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7
루시 알른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은 그 순간 이누키는 소울 아카데미의 거리에서 빠져나갔다.
“스승님! 이미 대장간은 빌려두지 않았습니까!”
“그딴 곳에서 제대로 된 무구를 만들 수 있을 성 싶으냐.”
본래 이누키는 거리의 대장간 중 괜찮은 곳을 빌려 갑옷을 만들 생각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시설이 괜찮았기에 이 정도면 족하다 여겼지.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망한 기사의 무구를 만들어줄 때의 이야기. 자신이 걸어 온 인생을 걸고서 무구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상 모든 것은 완벽해야만 했다.
“오랜만에 찾아와서 대뜸 한단 소리가 대장간을 내놓으란 거냐.”
이누키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대장장이는 몇 년 만에 찾아와서는 며칠 동안 대장간을 빌리겠단 이야기를 듣고서 코웃음을 쳤다.
“마음에 드는 놈들한테만 무구를 만들어주는 너와는 달리 난 상시 영업 중인 장사치다. 며칠이나 망치를 들지 않은 순.”
“이 흙의 기운을 품은 금속 일부를 내어주지.”
이누키가 내민 것은 이전에 루시에게 마조흙이라 불렸던 물건이었다.
그중 절반 이상을 루시에게 내어준 이누키지만 왠지 모를 직감을 따라 나머지 반은 챙겨 둔 상태였다.
이것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하는가 생각하던 그였지만 루시를 마주한 순간 깨우침을 얻었다.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운 생각은 일종의 계시라고 봐도 좋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별 거 없어 보이는 흙이랑 철을 섞겠다고?”
“그냥 철이 아니다. 미스릴을 쓸 거다.”
“…너 치매 걸렸냐?! 이 아까운 물건을 왜 흙이랑 섞어서 버리려들어!”
그럴 거라면 그냥 미스릴을 내놓으라며 대장장이가 목소리를 드높였지만 이누키는 그 말을 가뿐히 무시했다.
과거의 연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이누키를 받아들여 준 대장장이는 이누키의 제자와 함께 의심어린 눈으로 이누키의 작업을 지켜봤다.
“저 녀석 머리 멀쩡한 거 맞냐? 이누키 저 놈이 금속 가지고 장난질 할 놈은 아닌데.”
“어제까진 평소처럼 괴팍하셨습니다. 그러니 분명.”
“어이. 멍청한 제자 놈! 스승의 험담을 할 시간에 빨리 와서 거들기나 해라!”
“예. 예에!”
이누키는 불의 마법을 엮어내 만들어낸 초고열의 용광로에서 미스릴이 녹는 것을 바라봤다.
미스릴이 기적의 금속이라 불리는 까닭은 특유의 가벼움과 경이로운 마력전도율 때문이기도 하다만.
무엇보다 대장장이들이 이 금속을 사랑하는 이유는 미스릴이 품은 융화의 특성이다.
신께서 내리신 것이 분명한 이 놀라운 금속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주신께서 세상을 평등히 바라보는 것처럼 어떠한 마력도 기운도 공평히 받아들여.
그러니 이 흙 안에 담겨 있는 무언가 또한 미스릴은 포용할게다.
용암마냥 벌건 색으로 녹아내린 미스릴에 흙을 섞어 넣은 이누키는 머잖아 자신의 생각이 옳았단 것을 확신했다.
지금 미스릴에 생겨난 변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이 내게 계시를 내려주신 위대한 분의 바람인 것은 분명해. 그러니 이제 내가 할 일은 그저 망치질을 하는 것뿐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영감을 따라서.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광경에 비추어 가며.
계속. 계속. 계속.
그렇게 며칠 간 잠을 자는 것조차 잊고 무작정 망치를 두드리던 이누키는 자신이 내놓은 결과물을 보고서 히죽 웃었다.
“어이. 이누키. 설마 이걸로 끝이라고 할 셈이냐?”
허나 옆에서 이누키가 만들어낸 갑옷을 보던 대장장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뭐 문제 있나?”
“있지! 치매 걸린 노친네야! 전선에 설 기사에게 이딴 걸 입히겠다고!? 무기 휘두르는 놈들이 피 보는 게 무서워서 살갗을 피해 공격 한다디!?”
단적으로 말해서 이누키가 만들어낸 갑옷은 빈 곳이 너무도 많았다. 어디를 공격하더라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어디 씹 정신 나간 변태 귀족이 창녀를 불러서 갑옷을 입히고 놀겠다고 했냐?!”
“내가 그딴 의뢰를 수락할 사람으로 보이나?”
“아니지! 아니니까 이러는 거 아냐! 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대장장이를 더 열받게 만든 것은 갑옷 자체는 경이로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단 점이었다.
빈틈이 너무도 많아 갑옷 구실을 못 해서 그렇지. 이누키가 만들어낸 작품은 대장장이의 신께서 직접 내려와 망치질을 한 것처럼 아름다웠던 것이다.
어둑어둑한 대장간에서도 빛을 내뿜는 갑옷의 모습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품은 대장장이마저도 이런 갑옷을 만들고 싶다 경탄할 정도였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이토록 대단한 실력을 지녔으면서 그 실력으로 만든다는 게 온갖 군데의 살갗이 훤히 드러나는 갑옷이라니!
“미스릴이 부족해서 그래!? 그럼 내가 줄게!”
“부족할 리가 있나. 네게 줄 것도 이렇게 남겨뒀는데.”
“아니. 뭔.”
“값은 이걸로 치렀다. 아. 그리고 갑옷의 진가를 보고 싶다면 며칠 뒤에 솔라딘의 알른 영지로 찾아와라. 보면 알 거다.”
뒤편에서 소리를 내지르는 대장장이를 내버려 둔 채 대장간을 떠난 이누키의 다음 행선지는 아카데미 거리였다.
그 곳에 자리잡고 있던 니키스는 이누키의 갑옷을 보자마자 이것이 누굴 위해 만든 것인지 눈치챘다.
“알른 영애가 입을 물건인가요. 정말 아름답지만 도저히 갑옷이라 부르기엔.”
“그런 소리는 됐으니 이 안에 덧대어 입을 걸 만들어다오. 영애의 치수는 기억하고 있겠지?”
“그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하아. 끝까지 고집을 피울 생각이군요. 알겠습니다. 대신 카리아님에게 찾아가 붉은이빨나방의 실을 구해 주십시오. 이 갑옷이 갑옷 노릇을 못하니 저라도 신경을 써야죠.”
붉은이빨나방은 저 먼 동쪽에서 생겨나는 던전에서만 출몰하는 마물이다.
습한 늪지대에 자리를 잡은 이들의 실은 검을 휘둘러도 베이지 않을만큼 질기고 날아드는 화살을 붙잡을 정도로 억세다.
희귀하게 생겨나는 던전에서 나방의 번데기를 찾아내야만 하니만큼 한없이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지만 이걸로 옷을 만들 수 있다면 어중간한 갑옷보다 더 나은 성능을 보인다.
“비자금을 깨야겠군.”
이누키의 부탁을 들은 카리아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 질색하면서도 루시를 위한 것이란 말에 대가 없이 물건을 가져다주겠노라 이야기를 했다.
그로부터 채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카리아가 실을 구해서 오자 니키스는 즉시 옷을 짜내기 시작했다.
“영애의 몸에 딱 맞추어 만들었습니다만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을 겁니다.”
“좋군.”
그를 보고 만족스럽게 고갤 끄덕인 이누키는 즉시 알른 가문으로 향했다. 한시 빨리 자신의 작품을 입은 루시 알른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아가씨라면 저 안 쪽에서 수련을 하고 계실 겁니다.”
“안내해줄 수 있겠나? 내 직접 그 분께 갑옷을 전해드리고 싶어서 말이야.”
루시의 호위인 칼은 잠시 생각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뒤편에 있던 베네딕이 호탕한 웃음과 함께 그를 안 쪽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덕분에 직접 루시가 있는 곳으로 찾아갈 기회를 얻은 이누키는 칼과 함께 훈련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주하게 됐다.
루시가 추는 요정의 춤을 말이다.
꽃잎의 위를 통통 뛰어 오르는 듯 가벼운 걸음걸이.
바람을 따라 날아다니는 듯 부드러운 움직임.
발을 움직이는 곳마다 새겨지는 따스한 신성.
장난스럽고 가벼워보이지만 그와 동시에 너무도 아름다워 도저히 눈길을 뗄 수 없는 요정의 춤을 바라보던 이누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잔상 정도로 생각했던 신성이 단순히 흩뿌려지고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루시의 움직임을 따라 흩어졌던 신성은 어느새 하나의 마법이 되어 대지를 빛내고 있었다.
주신의 따스한 신성으로 이루어진 영역이 펼쳐진다. 그 위에 자리한 요정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는 무대가. 삿된 어둠을 떨치는 성스러운 자리가.
요정이 춤을 추는 광경을 마주한 이누키는 신성의 한 가운데에 선 루시를 보며 그녀가 자신의 갑옷을 입은 모습을 상상했다.
새로운 갑옷을 입은 채 춤을 추는 루시는 이누키의 어설픈 상상 속에서도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래서일까. 이누키는 도저히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한 기대감을 견디지 못하고 루시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서 외쳤다.
당신을 위한 갑옷이 준비되었노라고 말이다.
*
이누키라는 대장장이가 드높은 실력을 지닌 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히든 아이템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대장장이는 하나 같이 전설적이라는 설명이 따라 붙는 이들 뿐이니까.
그런 전설의 일각인 이누키가 만들어낸 갑옷이 완성되었단 이야기를 들은 나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갑옷을 기다렸다.
어떤 물건이 나오려나.
판타지스러운 기사의 갑옷? 정석적이지만 멋있고 좋지.
풀 플레이트 느낌이 나는 갑옷도 실용적이라 괜찮을 것 같아.
아. 물론 얼굴을 가리면 곤란해. 얄미운 웃음이 가려지면 도발의 성능이 줄어드는 걸.
“이거다.”
판타지 특유의 중후하고 묵직한 갑옷을 기대하던 나는 이누키가 내민 갑옷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걸 보고서 떠오르는 말은 여럿이었다.
왜 갑옷이 수영복만큼이나 노출도가 높은 것이냐던가.
이렇게 피부가 많이 드러나면 갑옷으로써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느냐던가.
이외에도 머릿 속을 돌아다니는 말들은 여럿이었지만 그 이야기들을 하나로 종합하면 이랬다.
“야. 페도 노친네♡ 네 눈에는 이딴게 갑옷으로 보여?♡ 내 눈에는 축 늘어진 성기의 원념을 담은 변태새끼의 집착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어차피 쓰지도 못할 좆을 그렇게 세우고 싶어?♡”
이딴 게 갑옷이냐!? 화살이 날아오면 피부로 받아내야 할 것 같은 이딴 게 갑옷이냐고!
이런 걸 입히는 건 모니터 너머의 이야기잖아!
왜 현실에서 이런 갑옷을 입히려 드는 건데 이 변태새끼야!
“이걸 안에 입은 후 위에 덧대어 입으면 된다. 방법은.”
“성욕에 미쳐서 귀가 멀으셨나봐?♡ 그러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심장마비로 뒈지면 어쩌려고 그래?♡ 너 같은 변태새끼가 사라지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지겠지만 내 마음에는 역겨움이 가득찰 것 같단 말야♡”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알겠다만 일단 입어봐라. 그러고 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다.”
아니 이 노친네 추악하게 왜 이래? 갑옷을 만들다 페도의 본성에 눈을 뜨기라도 한 거야?
역겹단 감정을 잔뜩 담아 이누키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빛은 시종 진지했다.
으아. 뭔지 모르겠네. 자신의 혼을 태운 듯한 장인의 얼굴로 이딴 갑옷을 내밀다니.
…진짜 뭐가 있는 건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만 한 번 입어보거라. 아무것도 없다 싶으면 내던져도 괜찮지 않으냐.>
‘어느 변태들한테 놀아나는 느낌이라 마음에 안 드는데요.’
<무슨 감정인진 알겠다만 적어도 눈 앞의 대장장이는 의심하지 않아도 될 듯 하구나. 저 녀석의 눈은 장인의 것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변태사도도 만날 장인의 눈을 하고 다니는데요.’
하아아.
그래. 그래도 대단한 장인이 만들어낸 물건이니까 한 번 입어보기나 하자.
바니걸도 입었는데 이거라도 못 입을 게 뭐야.
두 사람을 내쫓고 에린을 불러 온 나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갑옷을 걸쳤다.
그리고서 깨달았다.
이누키가 왜 이 갑옷에 그리도 집착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