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5
요정들은 자신들이 왜, 언제, 어떻게 잠에서 깨어난 건지 몰랐다. 봄이 되어 꽃봉오리가 스스로 개화하는 이유를 모르듯 그들 또한 영원했어야 할 잠에서 깨어난 이유를 알지 못했다.
– 좀 더 자고 싶었어.
– 꿈은 행복했으니까.
– 꿈이 더 행복했어.
– 멋진 꽃 잔뜩.
– 재밌는 것도 잔뜩!
다만 한 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분명 요정이었다는 점이었다.
예전의 아름다운 외견이 사라졌어도. 봄바람에 자연스레 뒤섞이던 목소리를 잃었어도. 자연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됐어도. 꿈속의 아름다운 광경을 자랑하는 그들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요정이었다.
“그렇군요.”
요정들의 제멋대로인 이야기를 익숙한 듯 정리한 페이비는 고갤 주억거리고는 다시금 웃음을 지었다.
“그럼 다른 질문입니다만.”
허나 요정들의 태도는 방금 전과 달랐다. 페이비의 밝은 미소 앞에 협조적이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진 채 모두 벌레를 닮은 팔로 팔짱을 꼈다.
– 이제 우리가 말할 차례!
– 맞아! 질문은 번갈아가면서 하는 거!
– 너 천재?
– 나 천재?!
“맞네요. 예의가 없었습니다. 요정 여러분. 무엇이든 물어봐주세요.”
– 숲에 왜 왔어?
– 여기 재밌는 거 없어!
– 지루하고 어두워.
– 맞아. 너무 어두워.
재잘재잘거리며 숲에 대해 불평하는 요정들 사이에서 잠시 생각하던 페이비는 이내 밝은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을 뵈러 왔답니다.”
– 우리?
– 우리를?
– 왜?
“좋아하는 걸 보러 오는 데에 이유가 필요한가요?”
어지간한 상대가 들었다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미간을 찌푸렸을만큼 허술한 발언이었지만 뇌가 허술한 요정을 상대로는 페이비의 대답이 잘 먹혀 들어갔다.
철을 긁을 때 나는 소리보다도 더 소름끼치는 요정들의 웃음이 그를 증빙했다.
– 좋아?
– 좋은 거구나?
– 좋은 거네?
– 그럼 놀자!
– 뭐할래?
– 뭐할까?
– 뭐하고 놀까?
<이런.>
다만 저들의 마음에 든 게 최적의 선택은 아니었다.
‘말씀하세요.’
<방금 겪어봐서 알겠지만 요정의 놀이는 인간의 기준에서 실로 과격하다. 악신의 기운을 품은 지금은 어떨지.>
…방금 전에 우릴 덮친 기습이 장난이었다고?
그거 다른 애들이었으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공격이었는데?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한테 뇌가 사라지면 이 꼴이 나는구나.
<장난을 거부하진 마라. 저들이 멀쩡할 적에도 기분이 상하면 귀찮았는데 지금은 어떨지.>
‘대충 이해했어요.’
나는 대답하길 곤란해 하는 페이비의 어깨를 뒤로 당겼다. 나무 위에서 쏟아지는 요정들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예쁜 걸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얼빠여우마냥 외견만 보는 건 아닌가? 내 입장에선 차라리 다행이네.
벌레보다 징그럽게 생긴 것들이 변태마냥 줄줄 따라다녔다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았을 테니까.
“고블린보다 멍청한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놀이래 봐야 별 거 있어? 술래잡기 정도지.”
– 우리 바보 아냐!
– 우리 더 많이 알아!
– 술래잡기 재밌지 않아?
– 재밌긴 하지만.
– 야!
– 아무튼 싫어! 다른 거!
대충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다. 술래잡기가 하기 싫은 게 아니라 그냥 얄미워 보이는 내가 제안한 것 자체가 싫단 사실을.
“흐응♡ 자신 없구나?♡”
그래서 보란 듯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지옥의 악마도 토악질을 해댈 숲에서 평생 지낸 주제에 질 게 뻔해서 무서운 거지?♡ 풉♡ 벌레다운 발상이네♡”
– 절대 아냐!
– 짜증나!
– 너 싫어!
– 꼬맹이주제에!
“자신 있으면 해도 되겠네?♡ 어차피 나 같은 꼬맹이한텐 안 질 거잖아?♡ 그치?♡ 응?♡”
– 승부!
– 너 따위한텐 안 져!
– 덤벼!
요정들은 너무나도 쉽게 내 도발에 넘어가서는 유치원생들이나 할법한 욕지거리를 지껄이며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신기하네. 처음에 만났을 때는 하도 괴상하게 생겨서 언제든 기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예상과는 달리 꼬맹이 이하의 멍청이들이라 다루기 편했어.
“이걸로 요정들을 떨친 건가.”
“네에. 뒤편에서 구경하는 것밖에 못하는 무능왕자님을 위해 일했답니다. 속편한 소릴 지껄이는 걸 보니 참 기쁘네요.”
“거 미안하게 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요정이 가로 막고 있던 곳을 지나친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표로 하던 곳에 도착했다.
요정의 숲을 봉인한 결계의 인근에. 에르기누스가 만들어낸 결계 너머로 악신의 기운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인다.
오래 전에 주인을 잃어버린 채 주인이 남기고 간 명령에 따라 침식을 반복하는 기운은 노을을 잡아먹으며 다가오는 어둠처럼 기괴해보였다.
“저기에 끼어드는 거냐.”
“…에르기누스님께선 결계를 건드려도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괜찮을 겁니다.”
조이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을 했지만 정작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악신의 기운을 마주하는 데에 익숙한 나조차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기운이다.
신성 하나 품지 못한 조이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일지는 훤하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무조건 실수를 저지를 것 같네. 어떻게 안심을 시켜 줄 방법이.
아. 있다.
“루시?”
나는 조이의 대답에 미소로 대답을 해주고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기도했다.
자잘한 능력치의 상승을 위해 아침마다 허접주신에게 기도한 덕에 기도에는 익숙했다.
기도가 뭐 별 거냐.
대충 기도하는 신에 대한 칭찬 한 번 해주고. 감사 한 번 전하고. 자기가 바라는 거 이야기 하고. 다시 감사를 전하면 끝.
제대로 된 성직자라면 이걸 엄청나게 세련되고 고결하게 만들겠지만 난 주신의 사도이면서도 성직자로서는 반푼이니까.
대충 위대하신 주신님. 제 친구 좀 잘 돌봐주세요. 제대로 안 해주면 내일부터는 기도 안 할 거에요. 정도면 충분하겠지.
기도를 끝마치고서 눈을 뜨자 멍하니 날 바라보는 조이의 눈이 보였고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페이비가 보였고 어딘가 신기하단 듯한 눈을 하고 있는 프레이가 보였고 역시나라는 듯 고갤 주억거리는 칼이 보였고 다급히 고갤 돌리는 아서가 보였다.
쟨 또 왜 저런담?
고갤 갸웃한 나는 한참이 지나도 고갤 틀 생각을 안 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금 조이를 바라봤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바보짓을 하진 않겠지. 얼빵아.”
“절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전 당신에게 배움을 얻은 천재마법사라구요?”
“흐응. 그래?”
여전히 조이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은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결계 안의 어둠을 피하지 않았다.
“3왕자님. 마법진 그리는 걸 도와주시겠어요?”
“뭘 하면 되지?”
이미 학생 수준에서 저만치 벗어난 조이는 아서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마법진을 완성했다.
“후우. 시작할게요.”
그녀가 길게 내뱉은 숨과 함께 마법진 안에 마력을 불어넣자 그녀의 주변에 수많은 그림들이 떠올랐다.
허공에 자리한 마법들은 내가 알던 마법들보다 추상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그 안에 담긴 뜻은 더 선명했다.
마법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지만 이번 건 달라. 왠지 모르겠지만 마법진 각자가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아.
조이의 오른쪽은 소통이야. 소통 바로 옆에 있는 건 고요. 차단. 침묵. 지배. 그리고.
“…어라?”
거의 이해하질 못했던 조이의 마법이 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이 신기해 집중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주변의 풍경이 검게 물들었다.
‘할아버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내 정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납치당했다는 거려나.
이거 좆됐네.
지금 내가 지닌 마법에 대한 저항력은 어지간한 기사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
얼빠여우가 준 축복도 있고. 항상 두르고 있는 신성도 있으니까. 설령 정신이 빼앗길 일이 있어도 어지간하면 이토록 무력하게 당하진 않아.
그러니 이 자리에 날 초대한 존재는 작금의 나와는 격이 다른 존재. 지상이 아닌 지하나 하늘에 있어야 할 이. 혹은 그와 한없이 가까운 이.
“안녕하신가요.”
귓가에 목소리가 울려퍼진 순간 어둠으로 물들었던 세상이 다시금 빛을 되찾는다.
말라비틀어진 대지. 썩다 못해 기괴한 모양새로 변해버린 나무. 콧가를 스치는 곰팡이 향. 새벽의 어두움이 아닌 동굴과도 같은 검음.
“주신께서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여.”
주변의 환경을 훑어가며 뒤 편으로 고갤 돌리자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몇 가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마 부근은 어둠이 잡아먹은 듯 투명한 검정. 오른 쪽은 할머니처럼 쭈글쭈글. 그리고 남은 부분은 본래의 모습.
“이런 방식으로 초대를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허나 제게 이 방식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단 걸 이해해주세요.”
나는 그녀를 알았다. 정확하게는 과거의 그녀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고, 그러면서도 숲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하다가, 그래도 여자아이 하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다버릴 생각을 하던 이.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과거 요정의 여왕이라 불리던 이. 그리고 지금은 꿈과 현실조차 구분하지 못할만큼 무력해진 이.”
닭장이란 소리를 듣고 얼굴을 붉히던 아줌마.
“의 무의식? 자의식? 분체? 아마 그런 걸 테니 편히 대해 주세요. 행복한 꿈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요정여왕은 이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
의 분체였다.
…분체? 그건 뭔.
내 얼굴에서 의문이 드러났던 것인지 눈앞의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가 한참 웃음을 흘리더니 느슨한 목소리를 냈다.
“요정여왕은 생물보다는 신에 가까운 존재니까요. 정신체의 정신이 불안정했을 때 그게 흩어지는 건 흔한 일이랍니다.”
“쓰잘데기 없는 지식이 잔뜩이네. 닭장 아줌마. 퀘퀘한 냄새가 날 때까지 발효되면 머리가 좋아지는 거려나?”
“…네?”