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6
기사단 사이의 대결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사실 1왕비가 지휘권을 떠넘기고 싶은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른의 기사단은 하나 같이 괴물밖에 없는 걸!
젊은 신인 축에 속하는 허접견부터 시작해서 포셀까지. 게임 스토리 최후반부에 나와도 아 이래서 여태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었구나. 하는 놈들이 한 가득이라고!
이런 놈들을 제 1기사단이 어떻게 이겨!
아. 물론 걔네들이 아예 허접한 건 아냐. 그래도 나름 왕국의 정예랍시고 모인 녀석들이라 그런가 나름 그럴듯한 수준을 지니고 있지. 게임 속에서도 꽤나 까다로운 상대들로 나왔고 말야.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 속을 기준으로 한 강함이잖아. 게임의 영역에서 벗어나버린 벨붕 캐릭터들을 강할 수 있는 수준일 순 없어!
베네딕의 생각도 크게 다르진 않았던 듯 그는 1왕비가 내건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영지로 돌아온 베네딕이 기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모두들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하! 이게 얼마만의 실전입니까!”
“제 1기사단이라면 분명한 강자들! 무기를 휘두를 맛이 나겠군요!”
“알른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른 가문의 거센 훈련을 웃으며 받아낼 정도로 뇌가 근육으로 가득 찬 이들은 왕국의 정예들과 맞붙게 되었단 사실에 오히려 흥분을 느끼는 듯 했다.
일단 그래도 기사는 기사라 말은 공손하게 하고 있지만 겉모습만 보면 남자는 범하고 여자는 죽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어. 이거 반대였나?
음. 뭐 아무튼. 패배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기사들의 모습을 본 나는 필사의 훈련을 시작하겠노라 외치는 이들을 지나쳐 안 쪽의 수련장으로 향했다.
<자아. 그럼 이제부터 내가 깨달은 것을 너에게 전하도록하마.>
‘시덥잖은 거면 화낼 거에요.’
요정의 숲에 어떤 가치가 있는 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말 안 해 주고. 덕분에 사기캐를 빼앗겨서 내가 한층 더 고생을 하게 하고.
<후흐. 걱정 마라. 짬통에 박힐 생각은 없으니까.>
가볍게 웃음을 흘린 할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나를 거울 앞에 서게 했다.
<무예의 신께서 내게 했던 조언을 기억하느냐?>
‘부드러움과 강함은 정 반대에 있지 않으니. 였던가요.’
이후에도 이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던 나이지만 난 그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했다.
저거 무협 소설 속의 상투적인 어구잖아. 나무랑 잡초랑 비유하면서 때로는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할 수도 있네 뭐네 이야기하는 거 말야.
그게 대체 내가 다루는 무랑 무슨 관계인데?
<지금 네가 다루는 요정의 무는 한없이 부드럽고 유연하다. 봄에 흘러가는 바람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난 그 부분을 특화하려고 했다.>
할아버지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택했던 무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본래 부드러움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자 했다.
장난스러운 요정의 춤은 언제 흩어질지 모를 정도로 연약하니 상대의 공격을 맞받아치는 것보다는 흘려내고 회피하는 것을 방향성으로 잡은 것이다.
나 또한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다.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야?’보다 ‘눈 앞에 있는 것도 못 맞춰?’ 쪽이 더 얄미울 것 같았거든.
<나는 이 특화라는 부분에 매몰되었다. 과거의 내가 강함에 특화했듯 하나만을 추구해야 더 빠르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거든.>
‘맞는 말이잖아요?’
<그렇지. 보통은 맞는 말이지. 허나 요정의 춤은 그렇지 않다.>
할아버지는 과거 요정들을 상대하던 때를 떠올리며 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연약하고 가녀려 보인다. 장난스럽고 쉬이 흩어질 것처럼 보여. 그렇지만 아니다. 숲을 지키는 요정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겉모습에 현혹되어 요정의 장난에 참여하게 되면 평범한 인간들은 죽는다.
진심으로 요정을 분노케하면 재앙이 일어난다. 혹여 요정의 여왕마저도 적으로 돌리게 된다면 그 때는 일국의 멸망 이상의 위기가 닥친다.
어둠의 악신에게 넘어갔던 요정의 여왕을 상대해보았던 할아버지는 그녀가 얼마나 강했는지, 그리고 요정들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숲에 들어간다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보게 될 터이다만 요정의 춤은 너와 참 많이 닮아 있다. 가녀려 보이는 외견도. 장난스러운 웃음도. 세상 모두를 홀릴 미도. 그리고 그 아래에 도사리는 강함도.>
‘네.’
<그러니까 요정의 춤을 춰보자꾸나. 저들과 함께 놀이를 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설명을 끝마친 할아버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정하면 될 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걸음은 좀 더 가볍게. 바람을 밟고 날아갈 수 있을 것처럼.>
기사의 묵직했던 걸음에서 벗어나 웅덩이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톡톡 튀는 걸음을 취한다.
<팔과 다리는 좀 더 부드럽게. 물살에 함께 흘러가듯이.>
방패를 들 때부터 유지해왔던 단단한 자세를 벗어던진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처럼 동작과 동작을 부드럽게 연결한다. 요정의 춤을 춘다.
<그리고 몰아치는 것이다. 잔잔하던 바다에서 쏘아지는 거대한 파도처럼. 보고도 대처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그리고 강하게.>
톡톡 튀는 걸음은 강직하진 않으나 빠르다.
그렇기에 언제라도 땅의 품에 내리앉아 저들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
부드러운 동작은 본래의 강직함만큼 거센 힘을 품고 있진 않다.
허나 끊어짐 없는 부드러움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힘을 더하니.
그 끝에 도착했을 때에 담긴 힘은 이전보다도 더 강대하다.
메이스를 휘두른다.
춤 속에 숨겨져 있던 강함을 터트린다.
현혹된 자에게 분노를 보인다.
퍼어엉!
허공을 내리친 순간 폭음과 함께 일어난 바람이 내 머리칼을 뒤흔든다.
귀를 가득 채운 이명의 너머로 익숙한 알림음이 울리고. 내 앞에 푸른 색의 창이 새로이 떠올랐다.
[요정의 춤[루엘류]을 습득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긴 시간 끝에 고안해 낸 무가 하나의 스킬로 인정받은 건가.
문구를 확인한 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하는 웃음을 흘렸다.
루엘류라니.
할아버지가 만든 것말고는 이런 스킬이 없는데 루엘류라는 말에 의미가 있는 거야?
<훌륭하구나. 루시.>
‘아뇨. 전 그냥 할아버지가 시킨 것만 했는걸요.’
<너는 내가 상상했던 광경보다 더 뛰어난 춤을 펼쳐보였다. 아마 나는 네 춤의 일부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야.>
‘평소에도 이렇게 칭찬을 해주시면 참 좋을 텐데.’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린 나는 할아버지의 주접에 녹아내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내 앞에 뜬 알림을 할아버지에게 전달했다. 할아버지가 만든 것을 허접주신이 인정했다고 말이다.
<…영광스럽군.>
감격스러운 것인지 한참 동안이나 침묵하던 할아버지는 영광스럽단 말을 꺼내고서 다시금 입을 다물어버렸다.
으음. 평소 같았으면 지금 쿡쿡 찔러서 놀려야하지만. 가끔은 평범하게 노인공경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잘 생각해보면 할아버지가 만든 기술이 스킬로 인정받은 게 처음은 아니네?
신성투술이라던가. 할아버지가 펼쳤던 기적이라던가.
음. 입 다물고 있자. 괜히 말을 덧붙였다가 눈치 없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그보다 이번에 얻은 새 스킬이 루엘류라는 걸 보면 신성투술이나 기적처럼 다른 스킬하고도 연계할 수 있단 거 아닌가?
궁금증이 생긴 김에 바로 실험을 해볼까.
몸 안에 신성을 끌어올린 나는 눈 앞에 적을 상상했다.
떠올리는 것은 얼마 전 나와 무기를 맞댔던 상대.
악신에게 물든 루카.
녀석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 걸 본 나는 거기에 마주 웃어준 후 그가 달려드는 것을 바라봤다.
톡. 톡. 톡.
쉴 새 없이 발을 움직이며 루카가 내미는 공격을 회피한다.
거세디 거센 루카의 공세는 무엇이라도 부수어버릴 듯하나 파도마저 무너트릴 순 없을 지어니.
흘러가며 공격을 회피한 나는 여태 내가 지나 온 자리를 살폈다.
내 걸음과 걸음마다 신성의 족적이 새겨져 있다.
내 몸 안을 가득 채운 주신의 신성이 걸음에 묻어나와 잔영을 남긴 것이다.
그를 확인한 나는 재밌는 생각이 떠올리고 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무대가 만들어진다.
손으로 하나하나 마법진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몸짓과 발짓을 통해 대지에 그림을 그린다.
내가 춤을 출 장소를 만든다. 태양의 빛으로 밝게 빛나는 공연장을 제작한다.
프흐. 할아버지한테 신성마법에 대해 배우면서 지겹게 들었던 잔소리가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는데.
“허접 주신님. 눈치 있으면 알아서 힘 불어 넣으세요. 귀여운 여자애한테 도구처럼 부려지는 게 좋은 마조 인 거 다 아니까 괜히 아닌 척 할 생각 마시고.”
무엄이나 불경하단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건방진 어휘였지만 내가 그려낸 무대는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밝은 빛을 내뿜었다.
요정의 춤을 추기 위한 무대가.
사악한 것을 가두고. 삿된 것을 정화시키며.
올바른 일을 하는 자에겐 힘을 가져다주며.
나에게는 적들을 더 쉽게 홀릴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 완성된다.
굳이 따지자면 이는 신성영역의 응용에 가깝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내 발상에서 시작된 이 기술이 실전성이 있느냐 하는 것.
<의식의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는 무녀같구나.>
할아버지의 탄성 어린 목소리를 들은 난 이게 꽤 쓸만한 것임을 눈치 챘다.
좋아. 또 하나 만들었다. 가제로 요정의 영역이라고 이름을 붙일까.
근데 이 방식 요정의 영역 말고 다른 식으로도 얼마든 응용할 수 있을 것 같네.
신성을 사용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다.
“이 나이까지 살아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한 건 처음인 듯 하군.”
뒤 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갤 돌리자 문을 열고 들어 온 칼과 이누키가 보였다.
우리 허접견은 뭐에 감동한 것인지는 몰라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중이었고 이누키는 진심어린 감탄을 드러내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고집을 부려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에게 걸맞는 갑옷을 만들어 줄 수 없었을 테니까.”
갑옷?
…
갑옷 완성된 거야!?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