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0
뒤편에서 왕국의 기사단과 알른의 기사단이 맞붙는 것을 살피던 베네딕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꾹 눌렀다.
루시가 대련에 참여하겠다고 할 때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저 아이가 전선에 선다는 것은 누군가의 이성을 날려먹는다는 이야기이니까.
알른의 기사들과 대련할 당시 루시의 목소리에 휘둘리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고 ‘내가 주군의 따님께 무슨 짓을!?’이란 소리를 하며 좌절하는 이를 수도 없이 보았던 베네딕은 루시가 앞에 나섰을 때 분란이 생기리라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을 막지 못한 까닭은 그저 베네딕이 루시에게 한없이 무르기 때문이었다.
귀엽디 귀여운 딸이. 파파라고 자신을 부르면서. 새 갑옷의 성능을 실험해보고 싶어요! 라고 외치는데 어찌 그를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본래 베네딕과 루시 사이에 있었던 대화는 수많은 비꼼과 욕지거리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베네딕은 그 모든 걸 뇌내에서 보정하고 귀여운 딸의 모습만을 기억에 담은 채였다.
“가주님. 참전하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알른의 기사단장 포셀이 팔짱을 낀 채 질문하자 베네딕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그대는 왜 그러고 있는가.”
“이 편이 기사들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될 듯 하여.”
“나도 똑같다.”
본래 왕국의 제 1기사단과 알른 기사단 사이의 격차는 이 정도로 크지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들 또한 왕국에서 제일가는 재능들.
정치적인 알력관계로 인해 자리를 얻은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들은 왕국의 검이 될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
특히나 위협적인 것은 기사단장 타볼이다.
과거 베네딕과 수도 없이 검을 맞대고도 살아남은 저 남자가, 패배와 패배 속에서 상처를 쌓아 온 저 자가, 가문조차도 반쯤 등을 진 이가 괜히 여태 기사단장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인성적인 측면이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한없이 멍청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기사로써는 일류라 불러 마땅한 이다.
본래라면 알른 기사단 내에선 포셀이나 되어야 맞상대를 할 수 있는 작자란 말이다.
허나 오늘은 달랐다.
“저 바보가 가주님 말고 다른 이에게 놀아나는 건 처음 보는 듯 하군요.”
“…내가 타볼을 가지고 논 적이 있었나?”
“예전에는 많았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시절엔 아예 박살을 내두셨죠. 괜히 저 자가 아직도 가주님을 미워하는 줄 아십니까?”
“크흠.”
헛기침으로 이야기를 끊은 베네딕은 다시금 전투의 최전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사단을 이끌어야 할 타볼은 지금 한 여자아이에게 놀아나고 있었다.
단두대 같은 내리찍음은 여자아이의 살갗 하나 스치지 못했고.
대목마저도 반으로 가를 휘두름은 바람을 스쳐지나가며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특유의 맹렬한 돌진은 발정난 짐승의 추악함으로 바뀌었다.
루시 알른의 발걸음이, 그녀가 전장 한 가운데에서 벌이는 춤이, 그녀를 시야에 품은 자들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레 눈길을 주게 될 요정의 움직임이, 한 국가의 기사단장을 지성 없는 마물로 만들었다.
물론 타볼이란 존재는 머리가 텅 빈 상태에서도 위협적이었다. 생각이 사라져도 수십 년에 걸쳐 몸에 새겨 온 단련의 증거는 지워지지 않으니까.
“칼 저 녀석이 언제 저렇게까지 성장한 거지?”
“제 입장에서는 아가씨의 성장이 더 눈에 띕니다만.”
“하하. 누구의 딸인데 그런 것에 놀라나!”
허나 타볼의 괴물 같은 공세는 단 두 사람.
루시와 칼에 의해 가로 막혔다.
타볼의 앞에 서 있는 것은 루시였다.
그녀는 타볼이 내리치는 검을 가뿐히 피해내거나 방패로 흘려내며 그를 가지고 놀았다.
이 과정에서 열이 끝까지 오른 타볼이 루시를 방패 채로 박살내기 위해 힘을 끌어 모으면 옆에서 칼이 끼어들어 타볼의 호흡을 빼앗았다.
그러다가 타볼이 자신을 먼저 배제하려 들면 칼은 귀신 같이 뒤로 물러나고 다시금 루시가 그를 붙잡는다.
이 과정에서 주변의 다른 기사들이 루시에게 달려들려 하지만 그들의 검은 결코 닿지 못한다.
루시의 개가 되길 자처한 칼은 누구의 송곳니도 루시에게 닿지 못하도록 철저히 주변의 기사들을 배제했다.
“참을성이 좋군. 상대를 마무리 하는 것보다 변수를 제거하는 데에 치중하고 있어. 호위의 검이다.”
“옳은 선택이죠. 아가씨는 존재만으로 전선을 뒤흔들고 있으니까.”
단순히 루시를 지키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략적인 시각에서 그녀를 보호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칼의 선택은 옳았다.
루시라는 존재의 영향력은 타볼이란 짐승 하나를 붙잡아두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으니까.
왕국의 기사들의 눈이 루시를 향한다. 그들이 품은 분노가 한 여자아이에게로 모여든다.
자신이 해야 할 일 보다, 눈 앞의 적보다, 주변 동료들의 안위보다, 저들에게 있어선 루시 알른이란 한 여자아이를 울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가주님. 아가씨께서 지닌 힘이 저토록 강했던가요?”
“타인을 분노케하는 힘을 말하는 게지?”
“예.”
오랜 시간 루시와 함께 훈련을 했고 대련도 해왔던 포셀이나 루시를 계속 지켜봤던 베네딕은 그녀가 지닌 힘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고갤 갸웃했다. 루시가 지닌 도발의 힘은 분명 막강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에 한정된 것이지 않았나.
지금처럼 한 곳에 자리한 모두의 시선을 끌 정도는 아니었을 터인데.
“인정하고 싶진 않다만 저 갑옷의 영향이 크겠지.”
베네딕은 무어라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루시가 입은 갑옷을 살폈다.
이번에 이누키라는 전설적인 대장장이가 선물한 저 갑옷은 도저히 딸에게 입힐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저 옷을 어딘가에 집어 던지고 싶다는 것이 베네딕의 본심이었다.
그렇지만 이 탐탁치 않은 마음과는 별개로 저 갑옷은 대단한 물건이었다.
노출이 과다하단 점을 제한다면 갑옷이 품은 미는 경이로웠다. 한 장인이 자신의 인생을 담았노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안 그래도 여신의 현신이란 소리까지 듣는 루시다. 그런 그녀가 자극적인 노출과 함께 살랑거리는 천까지 다리 부근에 달아두었으니 어찌 시선이 안 끌리겠는가.
루시가 달고 다니는 여우가 그 아래를 보려다 걷어차였던 것을 떠올린 베네딕은 기사들이 보내는 시선 사이에 역겨운 욕정이 스며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또한 루시가 새로이 배운 무술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다.”
루시가 요정의 춤이라고 소개한 저 무는 바람처럼 가벼우며 무희의 움직임처럼 매력적이다.
저것을 몇 번이나 보았던 알른의 기사들마저도 시선이 끌리는데 저기에 익숙치 않은 기사들의 입장에서는 어떨 터인가.
“시선을 떼는 것은 불가능하다. 루시의 장난스러운 웃음도, 저들을 향한 비난도 외면할 수 없다. 쉬이 말을 하자면 루시의 힘을 저들에게 강제하는 셈이지.”
기사단이 단체로써 강한 이유는 저들이 단체로 싸우는 것만을 평생토록 수련해왔기 때문이다.
수십 수백이 하나처럼 움직일 수 있기에 기사단은 다른 단체를 압도할 수 있다.
반대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유기적임을 잃어버린 기사단은 저들의 수에 휘둘리는 오합지졸이 되어버린다.
구체적으로 지금이 그렇다. 루시 알른이라는 변수 하나에 붕괴된 제 1기사단은 패주를 택한 병력보다 못했다.
“기사단 간의 대전에서 승리한데다 제 1기사단 측에서 저희에게 명분도 주었으니. 저들은 이제 저희에게 아무 말도 못하겠군요.”
“그뿐이냐. 후일 전공의 문제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루시는 베네딕에게 전고에 대해 이야기했다. 1왕비가 제멋대로 할 수 없도록 억제력이 되어달라고 말이다. 베네딕은 루시의 기대를 결코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왕국의 충실한 기사로 남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이젠 내게 왕국은 뒷전이군.”
쓴웃음을 지은 베네딕은 더 이상 기사단 간의 대전이 의미 없다 판단내리고는 기사단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자들이 모두 저무는 데까지는 채 몇 분이 걸리지 아니했다.
*
버로우 공작가에서의 회의가 끝난 후 에르기누스는 파트란 공작 가문으로 가서 마법사들의 수준을 점검했다.
자신이 믿고서 일을 맡길 수 있는 이들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공작이 그러했고 공작의 딸과 아들이 그러했듯 공작 가문의 마법사들은 하나 같이 철저한 교육 끝에 완성된 마법사들이었다.
“재밌군.”
대개 마법사란 족속들은 머리 한 구석이 이상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기본기를 도외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을 하며 나아가다 이도저도 아닌 무언가로 그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지.
허나 공작가문의 마법사들은 아니다. 개인의 개성보다도 단체로써의 힘을 중시한 이들은 마법사보다도 군인에 가까웠다.
개인적인 감상으론 마법사들이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을 한다만 이번 일에 있어선 이 편이 낫지.
저마다의 생각으로 튀어다니는 마법사들을 관리하는 건 실로 귀찮은 일이니까.
기본기가 탄탄한데다 위의 명령을 어길 생각을 않는 이들은 계획을 펼치기에 제격이다.
파트란 가문의 마법사들 수준에 만족한 에르기누스는 이들을 이끌고서 요정의 숲 인근으로 향했다.
두 눈으로 결계를 보고 자신의 계획을 점검하기 위해서.
다른 마법사들을 내버려 둔 채 악신의 기운으로 물든 대지에 발을 들인 에르기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으로 물든 결계의 앞에 도달했다.
“여왕이시여.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내 과오를 바로 잡으러 왔습니다. 곧 만나러 갈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결계에 손을 대고서 긴 시간 품어왔던 마음을 쏟아낸 에르기누스는 이내 감정을 정리하고서 결계와 결계 내부의 상황을 살피려 했지만.
“…허?”
실패했다. 결계 내부의 무언가가 에르기누스의 개입을 가로 막은 것이다.
악신의 기운은 아니다. 그거라면 내가 가로막힐 리 없어.
그렇다면 이건.
설마.
“…요정여왕?”
잠에 빠져있어야 할 그녀가 내 개입을 가로 막은 것인가?
어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