞의 대마법사를 고문해서라도 지식을 캐낼 듯 험악했던 것이다.
“몇 가지 꼭 여쭤 보고 싶은 것이.”
마법사로서의 학구심을 풀기 위해 질문을 건네려던 파트란 공작이었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왕국의 존귀한 2왕비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이런 제가 대화를 방해했나요?”
“…아뇨. 그럴리가요.”
파트란 공작의 살벌한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2왕비가 자리를 잡은 후 그 뒤를 잇듯 1왕비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후로도 많은 손님들이 이 곳을 찾았지만 정작 이 모두를 끌어 모은 장본인인 루시 알른은 한참이 지나도록 얼굴을 비칠 생각이 없었다.
루시. 대체 언제 올 생각이야!? 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놓고 기다리게 해도 괜찮은 거야?!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위장이 찌릿찌릿한 느낌을 받던 조이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다행이야! 아예 무례가 될 정도로 지각하진 않았구나!
베네딕 백이 지닌 명예가 있으니 이 정도라면 말만 잘해도 큰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을 거야!
당사자보다도 긴장하고 있던 조이가 베네딕의 사과에 안도하는 그 순간 그의 커다란 덩치 너머로 루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누구보다 루시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자부하는 조이이지만 오늘의 루시는 평소와는 달랐다. 큰 자리를 앞에 두고서 공을 들여 꾸밀 때와도 달랐다.
루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이가 보아왔던 그 어떤 순간보다도 더 고결해보였다.
만약 예술 교단의 사도가 여신께서 강림하셨다며 호들갑을 떨어도 저도 모르게 고갤 끄덕이게 될 정도로.
이러한 감상을 품은 건 조이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술 교단의 사도는 이미 뒤로 나자빠진 상태고.
아르테아 백작은 주변의 시선조차 잊고 멍하니 루시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버로우와 파트란의 공작도 입을 모아 탄성을 내질렀고.
2왕비 또한 경외에서 흘러나오는 헛웃음을 내뱉었으며.
페이비는 물론이고 그녀를 제외한 교회의 사람들마저도 감복한 듯 눈을 끔뻑거렸으니.
아무 반응이 없는 듯한 1왕비도 무언가 생각이 있지 않을까.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에게 닥친 충격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루시가 여느 때처럼 폭언을 내뱉은 것이다.
자신을 성적으로 보고 있는 듯 해 싫다는 말로 시작해.
내가 누군데 알아서 기어야지라는 뜻이 담긴 폭언으로 이어져.
그 정도도 못 기다리는 허접이냐는 비난까지.
그건 분명 여느 때의 루시 같은 발언이었지만 문제는 이 장소가 여느 때와 같지 않단 것이었다.
버로우나 파트란의 공작마저도 주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 곳에서 저런 폭언을 퍼붓다니!
조이는 자신이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혼이 나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게 루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란 건 알겠지마아아안.
어떡하지. 어떻게 도와줘야하지? 발언권조차 없다시피한 내가 여기에서 뭘 할 수 있지?!
루시를 곤경에서 구할 방법을 찾아 필사적으로 머릴 굴리던 조이였지만 다행히 그녀가 나설 일은 없었다. 그보다 먼저 상석에 자리한 에르기누스가 목소리를 낸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 자리에서 누구도 그대들이 늦은 것에 관해 무어라 한 이는 없다.”
“오. 내 생각보다는 덜 허접했나보네요? 참을 줄 아는 착한 어른들이었나봐요? 칭찬해줄까요?”
“그건 됐으니 앉기나 해라. 그대의 가치를 인정해 여태 기다려줬으니 그대도 보답해야지.”
“치이. 쩨쩨하시네요. 그러니 여자랑 손 한 번 못 잡아보고 죽으신 거 아니에요. 동정마법사님.”
“시끄럽다.”
신화시대의 영웅이자 이 자리에 선 누구도 쉬이 대할 수 없는 대마법사가 그녀의 무례를 넘기자 다른 이들도 자연스레 고갤 주억거렸다.
물론 불만을 품은 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닌 듯 했으나 에르기누스를 비롯해 상석에 앉은 전원이 별 불만을 토하지 않는데 어찌 무어라 하겠는가.
예전 같았으면 이 상황에 난리가 났을 텐데. 과거 루시가 벌였던 여러 사고들을 기억하는 조이는 새삼 지금 루시가 있는 위치가 많이 달라졌단 걸 느꼈다.
“숲의 주인들의 대표 뮤러입니다. 세상엔 가장 날카로운 송곳니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죠.”
“…그게 전설이 아니었습니까!?”
“이번 해에는 참 놀랄 일이 많군요.”
회의장의 참석자들 대부분이 뮤러의 이름을 듣고서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이름은 영웅담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름 중 하나였던 것이다.
요정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숲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이유가 되는 자.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송곳니. 왕국 뿐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존중을 표하는 위대한 존재.
그와 리나가 회의장에 착석을 하자 버로우 공작이 이것저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모든 분들께서 이 자리에 참석하셨으니 슬슬 본론을 꺼내고자 합니다. 요정의 숲에 공략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선. 에르기누스님?”
“반갑습니다. 여러분들. 에르기누스라 합니다. 과분하게도 영웅이란 호칭을 지닌 자이며 당연하게도 대마법사라 불리는 자이기도 합니다.”
신화 시대의 영웅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존재치 않았다.
주신 교회의 성녀가. 예술 교단의 사도가. 왕국의 왕비들이. 위대한 공작들이. 저가 영웅 본인임을 증빙했는데 어찌 다른 이들이 토를 달겠는가.
“이번 일은 제가 제안한 것으로…”
에르기누스는 요정의 숲이 자신의 과오이며 이 짐을 남겨둔 것이 너무도 원통해 시대를 지나 이 자리에 섰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대개의 귀족들은 확실한 명분이 생겼다며 기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영웅께서 직접 원정을 떠나자 말한 것이지 않나.
다른 국가의 놈팽이들도 여기에 토를 달 순 없겠지.
참석자들이 저들끼리 쑥떡거리는 동안 에르기누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했다.
중간중간에 이름 있는 이들이 그에게 물음을 던졌지만 에르기누스는 그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완벽한 대답을 선사함과 동시에 혹시나 해서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부분까지도 해소해 주었다.
덕분에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요정의 숲을 구원한다는 계획이 실패할 것이라 여기는 자는 거의 존재치 아니했다.
어느 정도의 손실은 있을 지언정 요정의 숲은 분명 구원받는다.
“더 이상 질문은 없는 듯 하군요.”
이 사실에 놀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기에 참석한 거물들의 면면이 있는데 계획에 어설픔이 있을 리 있나.
모두들 요정의 숲을 복원하는 게 가능할거란 건 예상하고 왔다.
그렇기에 에르기누스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참석자들, 특히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먹여살려야 하는 입장인 용병단장이나 마도부대 대장 같은 이들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이권. 누가 어디에서 무얼 할 것이며 얼마를 투자할 것인가.
그를 통해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
오늘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가장 큰 이유이자 커다란 쟁점이 될 문제가 그들의 앞에 다가온 것이다.
“실례가 아니라면 먼저 발언하지요.”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파트란 공작이었다.
“저희는 이번 일에 공작 가의 마도 부대를 총동원할 것입니다. 에르기누스님께서 저희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조건으로요.”
“부탁하시지 않아도 가르침은 줄 생각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준비를 위해선 정교함이 필요하니.”
“그렇담 저희는 이 이상 언급할 게 없습니다.”
파트란 가문이 목표로 하던 마법을 얻고 말을 거두자 그 다음에 주신 교회의 성녀가 목소리를 냈다.
“저희 교회는 요정의 숲에 저희의 빛을 닿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빛이라는 단어로 에둘러 표현했지만 사실 이는 교회의 설립과 종교의 독점에 대한 이야기였다.
페이비의 말뜻을 이해한 이들은 예술 교단의 사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사도는 어깨를 으쓱일 뿐 무어라 하지 않았다.
덕분에 교회의 요구는 쉬이 받아들여졌고 교회에서 온 실무진들은 왕국과의 자세한 협의를 위해 잠시 자리를 떴다.
그 뒤에는 특정 단체를 대표하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이들이 목소리를 냈다.
검성이나. 예술교단의 사도. 숲의 주인 같은 이들 말이다.
누군가에 대한 호의나 보답을 위해 이 자리에 선 이들은 먼저 자신들이 바라는 게 없음을 이야기했다.
“저도 딱히 필요한 건 없습니다. 영웅과 함께 전장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인지라.”
검성까지 모든 말을 끝마치자 이제 참석자들은 회의장의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을 살폈다.
침묵을 지키는 1왕비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2왕비. 조정의 역할을 자처한 버로우 공작. 이외에도 알른 백이나 베네딕 백 같은 사람들말이다.
저들이 먼저 말을 꺼내야 그 뒤에 있을 이들이 목소리라도 낼 수 있으니까.
이런 바람을 눈치챈 것일까. 1왕비는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밝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저희 왕국의 제1 기사단이 최전선에 자리하지요.”
그건 가벼운 어투에선 상상도 할 수 없을 과격한 발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