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3
결정이 된 후에는 이야기가 빨랐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마냥 그렇지도 못했다. 어찌 되었던 간에 우리들은 꽤 대단한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니까.
“성녀님은 저희의 상징이자 지표입니다! 가장 위험한 곳에 보낼 순 없습니다!”
“교회의 분위기가 흉흉한 지금도 사람들이 주신 교회에 의지하는 까닭은 성녀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분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성녀님.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당신이 없으면 저희는.”
우선은 교회의 반대가 거셌다.
교황이 내부의 숙청을 계획함에 따라 수많은 이들이 저물고 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길 반복하는 게 현재 교회의 상황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신자들이 꿋꿋이 신앙을 지키는 까닭은 교회의 상징인 페이비가 태양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
이를 아는 사제들은 페이비라는 사람에게 위험이 빠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걱정했고 그보다 먼저 페이비가 위험에 빠지기 않기를 바랐다.
페이비를 진정 성녀로 생각하는 사람도. 페이비가 만들어진 성녀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다들 정숙하도록.”
이번 일의 규모가 규모인지라 파견된 주교, 아니지. 비었던 추기경의 자리를 채우게 된 요한은 손을 드는 것으로 사제들을 조용하게 만든 후 가만 페이비를 바라봤다.
“성녀님.”
“예. 요한 추기경.”
“아시겠지만 당신의 빛은 교회에 필요한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과분한 기쁨입니다.”
“당신이 없어진다면 많은 이들이 슬퍼할테죠.”
“그렇다 한들 또 다른 희망은 피어날 터이니. 저는 희망을 마주할 수 없게 된 이들에게 가고자 합니다.”
“그것이 신의 뜻이기에?”
“저의 뜻입니다. 신께선 자신의 말만을 따르는 꼭두각시조차 사랑하시겠지만 전 그러고 싶지 않거든요.”
신에게도. 신자들에게도. 다소 불경하게 다가올 수 있는 대답이었지만 요한은 그걸로 만족한 듯 맨 앞에서 다른 사제들을 설득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사람은 좋은 성직자다.
“지금은 저러십니다만 사실 완고하게 이 일을 반대하셨답니다. 과거의 잔재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고 말이죠.”
사제들이 있는 곳을 떠날 무렵 페이비는 요한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만 결국은 인정해주셨답니다.”
“저 꼰대가 허접 성녀의 멍청한 설교를 듣고 감화됐다고?”
“설교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어쨌든 과거의 잔재에게도 구원의 기회는 주어져야한단 걸 인정해주셨답니다.”
페이비를 걱정하는 요한의 눈길이 따스했듯 요한의 뒤를 바라보는 페이비의 눈길에도 따스함이 서려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결코 함께 할 수 없었을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고 있었다.
“요정의 환대를 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 다음으로 찾은 파트란의 공작은 여느 때처럼 살벌한 얼굴을 한 채 내 말을 들어줬다.
“에르기누스님께 미리 이야기는 들었다. 우리 딸의 의지도 확인했지. 그러니 본래 계획이라면 따를 예정이었다. 허나 이번 건 아냐.”
그리고는 평소 착각에서 시작된 위압감과는 다른, 위기감각이 경종을 울릴 정도의 압박을 내게 선사했다.
“그대들은 우수하지만 그래봐야 학생이다. 아직 어려. 숙련된 전사라고 하기엔 너무도 어설프지. 그런 그대들끼리 신화시대의 잔재를 향해 다가가겠다고? 마법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내 딸을 데리고?”
파트란 공작은 허술한데다 실수를 연발하는 남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공작의 우두머리가 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기도 하다.
나라를 지탱하는 대마법사이며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는 군주이며 베네딕의 거구 앞에서도 당당히 웃을 수 있는 기사다.
그런 그의 위압은 솔직히 말해 견디기 어려운 종류였다. 특히 얼굴이 최악이었다.
안 그래도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마피아두목 같은 인간이 진심으로 살의를 드러내면 쪼는 게 정상이잖아.
뭐어. 그래도. 버틸 만 하네.
“왜요?♡ 따님이 죽으면 사흘밤낮을 펑펑 울 것 같아서 그러나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폐인이 될 것 같아서 그런가요?♡ 부디 그 꼴을 보고 싶네요♡ 허술 공작님의 사악한 얼굴은 폐인이 되도 멀쩡한 걸까 궁금하거든요♡”
나는 여태까지 수도 없이 많은 강자들을 상대해왔다. 신화시대의 악신마저도 눈앞에서 마주했다.
그리고 그들을 모욕했다. 분노케했다. 나에게 살의와 적의를 쏟도록 하기 위해 벌벌 떠는 손을 감추며 웃음을 지었다.
근데 이런 딸바보 아저씨한테 쫄 것 같아?
하. 웃기는 소리.
반대로 이 아저씨가 해실해실 웃었다면 진심으로 도망쳤을 것 같긴 하네.
“혹시 따님께 그릇된 감정이라도 품으셨나요?♡ 얼빵이가 들으면 놀라겠네요♡ 연애 소설을 엄청 좋아하는 바보니까 눈이 휘둥그레지겠는걸요?♡”
“…사람 감정을 건드리는 걸로 명분을 만드는 건 적당히 해라. 그러다 진짜 죽는다.”
와아. 들켜버렸네. 허술하긴 해도 똑똑한 사람이라니까.
들켜도 아무 상관없긴 하지만.
인지하는 것만으로 도발을 막을 수 있다면 더럽게 대애단하신 악신 나으리들이 나한테 놀아날 리 없잖아.
“화나셨나요?♡ 딸의 친구에게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나요?♡ 드디어 숨겨진 강간마의 본성을♡”
“미안하지만 나는 아내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돌린 적이 없다. 너 같은 꼬맹이라면 더더욱 사양이다.”
“흐응♡ 저엉말 그럴까요?♡”
“알겠다. 알겠어. 시험은 이만 할테니 좀 적당히 해라. 감정을 잡아두는 것도 은근히 어렵단 말이다.”
투덜투덜대며 손을 내저은 공작은 이마를 꾹 짚으며 한숨을 내뱉고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딸을 지킬 자신이 있나?”
“딸보다 가문이 우선인 폐급 아버지보단 더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말 안 해도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거거든요.
친구들이 죽느니 내가 죽는 게 낫단 생각은 여전하니까.
그냥 모두가 멀쩡히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겠노라 결심했을 뿐이야.
“그거면 됐다. 네가 펼친 기적에 대해선 버로우 공작에게 대충 들었으니 믿으마. 부디 이번에도 기적을 일으켜다오.”
딸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뒤로 한 채 켄트 가문 쪽을 찾은 나는 어쩐지 피로해보이는 켄트 백작과 이미 갈 채비를 끝마친 프레이를 만났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근데 아무 말도 안 해?”
“저는 제가 할 일을 하고 딸아이는 딸아이가 할 일을 할 뿐이죠. 프레이는 실력있는 검사입니다. 이런 곳에서 위험할 일은 없겠죠.”
“응. 맞아. 다 베고 올 거야.”
그 후에 찾아간 아서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기사단장에게 몇 마디를 하고서 빠져나왔다.
여태까지 설득했던 사람 중 가장 실없는 모습이었다.
“당연한 거다. 너희들과는 달리 난 있으나 없으나 상관 없는 존재니까. 오히려 쓰잘데기 없는 상관이 사라져서 좋아하겠지.”
애초에 자기가 왜 여기에 혼자 온 건지도 모르겠단 아서의 말에 나도 고갤 끄덕였다. 아서가 여기서 공을 쌓아봐야 분란밖에 안 되잖아.
“어이. 왜 고갤 끄덕이는 거냐.”
“말씀하신대로 쓸모없으시잖아요. 무능왕자님.”
“이럴 땐 옆에서 위로를 해주는 거다!”
“싫은데요? 그러다 헛된 희망을 품고 어깨를 피면 꼴사납잖아요.”
“말 좀 예쁘게 할 수 없나!?”
“못하는데요? 꼬우시면 입을 막아보시죠?”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으아악! 진짜아아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네딕에게 도착했을 때. 다른 기사들과 함께 몸을 움직이고 있던 그는 천으로 땀범벅이 된 손을 닦아내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잘 다녀오거라.”
“…내가 없어도 상관 없단 거네. 바보 파파?”
“그럴리가! 걱정도 되고. 환대고 나발이고 다 박살내면 되는 거 아니냔 생각도 들고. 널 위험으로 내모는 주신님이 밉기도 하다만. 그래도 넌 네 선택으로 나아갈 거잖으냐. 그럼 뒤에서 응원해줘야지. 아비답게.”
베네딕의 망설임담긴 목소리를 들은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훅하고 안 쪽으로 파고 들어 베네딕의 몸통에 부딪혔다.
인간보단 거인에 가까운 그의 육신은 거성처럼 굳건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에 분명 흔들렸다.
“바아보. 아직 저 안에 들어가는 거 아니거든? 시험하러 가는 거라고. 시. 험. 그런 것도 구분 못하는 바보 파파가 대장이라니. 기사들한테 사과해. 멍청한 트롤의 피를 잇게 된 나한테도 사과해.”
“그. 그런. 방금 이 파파가 무슨 실언을 한 거니? 좋은 말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루시. 루시이이이.”
그렇게 전원의 허락을 구한 나는 요정의 숲 결계 인근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에르기누스가 그려준 지도와 왕국에서 제작한 지도를 비교해가며 지도를 모두 기록하고.
안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에 대한 대비를 생각하고.
요정의 숲 인근에서 벌어졌던 여러 사고를 머리에 집어 넣는 것으로 만약의 변수에 대비했다.
최악의 경우에 대한 대처도.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생각이 든 때에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얼빵아. 동정찐따해골의 음험한 마음은 잘 이어 받았어?”
“제가 배운 건 대마법사님의 지혜랍니다. 그 분의 숫기를 배울 생각은 요만큼도 없어요.”
“자기한테 마법을 알려 준 사람이 동정찐따라는 건 부정 안 하는 구나? 얼빵이. 은혜를 모르는 나쁜 사람이었네?”
“…네? 아니. 저. 이건 그런 게.”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짐승이라지?”
“괜찮습니다. 조이. 주신께선 짐승에게도 자비를 베푸실 겁니다.”
“주신님 대단해.”
“왜 다들 저를 짐승취급하는 건가요! 전 멀쩡한 사람이라고요! 은혜에 대해 알고 있다고요! 그렇지요?! 칼 교수님!”
“…호위는 이런 일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당신마저!”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조이를 무시한 채 친구들의 장비와 상태를 점검한다. 좋아. 모두 만전의 상태야.
어설픈 구석은 없어. 이게 모니터 너머였다면 최종보스도 여유롭게 박살낼 수 있었을 거야.
사실 모니터 너머라면 맨 손으로도 가뿐히 잡을 수 있는 녀석이니 뭐가 됐든 여유롭지만.
“허접들. 게으름 부리지 말고 움직이기나 해. 날 노숙하게 만들면 너희들을 침구로 써버릴 거야.”
가보자. 요정의 숲이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